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의 <사유와 운동(Pensee et Mouvant)> 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구절들을 인용하고, 각 주제별로 제목을 붙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첨가한 노트이다.
그리고 다음 파일은 저 노트의 제목별 index이다. 한눈에 파악하기 좋다. 언제든지 공부라는 건 총체화 과정이다. 총체성에 도달하는 것이 공부의 한 가지 목표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박사논문을 쓰면서, 도저히 자신이 기록하고 노트한 내용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올 수가 없어,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자신의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치우고, 그 방안의 면적에 맞는 크기의 도화지를 만들어 펼쳐 놓고는, 자신의 메모와 기록들을 그 도화지에 낱낱히 써 놓았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그 방의 "내부"에 있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제목차례>
― 실재적 시간의 회복 1
― 직관에 대한 잘못된 오해 2
― 참된 직관 3
― 지성의 명확성과 직관의 명확성의 차이 5
― 지속 = 의식 = 살아있음, 시간의 의미에 대하여 5
―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7
― 반복과 창조 7
― 실재에 대하여 7
― 직관의 비판능력, 내부의 역설, 친구조차 불신하는 저녁시간 . . 에 대하여 8
― 직관의 단순성에 대하여 9
― 과학과 철학의 방법상의 차이 9
― 철학적 직관에 의한 기쁨 11
― 변화에 대하여 12
― 지각과 개념작용의 관계 12
― 지각의 확장: 개념작용 13
― 지각기능의 확장으로서의 예술에 대하여 14
― 지각의 확장으로서의 예술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15
― 철학의 역할: 가치의 전환 16
― 직관에 관한 칸트의 견해 16
― 운동의 불가분성 17
― 변화의 불가분성 18
― 육체, 담지체, 물체를 벗어나는 것으로서의 운동과 변화 19
― 운동과 변화가 실재 그 자체이다 20
― 운동과 변화가 실재 그 자체라면, 과거를 다른 방식으로 취해야 할 것이다. 즉, 과거는 더 이상 현재와 분할되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있다. 20
― 변화가 불가분적이라면 과거는 현재와 한 몸이며, 스스로 자신을 보존할 것이다 22
― 과거와 현재가 단숨에 일어나는 한 몸, 즉 지속이므로, 실체란 운동과 변화 그 자체이다. 23
― 이 같이 실재 그 자체를 보다 잘 볼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예술을 통해서이며, 그 깊이는 철학을 통해 심오해진다. 24
― 분석은 상대적 질서에, 직관은 절대적 질서에 속한다 24
― 소설 인물의 예를 통해 본 절대적 질서 25
― 절대는 완전과 동의어이다 25
― 절대는 무한과 동의어이다 26
― 절대는 직관 안에서만 주어진다 26
― 직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실재: 지속=의식=흐름의 연속=상태의 연속 26
― 이미지와 비유로는 실재를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27
― 추상적 개념은 더더욱 실재를 표현하지 못한다 27
―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이다 28
― 지속의 다양성과 단성성에 대하여 28
― 구성적 부분과 부분적 표현 29
― 경험론과 이성론 29
― 참된 경험론에 대해 30
― 직관의 좋은 예 30
사유와 운동(La pensée et le mouvant)
이광래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2001.
《》표시는 편집자 주. [ ]표시는 내용 요약 혹은 첨가
. . . 중략 . . .
― 실재적 시간의 회복
“. . . 여러 체계를 검토하면서 나는 지속에 대하여 철학자들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철학사 전반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지위에 놓였고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처럼 취급되어왔다. . . . 공간을 연구한 다음 공간의 본질과 기능을 결정하고 얻은 결론을 시간에 적용 . . . 공간의 이론과 시간의 이론은 서로 짝을 이루게 되었는데,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갈 때는 단지 한 단어만을 바꾸면 충분했다. 즉 <병치>라는 단어가 <계기>라는 단어로 바뀌기만 하면되었던 것이다. . . . 《과학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지만, 형이상학은 왜 그랬을까?》 . . . 언어가 커다란 역할. . . 지속은 언제나 연장(延長)을 통해서 표현되며, 시간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공간의 언어로부터 빌려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부를 때 이러한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공간이다. 형이상학은 언어 습관에 순응해야만 했으며, 또 언어습관은 그 자체로 상식의 습관을 본받고 있다. . . . 내게는 오성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운동에서건 변화에서건 지속을 은폐시키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 . . 운동에 관해서 볼 때, 지성은 단지 일련의 위치들만을 고수하고 있다. 지성은 우선 한 점에 도착한 다음에 다른 점으로 가고, 또 다시 다른 점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점들 사이에 무엇인가가 발생한다고 오성을 반박해보자. 그 즉시 오성은 새로운 위치들을 삽입하며, 반박 받을 때마다 무한히 삽입시켜간다. 오성은 변이(變移)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다. . . . 왜냐하면 지성은 . . . 사물에 대한 우리의 행위를 준비시키고 개발시키도록 운명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는 편리하게도 오직 고정적인 점 위에서만 행해지며, 따라서 우리의 지성이 추구하는 것은 고정(固定)성이다. 지성은 움직이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또 그것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움직이는 것이 어디를 경과(經過)하는가를 자문할 뿐이다. . . . 지성은 두 개의 잠재적인 정지점들의 동시성을 확인하는 것에 그친다.《동시성이란 공간적 상태를 의미한다. 즉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앞선 것이든 뒤에 있는 것이든 동질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 . . 지성이 관계하고자 하는 것은 실재적이든 가능적이든 간에 언제나 부동성이다. . . . 우리는 운동이 단순하고 한 조각으로 된 전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 . . 고정성을 찾는 지성은 그 운동이 공간 위에 덧붙여지며 움직이는 것은 자기가 그 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선분의 각 점들 위에 차례로 있다고 사후적으로 가정한다. . . . 시간의 순간들이나 움직이는 것의 위치들이란 우리의 오성이 지속 및 운동의 연속성을 속사로 찍은 스냅 사진에 불과하다. 이렇게 병치된 시각(視角)에 있어서는 언어의 요구에 상응하고 결국에는 계산의 요구에 순응하는 시간 및 운동의 실용적 대용품이 있게 된다. . . . 이는 한갓 인위적인 재구성에 불과한 것이며, 시간과 운동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 . . 변화 . . . 오성은 변화를 계기적이고 뚜렷이 구별되는 여러 상태들, 즉 불변적이라고 여겨지는 여러 상태들로 분해한다. . . . 《그러나 이 상태들 각각이 변동하고 있음》 . . . 만일 이 상태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지속할 수 있단 말인가? . . . 지속의 본질은 흐른다는 것이며, 안정적인 것은 서로 연결되어도 지속하는 것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찌 간과할 수 있으랴? 실재적인 것 . . . 이것은 <상태들>, 즉 . . . 변화의 과정 동안에 찍어낸 속사 사진들이 아니다. . . . 그것은 흐름이며 변이의 연속이거니와 그것은 변화 자체이다. . . . 오로지 변화의 끊임없는 충동 . . . 자기 자신에 언제나 밀착해 있는 변화의 부단한 충동만이 있을 뿐이다. . . . 형이상학은 현재 우리의 지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운동과 변화의 본질적 모순을 엘레아학파의 제논(Zenon)이 지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 . . 운동 및 변화의 지성적 표상(表象) . . . 형이상학은 경험을 초월한다고 자처 . . . 그 경험의 가장 바깥 표층에서 취한 추상적인 일반 관념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 . . 그 문제들은 이동이나 변화 혹은 시간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이것들로 혹은 이것들의 등가(等價)물로 오인된 개념적인 고치였던 것이다.《제논이 운동을 모순으로 이해한 것은 운동을 공간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있음과 없음의 동시성으로 보았기 때문. 흐름으로 본다면 모순은 일어나지 않음》. . . 계기란 결손을 표시해주는 것이며, 또한 필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하나 분리된 상들로 분할하도록 판결 받은 지각의 불충분함을 표현해주고 있다. . . . 관념상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 . . 이 공간에서는 모든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 그리고 미래의 사건들이 줄지어 배열되어 있고 더구나 여기서 이것들은 한꺼번에 우리에게 나타나지 못한다고 가정되어 왔다. . . . 이렇게 해서 그들은 오성의 강요와 언어의 요구, 그리고 과학의 부호(符號)주의에 부응 . . .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시간의 긍정적 속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 . . 그 연속적인 위상(位相)들이 일종의 내적 성장에 의해 상호 침투하고 있는 진화는 뚜렷이 구분되는 부분들이 서로 병치해 있는 전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 . . 우리는 부채를 점점 더 빨리, 심지어는 순간적으로 펼칠 수는 있지만, 부채가 펼쳐놓은 것은 . . . 미리 수놓아 있는 동일한 자수일 뿐 . . . 반면에, 실재적인 진화는 조금이라도 가속되거나 감속되기만 하면 내적으로 완전히 수정된다. 진화의 가속이나 감속이 바로 이 내적 수정인 것이다. . . . 미리 계산될 수 있으므로 그 현상들은 가능적인 것의 형태로서 그 실현에 앞서 존재한다고 한다.《필름이나 부채처럼 미리 주어진 것이 현실화 될 뿐이다. 잠재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 . . 의식이 지속하듯이 물질세계도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실재적 지속에 결부되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계산 가능한 체계의 계기적인 상태가 도안되어 있는 필름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이론상 어떠한 속력으로라도 전개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속력은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필름의 전개는 우리의 내적 삶의 어떤 지속에 대응하기 때문이다.《즉, 필름을 너무 빨리 돌리거나 너무 늦게 돌리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필름을 마음대로 속도조절 할 수가 없음. 즉, 의식의 속력과 상응해야함》 . . . 전개되는 필름은 아닌게 아니라 지속하면서 그 운동을 규제하는 의식에 결합되어 있다. . . . 한 컵의 설탕물을 마련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려야 할 필요성은 중요한 사실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즉, 시간을 단지 자신의 추상물이나 관계 혹은 수(數)로서만 지니고 있는 여러 체계를 우리가 우주에서 떼어낼 수 있을 때, 그 우주 자체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주를 그 전체로서, 즉 비유기적이기는 하지만 유기적 존재와 서로 얽혀있는 그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우주가 우리의 의식상태만큼이나 새롭고 독창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형태를 끊임없이 띠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13-21)
― 직관에 대한 잘못된 오해
“지속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 . . . 직관을 철학적 방법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직관>은 사용하는 데 오랫동안 망설였던 단어이다. 인식작용의 한 양태를 지칭하는 모든 용어들 중에서 그것은 아직도 가장 적당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직관이란 말은 약간의 혼동을 야기 . . . 셸링(Schelling)이나 쇼펜하우어(Schopenhauer)류의 철학자들이 이미 직관에 대해 언급 . . . 직관을 어느 정도 지성에 대립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 . . 수많은 철학자들이 개념적 사유는 정신의 핵에 이르기에는 너무도 무력하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직관의 초지성적 기능에 대해 말하여왔다. 그러나 그들은 지성은 시간 내에서 작용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그들에 있어서 지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곧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모르고 있었다. 즉 지성화된 시간은 곧 공간이며, 지성이 작용하는 곳은 지속의 환영(幻影)이지 지속 자체가 아니라는 것, 또 우리의 오성(悟性)은 늘 상 습관적으로 평범하게 시간을 제거시킨다는 것, 아울러 정신에 대한 우리 인식의 상대성이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 따라서 지적 작용에서 투시에로의 이행(移行),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에로의 이행은 시간 이탈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는 이미 시간을 벗어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지속에로 돌아가 실재로 그 본질인 운동성 속에서 재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 걸음에 영원한 것에로 뛰어든다고 주장하는 직관은 지성적인 것에 만족한다. 그러한 직관은 지성이 제공하는 제 개념을 단 하나의 개념으로 대치시킨다. 이 개념은 그들 모든 개념을 포괄하고 따라서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실체, 자아, 관념, 의지 등―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철학은 필연적으로 범신론(汎神論)적이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모든 것을 연역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 . .”(33-34)
― 참된 직관
그러나 실재의 파동(波動)을 따라가는 참된 직관적 형이상학은 . . . 단 한순간에 제 사물의 총체를 포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각 사물에 대하여 그것에 정확하고 오직 그것에만 적합한 설명을 한다. 그것은 세계의 체계적 단일성을 정의하거나 기술함으로써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세계가 실제로 하나인지 아닌지를 알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오직 경험만이 그것을 말할 수 있으며, 만일 그러한 단일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탐구의 끝에 가서 그 결과로서 나타날 것이다. 출발할 때부터 그것을 한 원리로서 내세울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 결과로서의 단일성은 하나의 지고한 일반화에서 결과되어 나오는, 그리하여 가능한 세계라면 어떤 세계에든지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추상적이고 공허한 단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풍요하고 충만한 단일성, 연속의 단일성, 우리 실재의 단일성인 것이다. 이때 분명히 철학은 새로운 문제들 각각에 대하여 새로운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어떠한 해결안도 다른 해결안에서 기하학적으로 연역되지 않는다. 이미 획득된 진리를 확장시켜서는 아무런 중요한 진리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보편 과학을 잠재적으로 한 원리로서 취하는 일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흔히 문학작품을 어떤 이론적인 틀을 가지고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징후들이나 양태들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론적인 양식들과 견주어서 비슷한 것들을 뒤섞어서 문학작품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작품을 왜곡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잘못된 분석이고, 분석조차도 되기 힘든 것. 이러한 방법론은 이론조차도 왜곡한다.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이란 이론적 틀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작품을 우리는 실재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실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적인 대안을 통해 연역할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른 이론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직관적 통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항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작해야만 한다. 