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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금지, 위반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 고찰

1.
친족의 구조를 밝혀보려던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금기의 주제에 직면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많은 부분 그가(혹은 인류학) 의존해 왔던 자연/문화라는 구조적 공리를 이 주제에서는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것은 자연적 질서에 속하며, 하나의 규범에 관계하거나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은 문화에 속한다"(Le'vi-Strauss 8). 이 공리에는 자연과 문화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이분법의 구조(충만한 자기현존으로서의 자연과 파생적이고 변형된 것으로서의 문화)를 전제한다. 그런데 그는 근친상간 금지의 양립성을 발견하면서 이 공리가 포기되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친상간 금지는 모든 사회에 보편적이므로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것 같지만, 한편 금지하는 규범으로서 문화적 질서에 속하기도 한다. 금기의 주제는 인류학의 일종의 스캔들처럼 보인다. 이 스캔들에는 욕망과 더불어 위반의 이슈들이 얽혀있다. 인간의 문화적 본질에 속하는 금기에서 자연적 본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금기가 욕망과 맺는 관계 때문일 것이다.

2.
사회 전체가 여성(소유대상 혹은 물질적 유용성으로 간주된)을 교환하고 배분하는 과정에서 근친상간 금지가 발생했다고 보았던 레비스트로스는 그 동안 인간의 내적인 자질(금기 의식, 유전적 요인, 심리적 강박 등)에서 금기의 원인을 찾으려 했던 기왕의 시도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교환 충동에서 비롯하는 재화의 교환이나 증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족 내 소유물(여성)에 대한 욕망을 포기해야만 한다. 사회적 부를 분배하고 교환하는 목적을 위해, 그리고 일정한 사회와 문화(경제적 필요에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가 만들어짐으로써, 근친상간의 동물적 욕구들은 포기되어야 했다. 가정과 사회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유물에 대한)욕망을 제어하고 중화하는 금기는 정식으로 사회와 문화의 조건으로서 합법화 된다. 결국 사회와 문화는 욕망의 중화 과정으로 요약된다.

중화된 욕망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축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을 부정하고(노동), 자기 자신을 부정(욕망의 억제)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자기 자신을 한없는 동물적 욕구들로부터 떼어내어, 인간은 스스로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물성에 깃든 파괴와 폭력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자연 안의 극단적인 폭력의 이미지들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인간은 맹목적인 충동을 거부함으로써 자연이 아닌 또 다른 존재성을 허가 받을 수가 있다. 결국 자연성을 거부하는 것은 극단적 폭력의 형태로서 죽음에 이르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의식하고) 거부하는 존재. 법의 언어가 언제나 생명의 보존에 집중하며, (어두운)죽음의 영역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법은 그 반대편에 있는 처벌-죽음을 통해서만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고 표현한다). 금기와 관련된 바따이유의 논의는 결국 인간과 동물의 구별이라는 하나의 주제 속에서 육화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부정의 과정(욕망의 금지)으로 압축될 수 있으며, 인간의 독특한 정서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자연의 동물적 본성을 특정한 이미지로 치환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기 때문에 특정한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히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부정하게 되는 순간 출현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어두움, 비밀, 물질성, 살아있는 양태 등. 이 이미지들은 우리가 부정하는 것들과 연결되면서 어둠의 세계에 배치된다. 바따이유는 이 과정을 "기원에 대한 거부"라고 적는다(Bataille Accursed Share II 62). 우리 자신이 나오게 된 그 출처들로부터 멀어지면서, 사실은 벗어날 수 없는 기원을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여기에는 성 충동에 대한 금지뿐 아니라, 배설물, 피, 육체 등, 우리를 동물적 본성에 연결 짓는 모든 사물과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 있다. 인간성의 의미는 결국 (부정을 통한)동물적 욕구와 맹목적 충동의 거부이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존재. 이것이 헤겔(F. Hegel)적 의미의 인간성이다. 우리는 이를 비극적 존재의 조건이라고 이해한다. 모든 문화적인 고양(高揚)의 이미지는 이 비극적 조건들의 현시와 순화의 형태로 드러난다. 문화주의는 금함으로써 출현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인간성의 원칙과 동물적 무질서의 대립 . . . 완전한 인간성은 감각의 무질서를 철저히 배제한다. 완전한 인간성은 자연적 원칙을 부정하며, 그런 사실조차 부인 . . . 딸에 대한 아버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욕구의)제한이 그러한 표상 속에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에게 열정적 폭력과 더러움과는 다른 가치를 보장하는 무성적(sexlessness) 인간성의 이미지(지성소)이기도 하다"(55-56).

