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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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tition키에르케고르의 <반복>중에서(쇠렌 키에르케고르, <반복>, 다산글방, 2007) "[반복은] 근대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소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은, 그리스 사람들이 상기라고 한 결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모든 인식은 상기라고 가르쳤지만, 새로운 철학은 인생 전체는 반복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근대철학자 중에서 이 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사람은 라이프니츠 한 사람 뿐이다. / 반복과 상기는 동일한 운동이다. 단지 방향이 반대라고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즉, 상기되는 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뒤를 향하여 반복되지만, 진정한 반복은 앞을 향하여 반복된다. 그러므로 반복은, 만일에 그것이 가능한 경우라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상기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한다."(키에르케고르, 반복, 231-232, 다산글방) "기대를 하려면 젊어져야 한다. 상기에도 젊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반복을 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기대만을 원하는 자는 비겁하다. 회상만을 원하는 자는 추잡하다. 그러나 반복을 원하는 자는 참된 인간이다. 그리고 반복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할수록, 그는 그만큼 깊이 있는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인생이 반복이고, 반복이야말로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유죄판결을 내린자이고, 어차피 면할 길이 없는 운명 속에서 자멸할 수밖에 없다."(233-234) "인생을 두루 돌아보았지만 싫어졌다고 하는 자는,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반복을 택한 사람만이 참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하겠다. 그는 어린애들처럼 나비를 쫒아다니지도 않고, 세상의 영화를 엿보기 위하여 발돋움을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234) => 반복은 진정성의 증거일 것이다. "기쁜 것만이 반복한다"는 말의 속뜻은 "진정한 것만이 반복한다"는 것이다. "반복을 원하는 자는 삶의 엄숙성에 원숙한 사람이다."(235) 콘스탄티누스가 어느 카페에서 한 여인을 발견하고 유혹해서 한번 놀아볼까 생각했는데, 그녀가 오히려 다가와 마차를 함께 타고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는 처녀가 자신에게 믿고 맡겨버린 태도로 인해 자신이 무장해제되어, 그녀의 이 믿음은 어떠한 호신술 보다도 멋진 호신술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사물에 대해 반복이 어떤 의미가 있나? 콘스탄티누스는 베를린으로 가서 지난 번에 갔을 때를 상기하며 이번 여행에서 반복을 탐구하고자 함. 하숙집, 커피숍, 제도극장, 소극, . . . 지난번에 경험했던 모든 것을 다시 경험하면서 반복을 확인하려 하지만, 어디에도 반복은 없었다. 모든 것은 변했거나 달라졌고, 같은 것은 없었다.(단 한군데, 저녁의 어느 식당에서의 상황, . . 똑같은 농담, 똑같은 인사, 똑같은 우정, 똑같은 방, . . . 구태의연한 정물화, . . 만이 반복 가능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유스티누스 케르너가 언급한 남자의 예: 고향이 싫어져서 말을 타고 떠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 되돌아섰을 때, 자신이 방금 버리고 간 고향을 "다시 한 번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그 자리에서 되돌아가고 말았다.(다시 한번 눈여겨. 다시 볼 때 눈여겨 본다. respect. 긍정. 긍정으로서의 반복.)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 . 여행도 아무런 보람이 없다. 왜냐하면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굳이 한 발자국이나마 움직여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방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된다. 만일 일체가 헛된 것이고 재빨리 지낙 ㅏ버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조용히 앉아 있을지라도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보다도 더 빨리 여행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여행을 회상하게 만들면 된다. . . .잘 가거라! 그대 청춘의 풍요로운 희망이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다지도 서두르는가! 그대가 뒤쫓고 있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 자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잘 가거라! 그대 사내다운 힘이여! . . . 그대가 밟고 가는 대지는 환영에 불과하다! . . . 그대가 남긴 업적을 함께 디라고 가기 위해서는 되돌아가야만 하지만, 그대는 되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잘 가거라! 그대 숲의 아름다움이여! 내가 그대를 보고 싶었을 때, 그대는 이미 시들어 있었다. 달려라! 그대 쏜살같은 시냇물이여! 그대야말로 그대가 원하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대야말로 달리기만을 원하고, 결코 가득 차는 일이없는 바다로 사라지기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 . . 계속하라! 그대 존재의 연극이여! 그대의 지배 밑에 있으면, 써버린 돈처럼, 삶이란 되찾을 수 없다."(311) 청년이 세번째 편지에서 말하듯이, 주체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난데 없이 잠에서 깨어나듯. 그러므로 나를 불러줄 관리인도 없고, . . 그냥 어쩌다가 여기에 던져진 것이다.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와중에 샌기는 그냥 하나의 우발적인 사고처럼. 생각할 수 있는 인간적인 모든 확실성과 확률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받았을 때, 반복이 나타난다. => 그에게 반복이란 소크라테스식의 아포리아(aporia)를 조건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련(욥과 같은), 뇌우, 일체의 상실, 인격전체의 분쇄, "자살과는 전혀 다른 척도로써의 파멸", "은행이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하여 헌 화폐를 회수하듯이, 나는 나 자신을 철회" => 그랬을 때 반복이 나온다? (이는 마치 기독교적 역설처럼 보인다. 