아무런 도구가 없이 실재에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령 느낌에 대한 단상부터 시작 하든가 . . .하는 식의 방법이 필요하다》. . .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직관은 . . . 내적 지속과 관련된 것이다. 직관은 병치(竝置)가 아닌 계기(繼起)를 파지(把持)하며, 내부로부터의 성장을, 그리고 현재 속으로 부단히 연장되어 들어가는 과거를 파지한다. 이때 현재는 이미 미래 속으로 혼합되어 들어가고 있다. 직관이란 정신의 직접적 투시다―아무것도 끼어 들지 않으며, 한 면(面)이 공간이고 다른 한 면이 언어인 프리즘을 통한 굴절도 없다. 단어와 병치되어 단어가 되어버리는 서로 근접한 상태 대신, 흘러가는 내적 생명의 불가분적이고 따라서 실체적인 연속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직관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 그것도 직접 의식이다. 그것은 보여지는 대상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투시다. 그것은 접촉이자 일치인 인식인 것이다. . . .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은 공감 . . . 그런 예견력을 종종 발휘하는 무반성적인 공감과 반감 . . . 과학은 분명히 유기(有機)화된 물질의 생리 화학적인 성질을 점점 더 밝혀 놓을 것이다. 이런 유기화의 근본 원인은 . . . 순수한 단일성도 아니고, 식별되는 다수성도 아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 우리의 오성은 이러한 유기화의 원인을 단순한 부정을 통해서 특징 지운다. 이와는 달리, 의식을 통해서 우리 내부의 생명의 약동을 재 파악한다면 이러한 유기화의 근본 원인에 도달하지 않을까? . . . 유기화 과정의 피안에 있는 비유기화된 것은 마치 여러 체계로 분해될 수 있기나 한 듯이 보인다. 물론 이때의 체계는 시간이 관류(貫流)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체계이며,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체계임과 아울러 우리의 오성이 적용될 수 있는 체계들이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물질적 우주는 우리의 의식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 우주는 자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우주는 지속하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의 지속 안에 들어와 있다. 그것이 정신과 관련 맺는 방법이 그 근원에 의한 것이건, 그 기능에 의한 것이건 그 우주는 직관, 다시 말해서 그 우주가 포함하고 있는 실재적인 모든 변화와 운동을 꿰뚫는 직관과 관계한다. 사실 나로서는 미분법(différentielle)이라는 개념, 더 정확히 말하면 유율법(fluxion)이라는 개념은 과학이 이런 류의 통찰에 의해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 . . [과학은 처음에는 형이상학적이었지만, 점점 엄격해지고, 정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음에 따라 과학적이 됨] . . . 요컨대 순수변화, 실재적 지속은 정신적인 혹은 정신성 안에 수태된 그 어떤 것이다. 직관이란 정신, 지속, 순수변화를 획득하는 그 무엇이다. 그 참된 영역은 정신이지만 직관은 사물들 속에서, 심지어는 물질적 사물들 속에서 그것들의 정신성에의 참여를 파악하려고 한다. . . . 아무리 순수화되고 정신화된 의식 속에서도 조용히 남아있는 인적 요소 전체 . . . 이 인적 요소야말로 직관적 노력을 여러 수준의 여러 시점에서 수행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며, 또한 여러 철학에 있어서 비록 양립할 수는 있지만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 . . [직관은 기하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상호 연역될 수 없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 . . [Harald HpÖffding이라는 덴마크의 철학가 직관이 기학학적, 수학적으로 연역될 수 없는 4가지 의미를 지적하고 있다] . . . 추상적-인습적이 아니라 실재적-구체적인 것,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미 아는 구성체를 사용해서 재구축할 수 없는 것, 환원하건대 오성이나 상식 또는 언어에 의해 실재 전체로부터 절단된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대해 다원적이고 상호 보조적이면서 전혀 동일하지 않은 여러 견해를 받아들여야 한다. . . . 그런데 기본적인 의미 하나가 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곧 지속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보통 비운동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는 비운동적인 것을 병치시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운동을 재구축한다. 반면 직관은 운동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실재 자체로 가정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지각한다. 그리고 비운동적인 것에서는 오직 운동의 한 추상적인 순간, 즉 우리 정신이 찍은 속사 사진을 볼뿐이다. 지성은 보통 사물, 다시 말해서 정지적인 것에 관여하며, 지성이 생각하는 변화란 부가된 것으로 가정되는 우연이다. 반면, 직관에 있어서 본질은 변한다. 지성이 이해하는 바의 사물은 생성에서 절단되어 우리 정신이 전체에 대치해버린 파편이다. 사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기존 요소들의 새로운 배치로 여긴다. 아무 것도 없어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는다. 직관은 지속, 곧 성장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것 안에서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의 단절되지 않은 연속을 지각한다. 정신이 자기 자신이 지닌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신에서부터 끌어낸다는 사실, 정신성이란 바로 이런 점에 있다는 사실, 또 정신 안에 수태된 실재가 곧 창조라는 사실을 직관은 보고 알고 있다. 사유의 습관적인 작업은 어렵지 않으며 마음대로 연장될 수 있다. 직관은 노력을 요하며, 오래 갈 수 없다. 사유가 지적 작용이건 직관이건 간에 사유는 언제나 언어를 이용한다. 그리고, 직관도 모든 사유와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개념들에 의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속, 질적 다양성, 혹은 이질적 다양성 및 무의식에―심지어는 처음 착안했을 당시의 것 그대로 이해되는 한에서의 미분법에도―의거하는 것이다. . . . [지성적 기원에서 나온 개념은 직접적으로 명확하고, 직관에서 발생한 관념은 시초부터 모호하다] . . .” (34-39)
― 지성의 명확성과 직관의 명확성의 차이
[가령, 지성의 명확성은 모든 것을 기존의 개념들로 재구성하고, 모호한 것들을 단일하고 구체화된 윤곽선들로 규정하므로, 실재를 마음대로 처분하고 다룸으로써, 실재를 명확하게 이해한다. 서로 다른 지각이라도 동일하게 반응하면 대상이 동일하다고 말하고,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반응을 했을 때에는 대상이 서로 모순적이다 혹은 반대적 대상이라고 말하고 . . 그래서 이미 결정된 개념들 혹은 일반성으로 잘 용해되어 들어가는 것은 명확한 것이 되고, 그렇게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은 모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실재의 이해는 직관의 방법이 열등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결정론자와 자유주의자의 싸움 . . 결정론자는 모든 것들을 쉽게, 명확하게, 마음대로 다루고, 사유와 기존의 문귀들을 수집하면 된다 . . 그러나 상대자는 자기 변론을 하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함 . . 명확한 것은 나중에야 나오므로, 한참이나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 . 그리하여 우리는 직관적 명확성을 기존의 요소들로 재구축할 수 없다. 기존의 요소가 거기에는 없기 때문. 또 노력 없이 이해하는 것은 옛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므로, 직관의 편에 서 있는 우리들은 그것이 이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노력, 시간, . . . ](39-42쪽 까지 요약)
. . . 중략 . . .
― 지속 = 의식 = 살아있음, 시간의 의미에 대하여
“ . . . 물질이란 반복(répétition)이며, 외적 세계는 수학적 법칙에 따르므로, 한 주어진 순간에 있어 물질적 우주 내의 모든 원자와 전자의 위치, 방향, 속도를 알고 있는 초인적 지성은 이 우주의 어떠한 미래 상태라도 계산할 수 있다. . . . 만일 문제되는 것이 불활성적인 세계뿐이며, 또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본 현상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이러한 생각에 찬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란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재(實在)는 살아 있고 의식적인 존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은 비유기적인 물질내에 삽입되어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으며 동시에 의식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은 당연히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은 의식이 잠들어 있는 곳에서는 사실 무의식적이 된다《여기서 말하는 의식적 존재라는 것은 헤겔식의 대자적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의식적 존재란 인간주의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생명을 의식적인 것으로, 보다 정확히는 기억의 문제로 보는 듯. 그러나 예를 들어 식물에서와 같이 의식이 반수면 상태에 있는 영역에서조차 규제된 진화와 확정적인 진행 그리고 노쇠현상 등 요컨대 의식을 특징지우는 지속의 외적인 표현이 모두 나타난다. 그러면 왜 생명과 의식이 마치 틀 속에 들어가듯이 삽입되어 들어가는 그 물질에 대해 말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권리로 우리는 불활성을 우선으로 놓는가? 옛날 사람들은 세계정신(Une Ame du monde)이 물질적 우주의 존재가 연속적임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 《 즉, 물질들의 죽은 세계 사이에 깃든 세계 정신이 그들을 서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 . . . 비유기적 세계란 가시적이고 예측적인 변화에로 총괄되는 무한히 빠른 반복, 더 정확히 말해서 사이비반복(quasi-répétition)의 계기이다. 나는 그 반복을 시계 추의 진동에 비유한다. . . . 그 왕복운동은 태엽이 풀리는 과정을 표현《즉, 실제로는 무한하게 흐르는 운동과 변화가 있는데, 이 변화가 표현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물질적 한계이기도 하고, 표현상의 한계이기도 하고, . . . 따라서 이 표현은 갔다가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동일한 형태의 반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끊임없이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만,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물적 한계 때문에, 매번 매년 동일하게 바닷가에만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과도 같은 그러한 반복인 것이다》. . . (그러나) 의식적 존재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며 그 존재의 지속을 측정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지속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공들여 제작하기 때문에, 아울러 탐구없는 제작(élaboration), 모색없는 제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지속한다. 시간이란 바로 망설임 자체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의식적인 것과 살아있는 것을 사상(捨象)해보라 . . . 그때 실제로 획득되는 우주는 마치 영사기 필름에 병치되어있는, 전개되기 이전의 화면들처럼 그 계기적인 상태가 이론적으로 미리 계산될 수 있는 우주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전개(déroulement)인가? 무슨 이유로 실재는 스스로 자신을 펼치는가? 왜 실재는 펼쳐지지 않는단 말인가? 《즉, 아무리 실재를 펼치려해도 그것은 꽉 다문채 펼쳐지지 않는다. 태엽처럼. 그래서 그것은 한꺼번에 풀어볼수가 없다. 그것은 그 자신 스스로 펼친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로, 매순간 결정을 직접 해 가면서》 시간은 무엇에 필요한가? (내가 말하는 시간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시간이지, 4차원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 추상적 시간이 아니다) . . . 스펜서의 철학 . . . 여기서의 시간이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 . 시간이란 그 무엇이었다. 따라서 시간은 작용한다. 《실재는 왜 펼치기 위해 기다려야만 할까? 그냥 모든 것이 주어지면 되지 않을까? 세계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이미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져 있다면, 왜 시간을 끌까? 빨리 와 버리지 않고 . . . 인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 . . 우리는 ‘시간’이라는 말을 추상적으로 쓰면서, 모든 사물을 포함하고 있는 허공과 같은 것으로 생각 . . . 그러나 실제의 시간은 말하자면 일종의 지루함이며, 한번에 도약할 수 없는 망설임의 과정이며, 끊임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지속이다. (시간은 물처럼 . . . )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미리 결정되어 준비된 양태가 아니라, 매순간 선택과 제작, 망설임 등으로 펼치는 행위 속에서 만들어진다 => 우리는 시간을 외화시켜, 그 속에서 나와서 시간은 생각한다. 이것이 시간을 추상화하는 것 => 그러나 시간 안으로 들어가 직접 체험해보자 => 그것은 그 자체 지루함이며, 예측불가능하고, 만들어 가는 것》 시간이란 무슨일을 할 수 있는가? . . . 시간이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시간은 지연한다. 더 정확히 말해 시간이란 지연(retardement)이다. 따라서 시간은 제작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창조와 선택의 수송체가 아닐까?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사물에 비결정적인 것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란 비결정성 그 자체가 아닐까?”(111-113쪽)
―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 . . 자신의 삶의 도공, 심지어 원한다면 예술가이기도 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그리고 전승과 상황을 통해서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끊임없이 유일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마치 조각가가 진흙덩어리에 부여한 형상과 같이 예측 불가능한 형체를 반죽해내고 있다. 《왜? 이를 대답하는 것이 윤리학이 아닐까?》 틀림없이 우리는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 작업과 유일함을 지닌 것에 주의를 쏟고 있다”(114쪽)
― 반복과 창조
“. . . 예술가는 자신의 창조능력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 예술가는 그러한 걱정을 철학자에게 맡기고 단지 창조하는데 만족한다. 반면 조각가는 자기 예술의 기법을 터득하고, 또 그럼에 있어 습득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알아야 한다. . . . 이 기법은 . . . 그에게도 부과되고 있는 그 물질의 요구에 따라 지배된다. 예술에 있어서 기법이 관심을 갖는 것은 반복 혹은 제작(fabrication)이지, 창조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기법 위에 내가 지적 능력이라 부르는 예술가의 관심이 집중된다. . . . 우리는 행위의 기법에 친숙해지는데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행위가 실행되고 있는 조건 속에서, 우리의 행동이 기초해야 할 일반적인 처방법이나 규칙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을 추출해내는데 관심이 있다. 우리가 사물에서 발견한 반복 덕택으로 우리 행위에는 새로움이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기능이란 본질적으로 실재의 흐름 속에 있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것을 추출해내는 능력이다. . . . (1) 지각 . . . 빛이나 열과 같이, 무한히 반복되는 충격을 포착해서 그것을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감각으로 축소시킨다. . . . (2) 개념작용 . . . 일반관념의 형성은 . . . 여러 변화하는 사물 속에서 변화하지 않거나 적어도 우리의 행위에 불변적인 지주를 제공해주는 공통적인 측면을 추상해내는 일이다. 우리 태도의 불변성, 즉 주어진 대상의 다양성 및 가변성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인 혹은 잠재적인 반응의 동일성, 바로 여기에 우선적으로 관념의 일반성을 표시하고 기술하는 것이 있다. . . . (3) 오성 . . . 오성이란 단순히 일시적인 사실 사이에 잠정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연결시켜서 법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가 정확할수록, 그리고 법칙이 수학적일수록 더욱 완전해지는 작용이다. 이 모든 기능들이 지성을 구성하고 있다. 지성은 규칙성과 안정성을 선호하므로, 실재적인 것 안에서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것, 다시 말해서 물질성(la matérialité)에 집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성은 절대(l'absolu)의 한 측면을 촉각한다.《이때의 절대의 한 측면이라는 것은 내 의지나 의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그 자체의 측면을 말한다. 마치 의식이 절대의 다른 한 측면을 촉각 하듯이 말이다》 . . . 지성이 이 측면들 중 하나를 마치 다른 측면을 사유하듯이 사유한다고 자처하면서 의도되지 않았던 용도로 사용될 때 오류가 발생한다.”(114-116)