이와 같이 헤겔적 관점에 따라 사물들을 설명하면, 모든 사회적 문화적 동요의 최초의 움직임들은 고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욕망대상에 대한 접근의 금지. 다시 말해 이것은 욕구대상에 대한 포기와 자기억제의 결과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교환에서]증여는 그 자체로 포기이다. 그것은 제한 없는 향락, 동물적, 즉각적 향락의 금지이다. . . . (인간성)의 본질은 바로 그런 동물성을 극복할 때 얻어진다. 근친의 거부 ― 자신의 것을 스스로 금할 줄 아는 거부정신 ― 는 동물적 탐욕과는 전혀 다른 (인간만의)태도인 것이다"(56-57).

3.
바따이유가 (헤겔을 따라)말하는 인간성의 본질은 참으로 지독한 비극적 정서들을 탄생시킨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교육하고, 억제하는 활동을 통해, 인간은 욕망을 금지하고, 노동하며, 죽음을 의식하는 영예로운 존재가 되지만, 동시에 공포, 고뇌, 혐오, 수치와 같이 고문에 의해 발생하는 부정의 정서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고뇌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정신분석에서 오이디푸스 테마의 관건은 중화된 욕망과 문화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잘 설명되는가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에고의 질서가 있다.

그렇지만 욕망을 억제하는 행위가 인간성의 본질이라고 이해한 바따이유의 논의는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는 거의 헤겔적 관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 주장은 금기와 관련된 우리의 지식을 멀리까지 확장시켜 주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오히려 이것은 법과 도덕의 상투적 표어이기까지 할 정도이다. 인간만이 자신을 억제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진 이러저러한 비극적 고뇌들은 필연이며 현실적 삶의 조건이 된다. 그것은 슬프지만 감내해야 할 자아의 현실원칙이다. 이 조건들 아래서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우리자신을 고문하든지! 아니면 짐승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따이유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인간성의 본질로서 부정은 심지어는 그 본질까지도 문제 삼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의식할 줄 아는 존재는 따라서 자신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부정까지도 부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족 내 여성을 포기하고 증여함으로써 즉자적으로 솟구치는 충동을 억제한 인간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매혹적 가치의 발생! 근친의 금지는 이제 그 반대의 결과로서 욕망 대상에 대한 존경과 조심스러운 매혹적 가치들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전체가 탐욕 대상을 금지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의 가족 내 여성뿐 아니라, 증여함으로써 얻게 될 다른 가족의 여성조차도 특별한 가치를 맛보게 된 것이다. 소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한없는 욕망. 주인으로서 나의 관능적 의지대로 대상을 처분할 수 없게 될 때, 인간은 그 대상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선망을 가지게 된다. 또한 동시에 매혹적 대상에 대한 소유는(결혼, 교환, 성행위 등) 규칙을 위반하는 영역을 열어 제친다. 욕망 대상에 대한 금지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금지된 대상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강렬한 욕망. 이때의 욕망은 더 이상 동물들이 향유하는 즉각적 관능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인간만이 가지는 환각인 셈이다. 바따이유는 이것이 (위반의)에로티즘을 불러들인다고 말했다: "금지된 대상에 대한 선망이 없다면 에로티즘도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에로티즘에 의한 탈선이 없었다면, 또 그것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면 존경도 없었을 것이다. . . . 존경은 폭력으로 가기 위한 우회로이다. . . . 금기는 성행위의 폭력을 바로잡는 대신에, 인간적 세계, 즉 동물성으로서는 모르는 규칙위반의 세계를 확립 한다"(57). 사실 성행위(생식의 의미가 아닌)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란 그 자체 위반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때에 즐거움의 주체는 금지되어 어두운 곳에 은폐된 모든 것들(성적 기관, 타액, 신음, 대낮으로부터 배제된 밤의 언어들. . .)