나를 던짐으로써 나를 찾는다, 나무 위에서 친구들에게 나를 던짐으로써 새로운 나를 찾는다, 혹은 친구를 찾는다, 혹은 신에게 나를 던져 믿음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삶이 돌아온다(아브라함)와 같은 식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현실로 데려오면 망쳐놓을지 몰라 떠나려고 한 그 여인이 결혼을 했다. 그 청년은 졸도를 할 만큼 놀라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시금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거리에 굴러다녀도 주워들지도 않을 이 '자기'가 다시 내것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 속에 있던 분열이 해소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나를 결합합니다. 이제까지 나의 자랑을 지주와 영양으로 삼고 있던 동정으로 인한 불안은, 이미 내 속에 침투하여 나를 분열시키지 않습니다."(384) => 절대적 자기의 회복? 다른 것과 상대화되지 않는? 이런 식으로 키에르케고르는 반복이 가능하다고 주장. 그는 "나를 되찾았다. 나는 모든 것을 갑절로 되찾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의미를 갑절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식으로 되찾은 것이라고. 즉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갑절로 되찾았다고. . . "이러한 반복에 비한다면, 정신의 규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 세상의 재물의 반복(되찾음)이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욥도 자식들만은 갑절로 되돌려 받지를 못했습니다. 모름지기 인간의 생명이란 그런 식으로 갑절로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정신의 반복만이 가능합니다."(385) "나는 나의 영혼이 그리워하고 있던 그 곳에 다시 왔습니다. 그곳은 모든 이데아가 원시적인 맹위를 떨치며 거칠게 울부짖는 곳입니다. 그곳은 . . . 자신이 속으로 말하는 말을 자기가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모든 순간에 생명을 걸고, 모든 순간에 생명을 잃고, 또 모든 순간에 생명을 새로이 되찾는 곳입니다. 나는 이데아에 속해 있습니다. . . . 이데아가 나를 부르면 나는 모든 것을 내던집니다. 좀더 옳게 말해서, 나는 내던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도 속이지 않습니다. 이데아에 충실함으로써 나는 아무도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나의 정신은, 내가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일지라도, 슬퍼하지 않습니다<<진리로서 이데아에 속하니까? 신의 섭리니까? 윤리적인 것을 뛰어넘으니까?>>"(386) ". . . 사상의 비상이여, 만세! 이데아에게 봉사하는 생명의 모험이여, 만세! 무한한 것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춤이여, 만세! 심연 속 깊이 나를 숨겨준 부서지는 파도여, 만세! 별들 위로 나를 튕겨올리는 파도여, 만세!"(387)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반복은 물질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물질은 순간적으로 변해가고, 매순간의 흐름과 새성속에 있기 때문에 지속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심미성의 관점에서 베를린 여행을 통해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것도 바로 그의 심미성이 물질의 구체적 변화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반복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자기를 잃어버림으로써, . . . 계속 "나의 시인은 이를테면, 자기자신을 파멸시켜 버리려는 순간에, 인생이 그에게 석방한다는 선언을 함으로써,<<소유의 포기가 아닌가?>> 비로소 간신히 정당한 권리를 찾은 것입니다. 이제 그의 영혼은 종교적인 색조를 지니게 됩니다. 이 색조는 결코 밖으로 나타난 일은 없습니다만, 애초부터 그를 지탱하고 있던 것입니다. 마지막 편지에 나타난 그의 열광적인 환희야말로 그 증거입니다. 그 환희는, 비록 그것이 아직 내면성에 머무르고 있기는 합니다만, 역시 일종의 종교적인 기분에 터전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종교적인 기분을,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인냥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그가 현실을 시적으로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것을 반복으로써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반복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반복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그의 의식의 제곱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시인에게는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것입니다."(397) 현실은 반복한다. 그러나 정신은 현실이 반복되는 동안에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쌓여가서, 제곱이 되고, 갑절이 되어, 새로운 수축과 응축이 일어난다.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응축은 시간이 가면서 불어나고, 변조되고, 즉 강도적으로 차이가 나게 된다. 반복되는 가운데 달라져가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의 문제=>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의 반복은 종교적 성격이 강한데도 그것을 넘어서 있다. 기독교적 역설이 있는데, 신에 대한 믿음은 종속인데도 그것이 해방이라고 하는 역설 같은 것. 역설은 이성적으로는 모순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역설을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 이전에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 이성을 넘어서 실존의 세게에서는 부조리한 것이 있다. 이 부조리의 힘이 바로 역설. 우리는 역설을 통해 이미 이성의 너머에 있는 것이다. 역설은 실존의 무한한 체념을 요구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무한한 체념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의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감정의 직접적인 충동이 아니고, 사변적인 반성도 아니며, 단지 실존의 역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을 통해 잃어버리는 것이 얻는 것임을 진리로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 . 신은 인간에 의해 파악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넘어서 있고, 알려지지 않은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 . 결국 역설에 의해서만 어렴풋이 드러내는 존재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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