― 실재에 대하여
“. . . 실재는 전체적이어서 불가분적인 성장이며, 점진적인 발명, 요컨대 지속이다. 실재는 매순간 기대되지 않던 형태를 띠면서 점차로 부풀어오르는 고무풍선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 지성은 실재의 기원 및 진화를, 마치 단지 여기에서 저기로 위치만을 옮긴다고 가정되는 부분들의 배열 및 재배열로 생각한다. . . .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것의 실재란 끊임없이 팽창하는 충만적인 것으로서 진공을 모르는 것이다. 실재는 지속을 지닌 것과 똑같이 연장(l'extension)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외연은 지성이 그 수립의 토대로 생각하는 무한하고 또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구체적 공간은 사물들에서 추출된다. 사물들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 사물들 안에 있다. 오직 우리의 사유가 실재에 대해 추리할 때에만 사유는 공간을 수용체로 만든다. 사유란 습관적으로 부분들을 상대적 진공 속에 수집해 놓으므로, 사유는 실재가 어떤 절대적 진공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116쪽)
― 직관의 비판능력, 내부의 역설, 친구조차 불신하는 저녁시간 . . 에 대하여
“ . . . 구체적인 직관의 단순성과 직관을 표현하는 추상개념의 복잡성 사이에 개재하는 어떤 상(像) . . . 움츠러들어 사라져버리는 상이지만 . . . 정신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며, 그의 사유의 안팎을 통해서 그림자처럼 뒤따라 다닌다. 그리고 그것은 직관 자체는 아니지만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의존해야 하는 필연적으로 부호적인 개념적 표현보다 훨씬 더 직관에 더 가까운 것이다. . . . 이 그림자의 본래 물체의 자태 . . . 이 상의 우선적인 특징은 이 상이 지니고 있는 부정의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신(다이몬)이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기억해보자. 그는 소크라테스의 의지를 일순간에 저지시켜서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게 하고 그 대신 그 일을 지시하게끔 한다. 직관은 실제 생활에서 소크라테스의 신이 하는 일을 사색적인 면에서 행하는 적이 가끔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직관은 그러한 형태로 시작하며, 그러한 형태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기를 계속한다. 즉, 직관은 제지한다. 널리 인정되어온 개념들, 명백하다고 생각되어온 명제들, 이때까지 과학적이라고 지나쳐온 주장들에 직면해서 직관은 철학자의 귀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속삭인다.《이 직관적 이미지의 부정의 힘에 대해서는 이미 39쪽-42쪽을 요약해 놓은 노트 “지성의 명확성과 직관성의 명확성의 차이”(5쪽)에서 잠깐 언급한 바가 있다. 지성은 기존에 알려진 개념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한다. 그래서 지성이 발견한 새로움 속에는 이미 지성이 확립해 놓은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직관은 이러한 지성의 활동에 대해 이해 불가능이라는 비판을 한다. 직관이란 실재의 새로움, 즉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대면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직관 안에는 기존에 만들어진 개념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직관의 비판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들뢰즈도 <베르그송주의> 1장에서 말한바가 있다. 직관의 부정적 힘이란 바로 비판능력인데, 이 비판능력이란 바로 지성이 새로움에 대해 가하는 퇴행적 활동이 새로움을 인식하는데 있어 불가능하다는 것을 비판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지성에게 있어 직관은 망설이게 하고, 습관적인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제지하고, 주저하게 하고, 머뭇거리게 하고, 무엇인가 선택하게끔 만드는 힘이다. 이 힘은 자기자신에 직면하게하는 힘 . . 친구조차 불신하는 저녁시간, 내부의 역설, . . .등 내가 써놓은 “고독-중독에 대하여”를 참고하라》 . . . 비록 여러 사실들과 여러 추론들이 그것이 가능하고 실재적이며 확실하다고 믿게끔 유혹해도 역시 불가능하다. 혼돈되어 있을지도 모르나 결정적인 어떠한 경험이 나의 목소리를 통해서 당신에게 말하기를, 경험은 내세워진 사실 및 주어진 추론과는 양립하지 않으므로 틀림없이 사실들이 잘못 관찰되었으며, 추론에 오류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직관의 부정적 힘은 얼마나 독특한 힘인가! 어떻게 그것이 철학사가의 관심을 일층 더 깨우쳐주지 않겠는가? 철학자의 사유가 아직 확고하지 않고 그 학설에 확정적인 것이 없을 때에도 그가 첫째로 행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을 분명히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은가? 후에 무엇을 긍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달라질 수 있지만,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변동이 없다. 그리고 긍정하는 대상을 바꾸는 경우에도 그것은 아직도 직관이나 직관의 상(像)에 내재해 있는 부정의 힘에 의거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직선적 논리규칙에 의한 결론을 게으름을 피며 연역해왔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자신의 주장을 앞에 놓고서, 그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살펴볼 때 처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가능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자기 사유의 원(圓)을 떠나서 직선적으로 접선을 따라감으로써 그는 자신의 외부에 있게 되었다. 직관으로 몸을 돌렸을 때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떠나가 버렸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야말로 <발전하는> 학설, 즉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무한히 자신을 수정해 나가는 학설의 지그재그 운동을 구성하는 것이다.“(132-134) 《위에서 언급했듯이, 직관은 지성과 다르게, 실재를 대면할 때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맨몸으로 대면한다. 그것은 도구조차도 만들어 나가는 힘이며, 지금까지 자신이 들고 다녔던 도구들이 지금 자신 앞에 놓여있는 실재를 다루는데 적절치 않음을,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직관하는 능력이란, 바로 그 자신을 비판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친구조차도 불신하는 저녁시간이며, 내부의 역설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 . 이것이 성장하게 한다 . . 내 노트 “고독_중독에 대하여”를 참고하라》
― 직관의 단순성에 대하여
“. . . 새로운 것이 이해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 것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한다. 이미 진술된 문제들, 제공되어 있는 해결안들, 자신이 살던 시대의 철학과 과학, 이 모든 것들이 위대한 사상가 각자에 있어 자신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형태 지우기 위해서 반드시 사용될 재료들이었다. . . . 수많은 부분적인 유사점이 눈에 띄고 수많은 대응점들이 지시되고 있는 듯이 보이며 모든 방면에서 우리의 수완이나 박식의 발휘를 종용하는 부름이 무수히 발견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철학자의 사상을 이곳저곳에서 취한 단편들로 재구성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며, 그런 다음에는 그 철학자가 훌륭한 모자이크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 . . 칭찬해준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오래 지속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이미 언급한 것을 반복하는 듯하면서도 그때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재구성 작업을 포기하게 된다. . . . 새로운 환상에 빠지게 된다. . . . 우리는 학설이―그것이 거장(巨匠)의 학설일지라도―마치 선행하는 철학에서 생겨나며, 또 <진화의 한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번에는 완전히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조립 작업보다는 유기체를 닮았으며, 따라서 구성이라기보다는 진화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비교는 사상사에 실제 발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연속성을 부여해줄 뿐만 아니라, 철학 체계의 외적인 복잡성과 그 외적 형태에 있는 예측가능한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불편함을 지닌다. 그것은 새로움과 내적 내용의 단순성에 우리를 접촉시켜주지 않는 것이다.《이 두 번째 상상의 경우엔, 철학이 단순히 파편들의 구성이 아니라 진화라고 함으로써, 어느정도는 처음의 상상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여전히 철학사가 연속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봄으로써, 현재의 철학이 이전의 철학으로부터 예측가능한 것, 이미 현재는 과거속에 씨앗이 있다고 봄으로써, 창조적 진화, 즉 새로움과 내적 내용의 단순성과는 다른 상상을 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 . [이하 스피노자의 직관의 단순성에 대한 문제 생략] . . .”(134-137)
― 과학과 철학의 방법상의 차이
“실제로 철학은 개별 과학의 종합이 아니다. 때때로 철학이 과학의 영토에 들어가 과학의 대상을 좀더 단순한 시각 속에서 포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을 강화하거나 과학의 성과를 좀더 높은 차원의 일반성으로 이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 . . [경험의 두 가지 양상이 있다는 사실은, 과학과 철학이라는 두 가지 인식방법을 시사하고 있다] . . . 한편으로 경험은 다른 사실들과 나란히 있는 사실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실들은 어느 정도 자신을 반복하며, 어느 정도까지는 측정될 수 있고, 실제로 명확한 다양성과 공간성의 방향에 노출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경험은 상호침투(une pénétration rèciproque)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순수지속(pure durée)으로서 법칙이나 측정에 종속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도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의식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 의식은 밖으로 뻗어나가며, 사물들을 상호외적인 것으로 지각하는 정도 그대로 자신과의 관련 속에 자신을 외화 시킨다. 후자의 경우에 의식은 자신 내부로 되돌아온다. 의식은 자신을 소유하여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이렇게 의식이 자신의 깊이를 파고들 때 의식은 물질이나 생명, 말하자면 실재 일반의 내부에 더 깊이 침투하는 것이 아닐까? . . . 세계를 충만 시키고 있는 물질과 생명은 동등하게 우리 내부에도 있다. 모든 사물 속에서 작용하는 힘들을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느끼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것과 이미 행해진 것의 내적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도 또한 그러한 본질을 지닌다. 그렇다면 아래로 내려가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에 가보도록 하자. 우리가 닿는 점이 깊을수록 우리를 표면에로 되돌려보내려고 내미는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철학적 직관이란 바로 이러한 접촉이며, 철학이란 이러한 약동인 것이다.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표면으로 되돌려 보내지면, 우리는 사유가 밖으로 뻗어나가 분산됨에 따라 과학과 재접촉 하게 될 것이다《베르그송의 이론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 . 내면 깊숙한 곳으로 가면 . . 사유가 뻗어나간다? . . .》. 그때 철학은 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모습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이른바 철학적 직관은 자신을 분할하고 또다시 분할된 것을 분할시켜 나감으로써, 외부적으로 관찰된 사실이나 과학이 사실들을 상호 결속시키는 법칙들을 포괄할 수 없었으며, 어떤 일반화들을 정정하거나 어떤 관찰들을 수정할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철학적 직관의 관념은 순수한 환상이다. 그것은 직관과 아무런 공통점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자신의 분산을 사실 및 법칙에 완전히 합치하는 데 성공하는 관념은 외적 경험을 단일화함으로써 획득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단일성은 생명체를 우주의 나머지로부터 분리시켜 놓는 단일성과 같이 제한되어 있는 동시에 상대적인 그런 것이다. . . . 과학은 행위의 보조수단이다. 그리고 행위의 목표는 결과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이 자문하는 것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되어야만 하는가이다. 과학적 지성은 사물의 어떤 배열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재배열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이에 발생하는 것을 무시한다. 만일 그런 것에 관여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것에 있는 다른 배열, 곧 동시성을 고려하기 위함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일반적으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것에로 들어갈 수 없으며, 움직이는 실재를 따라갈 수도 없고, 사물의 생명인 생성을 채용할 수도 없다. 이 마지막 임무가 철학에 속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운동의 움직이지 않는 상(像)만을 보며, 아무것도 반복되지 않는 길을 따라 가면서 반복되는 것을 보아야만 한다. 아울러 그는 실재가 전개되고 있는 연속적인 평면 위에서 인간의 행위에 종속되도록 실재를 편의적으로 분리하는 데 전념해야만 한다. 따라서 과학자는 자연을 속이고, 자연을 대상으로 조심스럽게 적대적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반면에 철학자는 자연을 벗으로 대우한다. 과학의 규칙은 베이컨이 주창한 것처럼, 지배하기 위해 복종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연과 일치하려고 한다. 더구나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의 본질은 단순성의 정신이다. 철학적 정신을 그 자체에서 보거나 아니면 그 작품에서 보거나 간에, 또 철학을 과학에 비교하건 아니면 한 철학을 여타의 철학에 비교하건 간에 언제나 어떠한 복잡성일지라도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며, 체계라는 것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고 또 종합이란 곧 외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철학 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이다.”(149-152)
― 철학적 직관에 의한 기쁨
“. . . 감각, 지성 및 언어의 구조에서 결과된 일반적인 사유의 태도는 철학적 태도라기보다는 과학적 태도에 더 가깝다. . . .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 . . 지각이란 태어나는 과정 가운데 있는 과학이며, 과학은 성숙된 것이라는 것, . . . 보통의 지식과 과학적 지식은 둘 다 이미 우리의 행위를 사물에 대해 준비토록 되어 있는 것으로서, 비록 그 정확도와 범위는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다른 두 모습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 . 보통의 지식은 과학적 지식과 같이, 그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무한한 입자(粒子)들로 분해된 시간 속에서 사물들을 취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시간은 가루로 분쇄되어 여기서는 지속하지 않는 순간이 역시 지속하지 않는 다른 순간을 뒤따르고 있다.