이 파괴되어 밝은 표면으로 환히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며 거기서 기쁨을 만끽하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위반에서 발생하는 쾌감의 과정은 도착증의 형태들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도착은 위반을 통해 욕망을 변형시키거나 운용하면서, 그로부터 쾌감을 도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아버지와 아들(그리고 어머니)의 드라마를 통해 잘 볼 수 있다. 드라마는 주로 아들의 반항과 도착이라는 주제로 짜여 진다. 도착의 다양한 형태들은 아버지의 법으로서 금지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의 결과로서 현실화된다. 아버지의 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가 아들의 도착을 설명하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사회적 계약에 의해 성립된 경우에도, 법은 일단 공포되고 나면 극단적 형태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권위의 표현으로서 법은 계약의 조항을 파기할 수도 있는 당사자들의 자발적 의지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무제한의 권리라는 것은 애초부터 법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절대적인 조항으로 발전하는 법은 어떤 경우든지 노예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계약이 내포하고 있는 자발성과 절대적인 조항으로서의 강제력 사이에는 특정한 매개가 필요한데, 이 간극을 매개하기 위해 법은 폭력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그 자신의 권위를 폭력을 통해 확보하는 것이다. 법이 폭력이나 폭정을 통해 노예상태를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될 때, 그러나 법의 권위가, 절대적 권력(폭정)의 본질과는 반대로, 계약과 공모에 의해 부여받은 이차적이고 왜소한 힘으로 드러날 때, 아들의 반항은 새디스틱한 경향을 띠게 된다. 새디스트는 아버지의 신비화된 법을 폭정과 연결시키면서 사유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금지는 그 자체 억압과 폭력이며, 이로써 존재는 노예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새디스트의 고뇌와 분노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차적 존재로서의 노예상태! 아버지의 법은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권력과는 거리가 먼, 나약한 자들의 연대에 의해 부여된 이차적 권력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권력이 폭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고뇌와 분노는 아버지의 폭정에 투사된다.

바따이유는 사드(M. D. Sade)가 "아버지의 법을 자연의 영속적인 운동"(Bataille Literature and Evil 110)으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지적한다. 자연의 한없는 무차별적 폭력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폭력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아버지의 법을 표상하는 신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예들의 공모에 의해 신비화된 존재이다. 그러나 자연의 운동은 다른 나약한 것들로부터 부여된 권력이 아니라 그 자체 광채를 발하는 영속적인 힘이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의 폭력(법)을 모방하면서 아버지를 저주하지만, 더 영속적인 절대적 권력인 악(자연적 제도)을 통해 그 폭력을 패러디한다. 아버지의 법은 악행의 과정이다. 그래서 그것은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자연이라 불리는 . . . 짐승에 의해 승인된 . . . 진정한 쾌락"(117; Sade 재인용)을 모방함으로써, 사실은 아버지의 악행이 보잘 것 없고 왜소한 것임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나온다: 신이시여! 그것밖에 안되나이까? 이제 진정한 악을 보여드리리다! 아들의 언어는 아이러니로 짜여 진다. 이 아이러니의 분노에서 법의 폭정은 그 보다 더 가혹한 악의 행위를 통해 모방되면서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에게 매 맞는 아들의 드라마에서 어머니의 태도를 보면, 이와 유사한 아이러니의 도착을 보게 된다. 그녀는 상반된 입장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데, 우선은 아들을 보호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에 괴로워하며, 아들이 겪는 그 고통만큼이나 가혹한 처벌을 자기 자신에게 투사한다. 그리고는 다음의 행동을 취하는데, 아들에게 가하는 아버지의 매질보다 더 가혹하게 회초리를 들어 아들을 내려친다! 패러디는 커다란 전시적 효과를 불러들이면서 강렬한 반항의 흔적을 남긴다: 새디스트의 가학에는 "피해자의 언어"가 스며들어 있다(Bataille Erotism 190; Deleuze Masochism 17).(주1)