이러한 지식에 있어서 운동이란 위치의 연속이며, 변화란 질(質)의 연속이고, 생성이란 상태의 연속이다. 이러한 지식의 출발점은 부동성이다. . . . 그리고 부동성들을 수완 좋게 배열함으로써 이 지식은 운동 자체를 대신하여 운동의 모사체를 재구성한다. 이러한 것은 실용적인 견지에서는 편리한 작용이지만 이론상으로 불합리한 것이며, 그 안에 형이상학과 비판이 자신 앞에서 발견하는 모든 모순들과 모든 사이비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상식이 철학에 등을 돌리게 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바로 이 점에서 상식의 방향을 역전시켜서 다시금 철학적 사유의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게끔 하는 일이다. 분명히 직관에는 그 강도가 많이 있으며 철학에도 그 심도가 많이 있다. 그러나, 실재적 지속에로 되돌려진 정신은 이미 직관적 생명으로 활력에 가득 차 있으며, 사물에 대한 그것의 인식은 이미 철학이다. 무한히 분할된 시간 속에서 상호 교체하는 순간들의 불연속성 대신에, 이 철학은 불가분적으로 서로를 따라 흐르는 실재적 시간의 연속적 유동성(fluidité)을 지각한다. 또, 어떤 관계없는 것을 차례로 뒤덮어 가면서 그것을 가지고 실체에 대한 현상의 신비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대신에, 이 철학은 하나의 동일적인 변화를 파악한다. 이 변화는 마치 모든 것이 생성되고 있지만 그 생성 자체가 실체적이기 때문에 담지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멜로디에서처럼 점차로 계속 증가해간다. 거기에는 이미 불활성적인 상태라든가 죽은 사물은 없다. 있는 것이란 오직 생명의 안정성을 구성하고 있는 운동성뿐이다. 이렇게 실재가 연속적이며 불가분적으로 보이는 시각은 철학적 직관에 이르는 길 위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감관과 의식의 영역 밖으로 옮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럴 이유가 있다고 믿는 데에 칸트의 오류가 있다.《칸트의 초월적 방법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은 흐름과 변화인 시간, 지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 .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적 능력 외의 능력이라고 . . 초월적 능력》 그는 어떠한 변증법적 노력도 우리를 현상 너머의 세계로 인도하지 않으며, 효과적인 형이상학이라면 필연적으로 직관거 형이상학일 것이라는 것을 결정적인 논의를 통해 증명했으면서도,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이러한 직관을 결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만일 칸트가 지각한 시간이나 변화, 더욱이 우리도 또한 관계하고 있는 시간이나 변화 이외에는 어떤 시간이나 변화도 없다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통 지각은 시간을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변화 이외에는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으로 위치한 시간이나 우리가 습관적으로 우리 앞에 지니고 있는 변화는 우리의 감관과 의식이 먼지로 환원시켜 우리의 행위가 사물에 행하기 쉽게끔 내놓은 시간과 변화이다. 감관과 의식이 해놓은 일을 본래대로 해놓고, 우리의 지각을 그 근원에로 되돌려 보내자.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능력에 의존할 필요없이 새로운 종류의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지식이 일반화된다면, . . . 이득을 얻는 것은 비단 사색뿐만이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도 . . . 영향을 공급받고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 . . 감관과 의식이 습관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는 세계는 . . . 죽음처럼 차가운 세계 . . .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최대의 편리를 위해 배열된다. . . . 우리 자신은 . . . 인위적인 우주의 상(像) 속에서 인위적으로 치장되어 자신을 순간적인 것으로 보며, 과거가 마치 폐기된 것처럼 말하고, 또 기억을 괴상하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는 낯선 사실로 즉 물질이 정신에 던져줄 도움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새롭게, 두텁고 더욱이 탄력적이기까지 한 현재 속에서 파악하도록 하자. 이 현재는 우리 자신을 가리고 있는 막을 저 멀리 밀어버림으로써 무한히 되돌려 뻗힐 수 있는 현재이다. 외적 세계를 그 실제 있는 그대로 새롭게 파악하자. 표면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현재로 몰려들어 현재의 그 약동을 새겨놓는 직접적 과거를 함께 지닌 현재 속에서, 깊숙이 파악하도록 하자. 요컨대 모든 사물을 지속(持續)의 상하(相下)로 보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자. 그 즉시 우리의 지각은 전기 오르듯 활기를 띄며, 이 지각 속에서는 정돈되어 있던 것이 이완되고, 졸고 있던 것이 잠을 깨며, 죽어있던 것이 생명을 찾게 된다. 예술이 천성과 행운의 혜택을 받은 사람에게만 그것도 아주 드물게 부여하는 만족감을 철학이 만일 이렇게 이해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부여해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영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우리에게 활기를 띄게 해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게 할 때 철학은 실제적인 면에서나 사변적인 면에서나 과학을 보충하게 될 것이다. 과학의 응용은 단지 존재의 편의만을 목표로 삼으므로《즉 과학은 기능이다》, 이런 과학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은 복지, 또는 기껏해야 쾌락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미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다.”(152-156)
― 변화에 대하여
“. . . 변화의 문제 . . . 이 문제는 근본적인 것 . . . 만일 사람들이 변화의 실재성을 확신하고서 그것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단순화되어, 극복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철학적 난점들마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 . 요컨대 보통 우리는 변화에 시선이 가는 것이지 변화를 발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변화를 말하지만 변화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하기를 변화가 존재하며 모든 것이 변화하고 변화가 바로 사물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변화를 말하고 또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추리하고 철학한다. 변화를 사유하고 변호를 보기 위해서는 편견의 장막이 모두 걷혀져야 한다. 그 장막 중 어떤 것은 인위적으로 철학적 사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다른 것들은 상식에 자연스레 있는 것이다.”(158-159)
― 지각과 개념작용의 관계
“ . . . (1) 만일 감각과 의식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지각 기능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방향으로 무한히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추리할 필요도 개념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개념 작용이란 지각이 허용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나 쓰이는 임시적인 것이며, 추리는 지각의 틈새를 메꾸거나 지각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이 효용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 . . 그러나 지폐가 단지 금에 대한 약속어음이듯이, 개념 작용은 그것이 표현하는 궁극적인 지각을 통해서만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사물이나 성질 혹은 상태의 지각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개념화할 수 있는 것으로는 질서도 있고 조화도 있으며, 더욱이 일반적으로 진리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진리는 실재가 되어 버린다. . . . 추리라든가 추상, 일반화 등을 거칠 필요없이 모든 사물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존재가 바로 완전한 존재 . . .
(2) . . . 지각 기능의 불충분성 . . . 이 바로 철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 . . [지각에 가까운 개념을 소유했던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 . . . 이들은 물, 불, 흙 등 감각 가능한 요소의 변형을 통해 직접 감각을 완결 . . . 이후 엘레아 학파는 변형이라는 착상을 비판 . . . 감각소여에 그렇게 근접할 수 없음을 보여줌 . . . 이후의 철학은 초감각적 세계로 향하여 . . . 순수 이데아의 세계로 설명 . . . 고대 철학자에게 있어 지성적 세계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지각하는 세계의 밖에, 또한 그 위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우리의 지각기능이 보여주는 것은 영원한 이데아에 의해 시간과 공간 속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 . . . 반대로 근대인에게 있어 이 본질들, 이데아는 감각적 사물 자체를 구성 . . . 그것들은 틀림없는 실체로서, 현상이란 이것들의 표면을 덮은 보자기에 지나지 않는다] . . . 그러나 고대인이건 근대인이건 모두 동의하는 것 . . . 철학이 지각 대상을 개념으로 대치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이제 더 이상 지각적이지 않은 정신의 여러 기능, 말하자면 추상과 일반화 및 추리의 기능에 호소하고 있다.《그러고 보면 지각은 욕망의 현시이고, 관념은 지각욕망의 확장이다. 마치, 먹고 싶은데 음식이 없으면 생각하고, 상상하듯이. . . 》
(3) . . . 하나의 과학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서 하나의 철학은 있지 않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 그와는 반대로, 독창적인 사상가의 수효만큼 서로 다른 철학들이 있게 될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는가? 개념 작용이 아무리 추상적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그 출발점은 지각이다. 지성은 결합시키고 또 분리시킨다. 지성은 정렬시켰다가 다시 해산시키고 또 다시 통합시킨다. 지성은 창조하지 않는다. 지성에게는 반드시 물질이 있어야 하며, 물질은 감각이나 의식을 통해 겨우 지성에 이를 뿐이다. 따라서 순수한 관념으로 실재를 구성 혹은 완성시키는 철학은 단지 우리의 구체적인 지각 전체를 그 지각 중 특정한 하나로 대치시키거나, 지각 전체에 그 특정 지각을 첨가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 특정한 지각이란 이 철학이 공들여 얇게 만들어서 세련되게 한 다음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으로 전환시킨 것이다.《이에 따르면 관념이란 무한히 응축되어 얇아진 물질, 혹은 밀집되거나 응축되지 않은 분산된 원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의 장막이 너무 비좁아, 물질이 신체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동안 응축되고 얇아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특권적인 지각을 선택하는 데에는 임의적인 것이 있다. . . .”(159-161)
― 지각의 확장: 개념작용
“ . . . 이미 말한바와 같이 개념 작용을 통해서 철학자를 완전한 지각에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은 자연적 지각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 개념작용은 그 기능상 감각이나 의식의 자료들 사이의 간격을 메꾸고 그렇게 하여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통합시키고 체계화시켜야한다. . . . 개념 형성의 기능은 통합이라는 작업을 진행해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실재적인 것에서 수많은 질적인 차이점들을 사상(捨象)해버리고, 우리의 지각을 부분적으로 소멸시켜버리며, 아울러 우주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시력을 약화시킨다. . . . 따라서 방법은 목적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린다. 이론상 방법은 지각을 확장시키고 완성시켜야 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방법은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지각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그 중 어떤 하나가 다른 것들의 대표가 되게 해야만 한다.―그러나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으려 하는 대신, 지각에 뛰어들어 그것을 파헤치고 넓혀본다고 가정해보자. . . . 의지를 지각에 삽입시키고, 이 의지는 자신을 팽창시키면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넓혀준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우리는 감각이나 의식의 자료 중 어느 것도 희생되지 않는 철학을 획득 . . . 실재적인 것의 질이나 측면은 어느 것도 실재를 명시적으로 설명한다는 구실 아래 그 나머지로 대치되지 않는다. . . . 서로 다른 개념들로 무장하고 서로 마찰하는 체계의 다양성에 뒤이어, 모든 사상가를 동일한 지각 속에서 화합시킬 수 있는 학설의 단일체 . . . [그러나 이러한 확장이 가능하기나 한가? 육체의 눈이나 정신의 눈은 그것이 가진 조건과 한계가 있으며, 이것의 확장이란 그 조건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확장일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관심으로 그 정확성과 강도는 증가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각의 영역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거기에서 발생시킬 수는 없다.] . . . 실제로 수 백년간을 통해, 정확히 봄과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연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보게끔 만들어주는 기능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이다.(162-163)
― 지각기능의 확장으로서의 예술에 대하여
“예술의 목적이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명시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들을 자연 속에서 또 정신 속에서, 즉 우리의 외부에서 또 내부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예술의 목적이란 말인가? 정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시인이나 소설가는 분명히 무(無)로부터 그것을 창조하지 않는다. . . . [만일 그들이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내부에서 관찰하지 못하면 그들을 이해못함 . . 그들의 말에 따라 우리의 가슴에 오래 남아있겠지만, 그보다는 여전히 보이지 않을 감정과 사유의 뉘앙스가 나타남 . . 마치 현상액에 들어가면 나타나겠지만, 아직 그 용기 속에 들어가지 않은 사진의 영상처럼] . . . 시인이 바로 이러한 현상액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기능이 다른 어느 예술가보다도 확실히 나타나는 곳이 있다. 이 예술은 모방(l'imitation)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예술, 즉 회화이다. 위대한 화가란 그가 소유한 어떤 사물에 대한 시각이 모든 이의 시각이 되었거나 그렇게 될 사람이다. 코로(Corot)의 작품이나 튀르네(Turner)의 작품은 . . . 자연 속에서 우리가 주의하지 못한 수많은 측면을 보았다. . . . [그들의 창조 . . 발명품은 사상의 산물이고 . . 그 상을 통해 우리는 자연을 봄으로써 기쁨을 얻는다고 볼 수 있나? 이 말은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 . . 왜 우리는 어떤 작품들―거장의 작품들―에 대해 그것이 진실 되다고 말하는가? 위대한 예술과 순수한 환상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튀르네의 작품이나 코로의 작품을 볼 때 느끼는 것을 깊이 살펴보면 . . .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그 작품을 인정하고 그 작품을 경원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 중 어느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지 않은 채 지각했었다. 그것은 휘황 찬란하면서 점점 사라지는 상(像)이었다.((즉,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그냥 지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우리가 느끼고 지각하는 내용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해준다.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 있다. 우리는 육체가 사라진 감정 그 자체를 그림으로부터 보는 것이다)) 그것은 똑같이 휘황 찬란하고 똑같이 사라져가는 수많은 상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상들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 안에서는 마치 용암화면(鎔巖畵面)처럼 서로 겹쳐서, 이러한 상호 교섭을 통하여 습관적으로 우리가 갖게 되는 창백하고 색깔없는 사물의 상을 구성한다. 화가는 이 상을 분리시켜낸다. 그는 그것을 화폭위에 잘 고정시켜 놓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신이 보았던 것을 실제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63-165) ((베르그송의 예술관 뿐만 아니라, 들뢰즈의 예술론이기도 하다. 감정, 지각 내용은 육체들과 뒤섞여 혼합물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의 실제 경험으로는 복합물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지각내용은 찬란하게 나타났다가, 다른 것들 속에 뒤섞여 사라져버리고 만다. 베르그송은 이들을 본성상의 차이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나눔을 예술가들이 잘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다른 경험들과 뒤섞인 지각내용(감정 등)을 그 본성상의 차이가 나는 다른 것으로부터 떼어내어 화폭위에 고정시켜 놓는다는 것이다. 예술은 지각을 지각작용으로부터, 지각매개로부터, 지각-체로부터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 지각의 확장으로서의 예술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 . . . 예술가가 언제나 <관념론자>로 여겨져 왔음에 주의하자. . . . 그가 우리들보다는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삶의 측면에 보다 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단어의 실제 의미에 있어서 그는 <정신나간(distrait)> 사람이다. . . . [이 말에 따르면 그가 삶 즉 실재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더 멀리 떨어진 그가 어째서 더 많은 것을 보는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언제나 생활이나 행위의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재를 응축시키고 자르고 해서 만들어진 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덜 갖는 실재란 바로 응축된 실재, 잘려져 나간 실재이다] . . . 뚜렷한 지각이 단지 실제적인 생활에 필요하기 때문에 보다 넓은 전체에서 떼어낸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 . . 우리의 습관적인 설명 체계는 정신적 삶을 단순한 요소들로 재구성해서 이러한 요소들간의 구성이 실제로 정신적 삶을 산출해낸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만일 사물들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우리의 지각은 실제로 확장될 수 없다. 그 지각은 정해진 양(量)으로 어떤 특정한 물질들을 모아놓은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에 여기 있었던 것 이상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 . . [우리는 철학하기 전에 삶을 살아야 . . 삶의 요구에 따라 눈가리개를 하고 오직 가야할 방향만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 . . 우리의 지식은 단순한 요소들이 점차적으로 회합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갑작스런 분열로 나타난 결과이다. 광활한 잠재적 지식의 초원에서 우리는 그 지식을 실제적인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 사물에 대한 행위에 관련된 것은 모두 끄집어낸다. 그리고 나머지는 무시된다. 두뇌는 이러한 선택 작업을 위해서 만들어진 듯 싶다. . . . 기억이 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쉽게 보여질 수도, . . . 우리의 과거가 자동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어디에? 육체에, 무의식에, . . .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우리를 어떤 형성체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재연하면서 우리는 삶의 지각을 행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살아남는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 관심이 그것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 . . [현재의 생활을 유용하게 조명하고 완성시키는 부분만을 인정] . . . 이러한 선택을 유발시키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 두뇌이다. 두뇌는 유용한 기억을 현실화시키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의식의 보다 낮은 층 속에 간직한다.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행위의 보조수단인 지각은 실재 전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분리시켜낸다. 지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지각은 미리 분류하고 미리 명칭을 붙인다. 우리는 거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단지 그 대상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를 알면 족하다. 그러나 때때로 다행스럽게도 그 감각과 의식이 생활과 보다 덜 밀착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자연은 그들의 지각기능을 그들의 행위 기능에 덧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그 사물 자체로 보며 자신들을 통해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행위를 목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각하기 위해 지각한다―다른 목적은 없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다. 그들 자신의 어떤 측면을 통해서, 즉 의식을 통해서건 아니면 감각을 통해서건 그들은 초연히 태어난다. 그 초탈이 어떤 감각의 초탈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탈인가에 따라, 그들은 각각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며,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 예술에서 보는 것은 좀더 직접적인 실재의 상(像)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더 많은 수의 사물을 보는 이유도 그가 자기의 지각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보다 덜 갖기 때문이다.”(165-167)
― 철학의 역할: 가치의 전환
“. . . 여기서 철학의 역할이란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옮겨줌으로써 실재에 대한 좀더 완전한 지각에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실용적인 흥미의 대상이 우주의 측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멀리하고 실용적인 면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의 전향이 바로 철학 자체인 것이다.
. . . 사실 철학하기 위해서는 우선 초탈해야 하며, 사색이란 행위의 반대라고 말한 철학자는 한 둘이 아니었다. . . . 플로티누스(Plotinus) . . . <모든 행위는 사색이 약화된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덧붙여 그는 모든 제작행위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 . . [플라톤 정신에 충실한 그는 진리의 발견을 위해 정신의 전향이 요구 . . 정신은 현상계에서 나와 저 위의 실재의 세계로 밀착되어야 한다고 . . . 사랑하는 고향으로 돌아가자! . . .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것이 도망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 . . 플라톤을 위시하여 형이상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모두에 있어서는 삶에 초연해지고 관심을 전향시키는 것은 곧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즉시 이사하는 것이며, 감각이나 의식보다는 지각 기능을 전개하는 것이다《즉, 플라톤은 현실을 실용적인 흥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반면에 베르그송은 현실은 실용적인 흥미뿐만 아니라 사색적이고 비실용적인 것 까지도 현실의 한 측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에게 있어 사색은 현실을 초월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보다 완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철학을 삶의 내재성 속에서 발견한 위대함이다》. . . . [그들은 이를 위한 교육이 눈가리개를 제거하거나, 생활의 요구 때문에 익어있는 그 위축의 습관, 즉 경직된 지각을 떨쳐버리는데 있다고 보지 않았다. 또 형이상학자는 사색의 절반을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데 두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음. 그러기는커녕 다른 것으로 향하려 함 . . 그래서 그들은 외적인 세계와 자신을 인식할 때 끊임없이 사용하는 것이 아닌 다른 투시(vision) 능력에 호소하고 있었음. 이것은 칸트도 그랬다. 즉 직관은 초월적 세계를 보는 초월적 능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 .”(167-168)
― 직관에 관한 칸트의 견해
“. . . [칸트는 그 초월적 능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 .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은 . . 형이상학은 투시능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지, 변증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직 우월한 직관(知的 직관)만이, 즉 형이상학적 실재(즉, 이데아)의 지각만이 형이상학을 구축 . . . 칸트의 <비판>의 결과 . . 피안의 세계는 오직 투시를 통해서만 침투 . . 지각을 포함하는 정도에 따라 가치를 지님 . . . 이 지각들을 섞어 놓는다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집어넣었던 양만큼만 알게 될 것이다 . . 추리도 최초에 지각했던 것을 넘어서 당신을 한 발자국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초월적 능력, 직관이 아니라면, 지각 이상은 넘지 못함 . . 이것이 그가 사변철학에서 밝혀놓은 공적 . . .] . . . 그는 명백히, 만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면 오직 직관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오직 직관을 통해서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직관만이 형이상학을 우리에게 줄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후에, 덧붙여서 이러한 직관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왜 그는 직관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가? 그 정확한 이유는 그가 염두에 두었던 투시가 플로티누스가 표현했던, . . . 형이상학적 직관에 호소하던 사람들이 표현했던 종류의 투시였기 때문 . . 말하자면 실재 <자체>의 투시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모두 감각은 물론 의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기능을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반대의 방향 . . . 그들은 모두 실제적 생활에서 초탈한다는 것이 그것에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면, 즉 실재의 인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변증법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라고 말했으면서도, 직관은 초월적 능력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직관이 플라톤이나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초월적 실재를 아는 능력이라고 봄으로써, 직관을 현실과 분리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이유 . . . [그들의 생각으로 일상생활에서 기능하는 감각과 의식은 운동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게 해줌 . . 감각과 의식이 보통 작용하듯이 작용하면, 우리는 사물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실제로 지각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래서 감각과 의식의 습관적 소여에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사변의 질서에서 풀길 없는 모순에 봉착 . . 모순은 변화 자체 내에 본래부터 있는 것(제논이 그랬듯이)이며, 따라서 이 모순을 피하려면 변화의 영역을 벗어나 시간 너머로 올라가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이 그들의 입장]
. . . [형이상학은 제논이 운동과 변화를 논의했을 때 탄생 . . 운동과 변화의 불합리성을 주장한 이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참되고 일관적인 실재를 변화하지 않는 것 속에서 찾았다 . . 그래서 칸트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진정한 시간 속에서, 즉 지속 속에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작용한다고 믿었다. 한편 이것은 칸트는 감각과 의식의 일상적 소여가 상대적인 것임을 이해한 이유 . . 따라서 형이상학은 감각과 의식의 투시와는 전혀 다른 투시(인간적 투시가 아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까닭. . . .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운동과 변화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 운동하는 가운데 정지된 것을 붙들고 있었다.(운동을 모순으로 보는 것 자체가 정지된 상태를 상정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지각이 결정화 된 것, 즉 실용적인 목적으로 고체화된 것을 운동 및 변화의 직접적이고 완전한 지각으로 오인하고 있었다.(변증법적으로 운동을 정지시켜 놓고 보았기 때문에, 실제의 운동을 목적에 따라 취한 것이다). . . 칸트가 시간 자체라고 생각했던 것은 흐르지도, 변화하지도, 지속하지도 않는 시간이었다. . . . 이와 반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변화와 지속을 그 본래적 운동성(mobilité originelle) 속에서 파악하는 것 . . . 특권적 영혼이 직관에 부여할 연장(延長)을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 의식 전체에 연속성을 재수립하게 될 것이다―이 연속성은 이제 더 이상 가설적이 아니며 구성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연속성이다.”(168-171)
― 운동의 불가분성