법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상위원리(진, 선, 미 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권위로서의 법은 다른 상위원리를 지시하면서 이를 설득하기 위해 특정한 내용과 대상을 갖는 이차적인 하위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 상위개념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법은 구체적인 내용과 대상을 삭제하고 순수한 형식적 구조의 양상을 띠게 된다. 법적 권위의 정당성은 내재적 원리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다. 사물의 모든 양태를 이성의 내재적 원리로 전환시킨 칸트(I. Kant)의 도덕법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네 의지의 준칙에 맞게 행하라! 그러다 보니 개인은 의지의 준칙뿐 아니라 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는 법의 실체조차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죄를 짓고 순수형식의 실질적 표현인 처벌을 받음으로써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법은 죄의 결과인 처벌에 의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법은 이제 죄를 만들어내는 기계가 된 셈이다.

이때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도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법의 폭력을 순수 형식적 구조로 이해하면서 발생한다. 죄(위반의 쾌락)와 처벌이라는 법의 형식이 견고해지면서 맹목적 구조의 틀을 갖추게 되면, 아들은 이 형식적 구조를 자동화의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면서 난센스를 만들어낸다. 즉 쾌락과 처벌은 인과관계(욕망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가 아니라, 단순한 시간상의 연쇄(욕망 다음에 처벌)로 변환되는 것이다. 법이 그 자체 내재적 형식을 띠게 될 때, 법이 더 이상 목적(선이나 진리와 같은 초월적 기의)이나 대상(구체적 상황의 묘사)을 지시하지 않을 때, 그 자체 목적으로서 맹목적 메커니즘을 띠게 될 때, 욕망과 처벌의 자동화된 공식(욕망=처벌)은 무한히 확장되어 오히려 구조의 구멍들을 남기는 것이다. 따라서 금지하는 것을 욕망했을 때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제는 이제 역으로 진행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게 된 셈이다: 처벌은 금지된 것의 욕망을 허가한다! 쾌락 후에 처벌이 따르는 절차가 역전되어 이제 처벌 후에는 반드시 쾌락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들은 스스로 처벌을 원한다. 처벌을 원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나 위반에 대한)죄의식이나 양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처벌의 고통은 아들의 망상 속에서 무한한 쾌감의 기다림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절 좀 때려주세요! 아들은 구조의 구멍들을 들락날락 하면서, 그 안에 자의적인 내용물들을 채우면서 형식의 유희를 즐긴다.

이러한 매저키즘적 위반은 프로이드(S. Freud)가 해석했듯이 죄의식을 해소하려고 매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아버지의 법을 비웃고 있다. 죄의식과 양심 때문에 위반을 한다는 것이 될 법한 소리인가? 피학적 욕망의 실현과 표현은 그 자체 법의 난센스를 예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처벌을 스스로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법 집행의 과정으로서 처벌의 효과와 목적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쾌락은 이제 처벌의 원인이 아니라 처벌의 결과가 되어 버렸다. 같은 의미로 처벌은 쾌락을 인가해주는 의례가 되어 버렸다. 미리 처벌을 받고 쾌락을 허가 받는 난센스의 유머. 이것이 아들의 논리학적 위반이다. 이 위반 안에서 법의 형식은 처음에 의도하던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다. 매를 원하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난감해지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처벌을 애원함으로써 처벌의 최초의 목적은 무효가 되고 우스꽝스럽게 전복되기 때문이다: 처벌은 위반의 조건이 되었다! 더 이상 처벌의 주체가 아닌 아버지(노예가 되어줄 테니 내 말을 따르라구!). 무의미한 아버지의 법. 실패한 아버지의 법. 패배한 법의 선언. 이것이 바로 유머러스한 매저키스트의 수사적 테크닉이 겨냥하는 본질이다.(주2)