“. . . 사유습관과 지각 습관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 변화와 운동의 직접적인 지각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 . . 우리는 모든 변화, 모든 운동을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 . . 점 A로부터 B로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단순하다 . . . [운동의 단순성이란 운동은 일회적이라는 점이며, 그것을 잘라서 여러 개의 동일한 운동으로 나눌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만일에 A에서 B로 운동하는 도중에 멈춘다면, 그 두 개의 운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운동이 될 것이다] . . . [우리는 운동이 구간 위에 덧붙여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운동이란 운동 경로의 매 순간의 점을 지나는 것이므로, 원하는 만큼의 수많은 단계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고 생각] . . . 그러나 어떻게 운동은 그것이 지나가는 공간 위에 덧붙여질(s'appliquer)수 있는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일치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움직이는 대상이 그 지나가는 경로의 어느 한 점에 있단(serai) 말인가? 그것은 통과한다(passe).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거기에 있을 수 있다(pourait y e^tre). 대상이 멈춘다면 그것은 거기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멈춘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운동이 아니다. 통과하는 중도에 끊임이 없을 때, 그 통과는 단 한번의 도약으로 완결된다. . . . 그것이 단일한 하나의 도약일 때 바로 그것은 분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통과가 실현되기만 하면, 단지 그 경로가 공간이고 공간은 무한히 분할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운동 자체도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운동 속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위치의 변화가 아니라 위치 자체이기 때문이다. . . . 우리에게는 부동성이 필요하다. . . . 실제로 부동성이 운동의 부재를 뜻한다면, 실재하는 부동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운동은 실재 자체이며, 우리가 부동성이라 부르는 것은 두 대의 기차가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방향을 향해서 평행한 철로 위를 달려 갈 때 나타나는 상태와 유사한 사물의 상태다. [서로 영향과 행위를 주고받으려면 두 대의 기차가 똑같은 속도로 달려가야만 한다. . .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운동이 정지해있어야 한다] . . . 부동성이란 행위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실재인 양 내세우고,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며 운동을 어떤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한다. . . . 우리가 이러한 정신의 습관을 사색의 영역에로 옮겨갈 때, 우리는 참된 실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 . . 엘레아의 제논 . . . 운동을 그 운동이 지나는 공간과 혼동하고 있고, 적어도 공간을 다루는 방식으로 시간을 다룰 수 있으며 시간을 그 연관 관계를 고려치 않은 채 분할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 . . [아킬레스와 거북의 해소할 수 없는 간극의 문제 . . .] . . . 이 난점을 간단히 해치워버릴 매우 간단한 방법 . . . 그것은 아킬레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는 결국에 가서는 거북이를 뒤쫓아가서 그것을 지나칠 것이기 때문이다.《베르그송은 여기서 시간의 내재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 나는 거북이를 다른 방법으로 따라간다. . . . [발을 떼는 한 발 한 발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근육이 움직이고, 공기를 가르며, 우주 전체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거북이를 추월할 것이다] . . . 나는 분할할 수 없는 연속된 행위를 완수한다. 나의 과정은 이러한 행위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이 과정의 부분을 이 과정에 포함된 걸음의 수에 따라 분리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본인이 아니므로 오로지 내적 시간만이 알 수 있다》 . . . 운동과 부동성을 일치토록 만들어 그 결과 서로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 . . 우리의 일상적 방법 . . . 부동적인 것을 이용해서 그 운동을 재구성한다. 우리에게 있어 운동이란 위치(位置)이다. . . . 우리는 운동하는 것 안에서 운동을 투시할 때 사유 안에 나타나는 곤란점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172-176)
― 변화의 불가분성
“ . . . 모든 실재적인 변화는 불가분적인 변화다. 우리는 변화를 뚜렷한 상태들의 연속으로 다루길 좋아한다. 이 상태들은 말하자면 시간 속에서 일렬로 늘어서는 것이다. . . . 우리 각자가 <나(moi)>라고 부르는 부단한 변화는 <사물>이라 불리는 부단한 변화에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이 두 변화는 서로의 관계상,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두 기차와 같은 상황에 있어야 한다. . . . [가령, 무한히 빠른 진동으로서의 색조의 변화 . . 우리의 주관적인 정도에 따라 그 변화에 참여 . . ] . . . 사실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지 않는 지각은 없다.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빛깔은 운동성 자체이며, 우리의 개성도 또한 운동성이다. . . . 대상의 변화와 주체의 변화라는 두 변화가 어떤 특정 조건하에서 발생할 때, 이 변화로 인해 <상태>라 불리는 특정한 현상《효과》이 나타난다. <상태들>을 소유하기만 하면 우리의 정신은 이것을 이용하여 변화를 재구성한다.《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상태는 마치 달리는 두 대의 기차가 특정 조건하에서 비슷한 속력을 가진 상태와 같다》 . . . 변화를 여러 상태로 분해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에 행위 할 수 있으며, 변화 자체보다는 상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실제적인 면에서 더 유리하다. . . . 변화가 실제로 상태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즉시 풀길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즉, 제논이 운동을 부동하는 점들의 이행이라고 생각하듯이, 변화를 상태들로 설명하는 것은, 제논이 운동을 그 모순적 성격으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본 것과 같은 난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문제들이 다루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다. 참된 실재에는 눈감고 있는 것이다.《즉, 용어 이전의 실재를 보아야 한다. 마치 비가 내라는 것을 보고, 그 내리는 것에 <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그 명명된 비라는 실체가 이미 존재하고, 그리고 나서 그 실체가 내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은 것》 . . . 변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변화 밑에 변화하는 사물이 있지는 않다. 변화란 담지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운동도 존재한다. 그러나 불활성적이고 불변적이면서 운동하는 대상이 있지는 않다. 운동은 움직이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운동은 실재 그 자체이다. 존재에 운동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운동 자체가 존재를 구성한다. 존재, 실체, 담지체란 하나의 효과, 주관적 효과이다.》”(176-177)
― 육체, 담지체, 물체를 벗어나는 것으로서의 운동과 변화
“. . . 눈은 습관적으로 시각 영역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형체들을 분리 . . . 이 형체들은 그때 위치는 변하지만 형태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가정된다. . . .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안정적인 대상, 말하자면 책임 있는 대상을 다루는 것이 실제로 편리하다. . . . 촉각의 척후병으로서 시각은 외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행위를 준비한다. . . . 그러나 청각에 호소할 때, . . . 음악의 멜로디를 들으며서 마음을 가라앉혀보자. 이때 우리는 움직이는 것에 부착되지 않은 운동, 그리고 변화하는 것을 지니지 않은 변화를 명확히 지각하지 않는가?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것은 사물 자체이다.《육체에 종속되지 않은 운동, 변화 그 자체 . . . 그렇다면 <육체>, <. . .것>은 무엇인가? 효과인가?》. . . . [우리는 멜로디의 연속성을 음표의 병치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으로, 시각적 이미지로, 악보의 형식으로, 음표들을 상상 속의 종이 조각위에, 연주자의 피아노를 생각하고, 활을 생각하고, 음악가를 생각하면서 음악을 듣는 경향이 있다] . . . 그러나 이러한 공간적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을 때 순수한 변화가 남게 된다.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충분하며 어떻게 해서도 분할되지 않고 결코 변화하는 <사물>에 부착되어 있지 않다. . . . 운동은 그 수송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변화도 일상적 의미에서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 . . 《179쪽 두 번째 문단인 다음 구절에서 베르그송은 모호한 진술들을 하고 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물리학에서 제시된 투시는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행위를, 또 끊임없는 진동 속에서 왕복운동을 하는 물질을 발견해 낸다는 것이다. 처음엔 담지체를 상정하였지만, 결국 그것이 분열되어 분자로, 원자로, 전자로, 미립자로, . . . 결국엔 운동에 부여되었던 담지체가 단지 편의적인 도식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 . 그 수송체로 간주되었던 <움직이는 것>이 결국 단순히 하나의 얼룩점이 본질상 지극히 빠른 진동의 연속이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아마도 베르그송은 이 같은 운동의 개념은 운동을 공간적인 것으로, 행위자를 상정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비판하는 듯 싶다》 . . . 그러나 내적 삶의 영역에서만큼 이렇게 변화의 실체성을 잘 볼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곳은 없다. 개성에 대한 이론이 귀착하게 되는 모든 종류의 난점들과 모순들의 원인은, 우리가 한편으로는 뚜렷이 구별되는 심리적 상태들을 상상하면서 이 상태들 각각은 불변적이지만 그 계기에 의하여 자아의 변화를 산출해낸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못지 않게 불변적인 자아가 있어 그 상태들의 담지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온 데 있다. 어떻게 이 단일성과 다양성이 회합할 수 있단 말인가? 둘 다 지속을 지니지 않았는데―왜냐하면 우선 변화란 첨가된 것이기 때문에, 또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도대체 어떻게 이것들이 지속하는 자아를 구성할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는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는 기체(substratum)도 없고,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그 기체 위를 지나쳐 가는 뚜렷이 구별되는 상태들도 없다. 단지 내적 삶의 연속적인 멜로디가 있을 뿐이다―이 멜로디는 지금도 울리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울릴 것이다. 이 멜로디는 우리의 의식적 존재의 처음부터 끝까지 분할됨이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개성(個性)이다.(178-180)
― 운동과 변화가 실재 그 자체이다
“. . . 이렇게 불가분적인 변화의 연속성이 바로 참된 지속을 구성한다 . . . 따라서 이 <실재적> 지속이 표현될 수 없고 신비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지속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것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겠다. 실재적 지속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이라 부르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분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지각되는 시간이다. . . . 멜로디를 절단해서 식별되는 음표로 만들 때, 즉 원하는 대로의 <전>과 <후>로 만들 때, 우리는 멜로디 속에 공간적 이미지를 집어넣고 있으며, 또 동시성을 지닌 계기를 수태하고 있다. 공간에는, 또 오직 공간에서만, 서로 외적인 부분들의 명확한 구분이 있다. . . . 우리는 보통 공간화된 시간 속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우리는 생활의 심연에서 울려 나오는 단절되지 않은 울림에 귀를 기울일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실재적인 지속이 있는 곳이다. 그 덕분에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또 외부세계에서 목격하는 어느 정도 긴 변화가 단일하고 동일한 시간 속에 나타난다. . . . 실재는 운동 자체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변화는 있지만 변화하는 사물은 없다고 말했을 때 뜻하던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인 운동성의 장관 앞에 서 있는 사람 중에는 현기증이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단한 육지에 습관이 들어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배의 옆질(roulis)이나 키질(tangage)에는 적응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사유와 존재를 부착할 <고정된> 점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만일 모든 것이 통과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만일 실재가 운동성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 이미 존재하기를 정지했을 것이라고 한다. 실재는 사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물질적 세계는 곧 해체될 것이며 정신은 사물의 급류 속에 휘말려 들어갈 것이라 한다―그들을 안심시키도록 하자. 만일 그들이 사이에 드리워진 장막 없이 변화를 바라보는 데 동의하게 되면 그 즉시로 변화는 그들에게 가장 실체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변화의 견고성은 단지 운동성들을 일시적으로 배열시킨 것에 불과한 고정체의 견고성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180-182)
― 운동과 변화가 실재 그 자체라면, 과거를 다른 방식으로 취해야 할 것이다. 즉, 과거는 더 이상 현재와 분할되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고 있다.
“. . . 만일 변화가 실재적이고, 게다가 실재까지 구성한다면, 우리는 과거를 다룸에 있어서 이전에 철학이나 언어를 통해서 익숙해 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보통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자들은 이 자연적인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이들 철학자나 우리에게는 현재만이 홀로 존재한다. 설사 과거 가운데 어떤 것이 잔존하더라도 그것은 현재의 도움에 의한 것이며, 현재가 베푸는 자비심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가령,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한 기억이라고 봄으로써,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 . . 기억이라 불리는 특정한 기능의 간섭에 의해서 과거는 잔존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역할은 과거 중의 어떤 예외적인 부분들을 일종의 상자 속에 쌓아놓아 보존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얼마나 커다란 오류인가! . . .
. . . 만일 문제가 현재의 순간―다시 말해서, 직선에 대한 수학적 점과 같은 시간에 대한 수학적 순간―이라면, 그러한 순간이 순수한 추상으로서 정신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가령, 우리는 현재라는 것을 종이를 세로로 보았을 때처럼, 한 면과 한 면의 순간적 이행으로 공간화해서 생각한다》 그것은 실재적인 존재를 지닐 수 없다. 수학적인 점에서 직선을 만들어내지 못하듯이, 그러한 순간에서는 시간을 만들어낼 수 없다. 설사 그러한 순간이 존재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에 선행하는 다른 순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가설상 시간이 순간들의 병치로 환원된다는 이유로, 어떤 간격의 시간에 의해 두 순간이 분리될 수는 없다.《베르그송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분리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재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특정 구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한계의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고, 요즘일수도 있고, 최근일 수도 있고, . . . 단순현재의 시간이란 명확하게 구분해서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베르그송은 과거와 현재를 하나는 사라지고 없고, 하나는 있고 하는 식으로 구분해서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 순간들은 어느 것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으며, 그 결과 그것들은 오직 하나의 순간이다. . . . 우리의 의식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떤 간격의 지속을 사유하고 있다. 그러면 지속이란 무엇인가? 지속을 정확하게 고정시켜 놓기란 불가능하다. . . . 이 순간에 나의 현재는 내가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내가 관심의 영역을 내 문장에 한정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관심은 컴퍼스의 두 점 사이의 간격처럼 넓혀질 수도 좁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 . . 《베르그송은 현재라고 하는 것이 명확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한 문장으로 좁힐 수도 있고, 그 전후의 다른 문장들로 넓힐 수도 있고, . . 더 뻗어나가 무한히 확장될 수도 있고 . . 이런 식으로 나는 과거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원하는 부분까지 포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 따라서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분리하는 것은 임의적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생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포착할 수 있는 영역의 정도에 상대적이다. <현재>는 정확히 이 노력만큼의 양에 해당하는 공간을 점유한다. 이 특정한 관심이 자신이 지닌 것의 어떤 부분을 그 시야 속에서 놓치면, 즉시 그가 놓쳐 버린 현재의 부분은 실제로 과거의 부분이 된다.《다시 말해, 과거란 시간적으로 먼저 일어나서 지나가고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재적 관심으로부터 누락된 어떤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재가 과거로 떨어지는 때는 우리가 그것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될 때다. 개인의 현재에 타당한 것은 국가의 현재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한 사건은 당대의 정치에 직접 관심을 끌지 않고, 따라서 업무에 지장 없이 무시될 수 있을 때, 과거에 속하게 되어 역사 속에 흡입된다. 사건의 행위가 느껴지는 한, 그 사건은 국가의 생활에 밀착해서 그것에 현재적으로 계속 존재한다.《즉, 베르그송은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란 시간 그 자체의 문제이기보다는 우리의 관심의 방향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 . . 《만일에 살림살이가 부유해지면, 그는 현실적인 이득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 과거라고 간주되어 중요하지 않거나 사라졌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그것들을 현재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과거로 분할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고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심은 순간성이나 일군의 동시적인 부분들로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현존하는 동시에 연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으로 포함하게 된다. 마치 늘어난 고무줄처럼 실재는 한번에 일어나고 단순하고 분할 할 수 없음.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실재를 변화 자체로 이해하였을 때 과거를 취하는 방식에 대한 최종적인 의미이다. 실재를 변화와 지속으로 이해해서, 보다 많은 실재를 받아들이고, 음미할 때에는, 과거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거나, 공존하게 된다는 것. 즉 현재적 관심이나 이익 때문에 누락되고 사라져버린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 . 그래서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것 . . 과거를 현재 이전의 연대기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지속, 즉 하나의 연속이다. 운동이 분할될 수 없듯이, . . 시간 역시 고대에서 지금까지 전부 하나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 .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분할될 수 없는 것으로 지각되는 멜로디, 또는 단어의 뜻을 확장해서 영속적인 현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하고 있는 멜로디이다. 이 영속성(perpétuité)은 부동성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또한 이 불가분성도 순간성과는 일발의 공통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속하는 현재이다.
. . . 예외적인 경우엔 삶에 기울이던 관심이 그 이해관계에서 초탈하게 되며, 그 즉시 마술처럼 과거는 다시 한번 현재가 되기도 한다. . . . [갑작스런 죽음의 위협을 보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등산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 교수형에 처해지는 사람 등] . . 관심의 날카로운 전향이 일어난다 . . . 의식의 방향에 변화가 일어 그때까지는 미래에 향해 있었고 행위의 필요성에 빠져 있었지만, 갑자기 그것들에 관한 모든 이해 관계에서 벗어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 속에는 수많은 <망각된> 자잘한 것들이 나타나고, 그 사람의 전역사가 마치 주마등처럼 펼쳐진다.《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과거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다시 현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과거는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어, 현재하고 있게된 것이다》
― 변화가 불가분적이라면 과거는 현재와 한 몸이며, 스스로 자신을 보존할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과거를 보존해서 현재 안으로 쏟아 붓는 역할을 하는 특별한 기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자신을 자동적으로 보존한다. 물론 변화가 불가분적이라는 사실이나 우리의 가장 먼 과거라도 우리의 현재에 밀착해서 단일하고 동일한, 단절되지 않는 변화를 구성한다는 사실에 우리가 눈감아버린다면, 과거란 폐기된 것이라는 말이 정상적이 될 것이고, 과거의 보존에는 어떤 부수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한 기구를 마법으로 만들어내서 우리의 의식에 다시 나타날 수 있을 과거의 부분들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삶의 연속성과, 따라서 그 불가분성을 고려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과거의 보존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현재와 분리되어 폐기되었다가 두뇌와 같은 특정 기구에 의해 되살아나거나 따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한 몸으로 . . 마치 늘어난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 . 내적 삶의 이 같은 연속성 속에서 현재가 따로 있고, 과거가 따로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음. 따라서 과거의 보존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음. 그것은 그 자체 이미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 . . 자연은 메카니즘을 발명해내서는 우리의 관심을 미래의 방향으로 이끌어, 과거(내가 의미하는 과거는 우리의 현재 행위와 관련이 없는 역사의 일부분이다)로부터 떨어지게 한다.《베르그송에 따르면 과거나 현재나 미래는 우리의 관심의 방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필요 때문에 현재나 미래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과거, 즉 삶에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하겠지만, 이와 같은 관심의 멀어짐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편파적이고 부분적으로만 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철학이 관심의 전향을 꾀해야 한다고》 기껏해야 순간의 경험을 완성시키기 위해 선행하는 경험을 단순화시킨 것을 이것저것 관심에 보내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두뇌의 기능이다.《즉, 두뇌는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단순화해서 행동이나 반응을 준비하게 하는 물질적 기능만을 할뿐이다. 이 준비하는 간격, 그 자체가 두뇌이다》 . . . . . . 두뇌의 기능은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중에서 선택하는 일, 과거를 축소시키는 일, 과거를 단순화시키는 일임이 증명된다. 과거가 폐기된다고 믿는 습관에 물들지만 않았다면, 우리는 사물을 이러한 각도에서 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과거가 폐기된다고 믿음으로써, 현재와 미래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 또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에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과거가 폐기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경험들과 실재는 불가분한 것으로서의 변화 그 자체로, 지속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대신에, 조각으로 잘려져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믿음이고, 오해이다》 . . .
. . . 현재 속에 과거를 보존한다는 것은 변화가 불가분적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 . . . . . 실재란 변화이며, 변화는 불가분적이고, 이 불가분적인 변화 속에서 과거는 현재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한번 확신하기만 하면 된다."(185-187)
― 과거와 현재가 단숨에 일어나는 한 몸, 즉 지속이므로, 실체란 운동과 변화 그 자체이다.
". . . 변화란 대부분이 말하듯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며 한갓 서로 다른 상태를 대체하는 다수의 여러 상태들로서 생각된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태들 사이의 연속성을 인위적인 끈으로 재구성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이지 않는 부동성이라는 기체란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속성은 하나도 지닐 수 없는 것으로서―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화이기 때문에―우리가 다가가려고 할수록 뒤로 물러선다. 그것은 고정하기 위해 요청되었지만 마치 변화의 환영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 . . 변화는 바로 사물의 실체임을 . . . 경험에 접근할 수 없게 해주는 그 비운동성을 지닌 실체도 없다. 따라서 근본적인 불안정성이나 절대적인 불변성이란 실재적인 변화의 연속성 바깥에서 취한 추상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정신은 이 추상된 것을 실체화시켜 한편으로는 여러 상태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 혹은 실체로 만든다.《가령, 내리고 있는 것을 비라고 명명하고 정의하고 나면, 마치 비라는 실체가 있고, 이것이 내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운동에 대해 고대인이 제기했던 난점, 실체에 대해 근대인이 제기했던 난점, 이것들은 이제 사라진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운동과 변화가 실체적이라는 것이고, 그 두 번째 이유는 실체가 곧 운동과 변화라는 것이다. . . . 우리가 실제로 있는 곳은 구체적인 지속이며 여기서 필연적 결정이라는 관념은 그 의미를 온통 잃어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과거는 현재와 동일하게 되며 끊임없이 현재를 가지고―설령 현재에 첨가된다는 사실에 의해서일지라도―절대적으로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또한 상태, 성질, 결국 안정성을 띠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의 참된 본질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인간이 우주에 대해 갖는 관계를 점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경우에 대상과 주체는 서로에 대해서,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두 기차와 같은 상황에 있다. 운동성 위에 운동성을 조정시킬 때 비운동성이 효과를 나타낸다."(188-189)
― 이 같이 실재 그 자체를 보다 잘 볼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예술을 통해서이며, 그 깊이는 철학을 통해 심오해진다.
". . . 의심할 바 없이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적으로 지각하는 것 이상의 성질과 그 이상의 뉘앙스를 사물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은 우리의 지각을 팽창시킨다. 그러나 깊이보다는 표면으로 팽창시킨다. 예술은 우리의 현재를 풍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현재를 초월하게 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즉, 예술은 모든 것을 현실화하고, 현재화하기 때문에 과거를 그 자체로 사유할 수 있게 하지는 못한다는 말인가?》 철학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를 과거로부터 고립시키지 않는 데 익숙해질 수 있다. 이 과거는 현재가 끌어 잡아당기는 것이다. 철학 덕분에 모든 사물은 깊이를 얻게 된다《즉, 현재와 과거를 한 몸으로 이해하고, 그 원근감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아니 깊이 이상의 것을 얻게된다. 그것은 4차원과 같은 것으로서 선행하는 지각이 현재의 지각과 연결되어 남아 있게 해주며, 바로 앞의 미래 자체가 현재 속에 부분적으로나마 개관될 수 있게 해준다. 이때 현재는 더 이상 정적인 상태로, 있음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는 동적(動的)으로, 또 그 경향의 연속성과 가변성 속에서 자신을 나타낸다. 우리의 지각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얼어붙어 있던 것은 따뜻이 데워져서 운동하게 된다. . . . 어두침침한 철학적 수수께끼들 . . . 그 수수께끼들은 실재적인 것에 대해 얼어붙은 투시로부터 발생하며, 우리의 활력을 인위적으로 약화시킨 것을 사유를 통해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사물을 지속의 상하(sub specie durationis)에서 사유하고 지각하는 데 익숙해질 수록 우리는 실제적 지속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 . . 이 원리의 영원성은 불변성의 영원성이 아니라, 생명의 영원성 . . .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그러나 문제는 지속으로 사유하고, 실재적인 것을 투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여주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들 속에서 작가나 예술가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검토해봄으로써 설명 가능한 것일 것이다.》"(189-190)
― 분석은 상대적 질서에, 직관은 절대적 질서에 속한다