5.
이상한 것은 어째서 도착의 징후들 속에는 양심이나 죄의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바따이유가 지적했듯이 욕망을 억제하고 금할 줄 아는 도덕적 존재가 어째서 강렬한 에로티즘의 순간에는 이러한 인간적인 본성을 벗어버리는가? 위반의 영역은 인간성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러나 동물의 맹목적 충동을 벗어나는 인간적인 면모는 욕망을 억제하는 부정에서뿐 아니라 짐승이 소유하지 못한 위반행위에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병리학적 징후들을 소유한 도착증(위반)의 형태들을 통해 우리는 욕망과 그것의 금지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욕망은 양심이나 죄의식의 표현인 억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억압으로서의 법이나 규율과도 관계가 없다. 심지어 거기에는 자아와 자아의 의식으로 포장된 인간적 이미지조차 준거하지 않는다. 자아와 인격의 이미지는 이성과 관념의 추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양심이나 죄의식 때문에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욕망이 좌절된 결과로서 양심과 죄의식의 표상이 나온다. 다시 근친상간으로 되돌아가서 이렇게 질문해보자: 욕망은 근친상간을 원하는가? 근친상간의 금지가 실재한다는 것과, 근친상간을 욕망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근친상간은 금지가 가르치고 있다. "전범(아버지)은 대상을 미리 가르쳐준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어머니를 욕망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김현 42). 욕망의 특정한 대상은 미리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욕망은 일종의 오류추리의 결과인데, 일단 사회적 규율에 의해 욕망의 금지가 결정되고 나면, 이 억제작용을 표상할 욕망의 대상이 결정된다. 근친상간의 욕망이 현실화되는 것이다(아버지의 법이 오히려 근친상간을 욕망한다!). 교환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금한다는 말을 근친상간을 금하기 위해 교환을 사회화한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자! 문제를 혼동하면 안 된다. 따라서 근친상간을 욕망하기 때문에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이 우리의 의식에 작용하는 표상 작용 때문에 왜곡된 심상으로서 근친상간이 나온다. 이 왜곡된 이미지가 바로 오이디푸스와 그의 욕망이다!(주3)

물론 근친상간의 실증적 범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 자연으로서, 욕망의 내재적 본성으로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금기의 발생적 원인을 사회적 교환체계에서 찾은 의도가 무엇에 연유하는지 혹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이차적 문제이다. 바따이유가 그의 논의를 빌려온 의도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실제로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헤겔의 부정이나 모스(M. Mauss)의 증여-교환보다는 니체(F. Nietzsche)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욕망의 금지가 사회적 생산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계약은 법률의 강제력으로만 영속화된다. 그러나 어떻게? 계약 당사자들에게 (잠재적)유죄를 선고하여(주4), 그들로부터 모든 전복의 가능성들을 박탈함으로써! 법률, 사회, 가정 . . . 이러한 것들이 영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자백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금기의 원인을 욕망의 병적 징후들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프로이드가 그랬듯이)에는 한 가지 의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욕망 자체에는 어머니와 동침하고 누이를 범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욕망의 유죄를 선고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도의 관건은 현실원칙으로 잘 다듬어진 에고의 의식을 사회적 문화적 토대로 복원시키는 문제에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다른 외부적 힘에 의해 반동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예술적 욕구들은 사실은 검열이나 사회 정치적 테마들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움직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검열과 관계를 맺을 때조차도 예술적 행위의 본질은 검열에 대한 반발의 결과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이미 그것을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잠깐 보았듯이 간혹 표면상 법과 검열에 반발하는 효과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이들은 모두가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난장(亂場)판을 만들거나, 분열하고, 과장하고, 분노하면서 혹은 교묘히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면서, 은밀히 달콤함을 즐기는 도착의 시간을 갖는다. 욕망은 반발의 몸짓으로 변할 때 매우 강렬한 파토스를 뿜어댄다. 부정에서 비롯된 정념은 반동적 힘에 상당하는 가속화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금지가 욕망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부에서 초월적 방식으로 그 힘을 가하게 되면 욕망은 여지없이 사지를 비틀고 변태가 된다. 도착은 차단된 욕망이 계속 흐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반의 부정적 파토스를 욕망의 흐름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욕망의 에너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며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억압에 반발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욕망은 부정적이거나 반동적인 계기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혁명적인 것이다. 아마도 욕망이 근친상간을 알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근친상간을 하지마!, 근친상간을 하지마!" 그러나 욕망은 부정을 모른다. 따라서 욕망의 표면에 등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친상간. . . !, 근친상간. . . !". 관념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을 새긴다. 심지어 그 각인된 내용을 실행해서는 안 된다고 새기는 경우에도 말이다. 아버지의 법은 이런 식으로 아들의 신체를 가동시키는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욕망은 외부적인 요인에 자신의 힘을 낭비하지 않으며, 분노하거나 항거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흐름에 집중한다. 그러나 일단 이 흐름이 차단되기 시작하면, 욕망은 곧바로 자신의 파괴적 역능을 드러낸다. 위반이 금지로부터 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욕망에 관계하는 한 위반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변태성의 주체는 그것을 생리학적으로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하고 실험하는 주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위반의 본질로서의 욕망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재현되거나 표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단되는 경우에도 오로지 그 자신의 흐름에만 집중할 뿐이다. 금지의 역 기능으로 출현하는 금지된 대상에 대한 강렬한 욕망(위반, 도착)은, 욕망이 금지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욕망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금지된 내용조차도 욕망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따이유가 위반을 달콤한 에로티즘에 연관 지은 것은, 에로티즘이 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필요악으로서)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금지를 거부(부정이 아닌)하는 과정으로서 위반의 달콤함을 역설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헤겔보다는 니체에 더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상당한 매저키즘적 해학이 숨어있다. 금지가 위반을 만들어내며, 결국 처벌은 달콤함(에로티즘)의 우회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료한 일이지만, 너무나도 초보적인 이 결론을 다시 한 번 말해야 겠다: 금지가 위반을 만든다!

참고문헌

Bataille, Goerge. The Accursed Share Vol. I. II. eng. tr. Robert Hurley. New York: Zone Books, 1995.

______. Erotism: Death & Sensuality. eng. tr. Mary Dalwood.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6.

______. Literature and Evil. eng. tr. Alastair Hamilton. London, New York: Marion Boyars, 1997.

Deleuze, Gilles. Masochism: Coldness and Cruelty. eng. tr.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91.

Deleuze, Gilles & Guattari, Felix.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eng. tr. Robert Hurley. etc.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92.

______, Kafka: Toward a Minor Literature. eng. tr. Dona Polan.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86.

Le'vi-Strauss, Claude.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eng. tr. James Bell, etc. Boston: Beacon Press, 1969.

김현.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 나남. 1991.

(주1) 새디스트의 위반과 정치적 반항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Masochism 81-90)을 참고.

(주2) 결과론적 논리학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마조흐(S. Masoch)의 유머, 그리고 매저키스트의 논리학적 위반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Masochism 81-90)를 참조.

(주3) 사회적 억압과 정신적 억제의 관계, 그리고 이 두 억압체계가 만들어낸 왜곡된 심상으로서 오이디푸스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 Guattari Anti-Oedipus 113-122)를 참조하라.

(주4) 들뢰즈와 가타리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언급하면서, 채권자-채무자의 관계에 관한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사회체(Socius)가 어떻게 욕망으로 하여금 (잠재적 유죄로서) 스스로 채무자임을 내면에 각인 하도록 욕망을 규준화 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Anti-Oedipus 190-192)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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