“. . . 사물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매우 다른 두 가지 방법 . . . 그 첫 번째 방법이 함축하는 바는 사물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이 함축하는 바는 사물의 내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관점 및 우리가 표현에 사용하는 부호에 의존한다.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관점도 취하지 않고 어떤 부호에도 기초하지 않는다. 첫 번째의 지식은 상대적인 것에 머무르며, 두 번째의 지식은 그것이 가능한 경우에는 절대적인 것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 . 한 대상이 공간 속을 운동하고 있다고 하자. 나는 이 운동을 내가 취하는 관점에 따라, 즉 운동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부동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지각한다. 이 운동에 대한 표현은 내가 운동에 관계시키는 좌표계 혹은 지표점에 따라, 다시 말해 내가 운동을 번역하는 부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근거에서 나는 그 운동을 상대적이라 부른다. 어느 경우에나 나는 대상 자체의 외부에 위치한다. 반면 절대적인 운동을 말할 때 나는 운동하는 것에 어떤 내부 및 영혼의 상태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한 나는 그 상태와 공감하고 있고, 나 자신을 상상의 노력에 의해 그 상태 안으로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이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가에 따라, 나는 동일한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여기서는 운동 자체의 정의, 즉 운동이 절대적인가 아닌가를 인지할 방법이 아니라, 절대적 운동을 말할 때 정신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정의할 뿐이라고 베르그송은 주(注)를 달았다》 또한 내가 경험하는 것은 내가 대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관점에도, 또 내가 대상을 번역해낼 수 있는 부호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상 자체 안에 있을 것이며, 또 원래의 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모든 번역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운동은 외부로부터, 말하자면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파악되지 않고 그 내부에서, 그 자체로, 본연의 자태로 파악될 것이다. 나는 절대를 포착하는 것이다.”(191-193)
― 소설 인물의 예를 통해 본 절대적 질서
“. . .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겪는 모험을 내가 듣고 있다고 하자. . . . 그 인물에 대하여 내게 이야기되는 것은 모두 그에 대한 그만큼의 관점을 내게 제공해준다. 그러나 인물을 내게 묘사해주는 그 모든 성격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비교해봄으로써만 그 인물을 알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그 인물을 부호적으로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호나 관점은 나를 그 인물 외부에 위치시킨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것은 그 인물이 다른 인물과 공통으로 지니는 것뿐이며, 그에게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고유한 것,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본래 내적인 것이므로 외부에서 지각될 수 없고, 다른 모든 것과 같은 단위로 측정되지 않으므로 부호를 통해 표현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기술(記述), 역사 및 분석은 나를 상대적인 것 안에 남겨 놓는다. 오직 그 인물과의 합치만이 나를 절대에로 데려다준다.《존재의 본질은 절대적인 것이고, 그것은 내부에서만 체험되는 것이고, 고유한 것이고, 다른 것으로 이루어진 단위로 측정되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고, . . . 따라서 다른 것에 의해서가 아닌, 그것 자체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193-194)
― 절대는 완전과 동의어이다
“. . . 이런 의미에서만 절대는 완전과 동의어이다. . . . 《어떤 풍경을 수많은 사진으로 찍는다고 그 풍경 자체가 되지는 않는다. 시의 원작을 아무리 세심하게 번역해도, 뉘앙스를 더하고 더하고 해도 . . 시의 원작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 . . 그것은 원작의 내적인 의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때의 내적인 의미란 시의 의미 이전의 것 . . 소통의 단위 이전의 체험의 문제 . .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서 . . 하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감정 전체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어떤 관점에서의 재현, 어떤 부호로의 번역은 그 관점이 취해진 대상이나 그 부호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과 비교했을 때 언제나 불완전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절대는 그것이 완전히 본연의 것이라는 점에서 완전하다.”(194)
― 절대는 무한과 동의어이다
[베르그송은 절대가 무한과 동의어라는 말을 두 예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호머의 시의 어떤 인상을 전달하고자 한다면, 그 시를 번역해서 설명하고 주석을 붙이고, . . . 끝없이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또, 팔을 들어 올릴 때 그 행위의 주체인 나는 단순한 지각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지만,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는 무한수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절대에 도달하는 것은 무한한 점근선의 과정이며, 따라서 절대란 무한한 것이다] . . . “따라서 내부에서 볼 때 절대는 단순한 것이지만, 외부에서 고찰되었을 때, 즉 다른 사물에 상대적으로 취해졌을 때, 절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부호와의 관계상 언제까지 가도 화폐로 바꾸어줄 수 없는 금조각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불가분적으로 파악되는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세어지는 것은 본래 무한한 것이다.”(195)
― 절대는 직관 안에서만 주어진다
“따라서 절대는 직관 안에서만 주어지며, 반면 다른 나머지는 모두 분석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이란 분석을 통해서 대상의 내부로 옮겨가 그 대상 안에 있는 유일하고, 표현될 수 없는 것과 합치하는 공감(共感)이다. 이와는 반대로 분석은 대상을 기지(旣知)의 요소로, 즉 이 대상과 다른 대상에 공통적인 요소로 환원시키는 작용이다. 따라서 분석한다는 것은 사물을 그 사물이 아닌 것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분석은 번역이요 부호에 의한 전개이며, 또 연속적인 여러 관점에서 본 표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연구되고 있는 새로운 대상과 이미 알려져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대상과의 접촉에 주목한다. 분석은 대상의 주위를 돌도록 운명 지워져 있으면서도 그 대상을 포착하려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 . . 분석은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직관은 . . . 하나의 단순한 행위인 것이다《분석과 직관은 이성의 두 요소이다. 한편으로는 분석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약을 하고, . . 마치 릴레이 경주처럼, 분석하고 도약하고 분석하고 도약하고, . . .》. . . . 실재를 상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파악하며, 실재에 대해 여러 관점을 취하는 대신 실재 안에 위치하고, 실재를 분석하는 대신 실재를 직관하는, 요컨대 부호적인 표현이나 번역 혹은 재현에 일체 관여하지 않으면서 실재를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면, 형이상학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부호없이 하기를 주장하는 과학이다.”(195-196)
― 직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실재: 지속=의식=흐름의 연속=상태의 연속
― 이미지와 비유로는 실재를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 . . 운동의 기초를 이루는 공간을 떨쳐버리고 오직 운동 자체에서만, 즉 긴장 혹은 연장의 행위에만, 요컨대 순수한 운동성에만 주의를 집중 시켜보자. 이때 지속 안에서의 우리의 전개에 보다 충실한 이미지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미지도 역시 불완전하며, 더구나 비유는 모두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 지속의 전개는 한편으로는 진행해 가는 운동의 단일성과 유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펼쳐지는 제 상태의 다양성과도 유사한데, 은유를 사용하면 언제나 이 두 측면 중 하나는 희생시키고 다른 하나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 내적 생명이란 이것들 모두이며, 질의 다양성이면서 진행의 연속성이요, 또한 방향의 단일성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통해서 표현되지 않는다.”(199)
― 추상적 개념은 더더욱 실재를 표현하지 못한다
“내적 생명은 개념에 의해, 즉 추상적 관념에 의해서는 더더욱 표현될 수 없다. . . . 어떠한 이미지도 나 자신의 흐름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원래의 느낌에 훌륭히 답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 . . 그런데 이미지는 적어도 우리를 구체적인 것 안에 있게 해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어떠한 이미지도 지속의 직관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심히 다른 부류의 사물들로부터 수많은 여러 이미지를 취해보면, 그 이미지들은 행위의 수렴을 통해서 파악할 어떤 직관이 있는 바로 그 지점으로 의식을 이끌어갈 수 있다. . . . 반면에 . . . 너무 단순한 개념은 단점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개념이 실제로 부호에 지나지 않고 부호는 부호화 된 대상에 대체되어 우리에게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개념들 각각은 대상으로부터 오직 다른 대상과 공통적으로 갖는 것만을 추출해서 보존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개개의 개념은 한 대상과 그와 유사한 다른 대상들 사이의 비교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이미지의 경우보다 더 심하다. 그런데 비교는 유사점을 보여주고 이 유사점은 대상의 속성이며, 속성이란 마치 그 속성을 지니는 대상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개념들을 병치시킴으로써 대상전체를 그 부분들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거기로부터 어떻게 보면 지적인 등가물이라 할 것을 획득할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단일성, 다양성, 연속성, 유한한 또는 무한한 분할 가능성 따위의 개념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지속을 믿을 만하게 표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히 환상이다. 또한 이것은 위험한 짓이다. 추상적 관념은 분석에, 즉 대상을 다른 모든 대상과의 관련하에서 살피는 과학적 연구에 이용될 수 있다. . . . 이러한 환상과 더불어 매우 커다란 위험 . . . 개념은 추상화하는 동시에 일반화 . . . 개념은 한 특정 속성을 부호화할 때 그것을 무한히 많은 다른 대상들과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개념은 이 속성에 부여하는 연장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 속성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속성을 이 속성이 귀속되는 형이상학적 대상에로 되돌려 보내보자. . . . [속성이 대상과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속성을 형이상학적 대상에서 빼내어 개념 안에 표현토록 하면, 속성은 무한히 확대되어 그 대상을 뛰어넘는다. 이 속성은 다른 대상들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 . . 따라서 한 사물의 속성들에 대해 우리가 형성한 여러 개념들은 그 사물 주위에 그보다 훨씬 더 큰 원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원들은 어느 하나도 그 사물에 정확히 맞지 않는다. . . . 개념이란 원래 대상에서 추출된 것이므로 무게를 지니지 못하며, 단지 그 몸체의 그림자에 불과 . . . [그래서 고찰되는 실재에 대해 얼마만큼 외적인 관점을 취하는가, 혹은 실재를 가두어 놓는 커다란 원들이 얼마만큼 있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체계가 나타난다] . . . 따라서 단순한 개념은 대상의 구체적인 단일성을 분할하여 그토록 수많은 부호적 표현으로 만드는 단점 . . . 《여기서 대상의 구체적인 단일성을 singularity라고 이해해도 될까? 즉 정확히 질적으로 딱 그것임! . . 대상의 고유한 단성성 . . 》 . . . ”(199-202)
― 철학이란 개념의 창조이다
“[따라서] 개념들을 초월해서 직관에 도달해야 한다. [물론, 개념들이 형이상학에 필수적이긴 하다. 왜냐면 형이상학 역시 저 개념들을 사용하는 과학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 . . 그러나 형이상학이 참으로 형이상학이려면, 그것은 개념을 떨어버려야만 한다. 또한 적어도 경직되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개념에서 자유로워져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내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개념들이란 유연하고 움직이고 있으며 거의 유동적이다 시피한, 요컨대 직관의 그 떠다니는 형태를 표본으로 삼을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는 표상이다.《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에서 철학이 개념의 창조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의미가 여기서 베르그송이 말한 것이다. 습관적인 개념들을 벗어나서,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것》 . . . 우리의 지속은 직관 속에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질 수 있다는 것, 또 이 지속은 이미지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시사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 . . 개념적인 표상 안에는 가두어질 수 없다. . . ”(203)
― 지속의 다양성과 단성성에 대하여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은 뚜렷이 구별되어, 셀 수 있거나 한정할 수 있는 수적인 다양성이 아니라, 단성적인 것(?)들이 서로를 잠식하고 있는 것 . . . 물론, 상상으로 지속을 고정시켜서 분할하고 그 조각들을 셀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지속의 고정된 기억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지속의 운동성이 남겨 놓은 움직이지 않는 경로 위에서 완수되는 것이지 지속 자체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지속의 다양성은 다른 것과는 전혀 닮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지속이 단일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가? “서로의 내부로 연장하여 가는 요소들의 연속성은 다양성뿐만 아니라 단일성의 성질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단일성은 움직이고 있고 변화하고 있으며 또한 색조를 띠고 있거니와 살아 움직이는 단일성으로서, 순수 단일성의 개념이 기술하는 바와 같이 추상적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공허한 단일성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지속은 단일성인 동시에 다양성을 통하여 정의되는가? 아무리 분리하고 다시 결합시켜도 내가 지속에 대해 가지는 단순한 직관이 되지는 못한다. 이것은 지속에 대한 외적 관점과도 같은 것. . . 이들은 분리되어도, 재결합되어도 지속 자체의 내부로 침투하게끔 해주지는 못한다. . . . 그런데 베르그송은 나 자신을 통한 자의 지속, 직관을 통해 절대적이고 내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 . 그것은 나 자신을 알 뿐 아닌가? 문제는 실재인데 . . 왜 자꾸만 나 자신의 지속만을 문제삼고 있는가?》(203-204 요약)
― 구성적 부분과 부분적 표현
《이 장에서 베르그송이 구분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의 전체로부터 우리가 표상적으로 떼어낸 것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며, 어떤 측면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이다. 가령, 심리학에서는 한 인물에 속한다고 간주된 특정 심리상태를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다루고, 이것이 그 인물의 인격성의 일부라고 간주한다. 그렇게 해서 그의 취향이 다른 어느 누구의 취향일 수 없게 해주는 표현할 길 없는 뉘앙스를 제쳐놓는다. . . 이렇게 어떤 특정 관점이 독립적인 사실로 떼어내어진 것은, 내적 생명의 운동성에 대한 하나의 도식이다. 또, 빠리의 노틀담 사원의 탑은 그 주변의 모든 풍경들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단성성). 풍경은 단일한 것이다. 이 때 우리가 사진으로 찍기 위해 선택한 저 탑은 풍경전체의 한 측면이지, 그 풍경의 구성부분이 아니다. 탑의 경우도, 탑은 수많은 돌들로 이루어져, 그 돌들의 특정 군집이 탑의 형태를 만들고 있다. 우리가 탑을 그릴 때에는 돌 하나 하나가 아니라, 그 군집의 한 측면, 음영이다. 이것은 외적이고 도식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전체에서 취해진 표지이다. 한편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 글자들은 구성적 부분들이 아니라 부분적 표현들이다. 가령, 시에서 한 단어를 뺀다면, 마치 퍼즐에서 한 조각이 빠진 것과 같은 형태가 되지 않는다. 한 단어는 시에서 빠지면 전혀 다른 개체가 될 것이고, 그 시는 전혀 다른 시가 될 것이다. 분석을 하면서 우리는 직관으로부터 내려와서 이 직관의 표현을 재구성하는 요소적인 부호에로 되돌아간다. 부호적 요소들 간에 실행되는 작용을 통해 사물을 재구성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 요소들은 사물의 단편이 아니라 부호의 단편. . .》(204-207쪽)
― 경험론과 이성론
《심리학이 그렇듯이, 상태만을 가지고 그 자체만을 취하든, 상태들을 상호연결하든 . . . 부분적 표지를 실재적 부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운동을 수학적 점으로 이해하고, 이들을 분할해서 다시 재결합시키면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고대철학과 다르지 않은 관점이다. 경험주의자와 이성주의자 모두 이 같은 환상에 빠짐 . . 분석의 관점과 직관의 관점을 혼동 . . 과학과 형이상학을 혼동 . . . 인물로부터 특정 심리상태를 떼어내어 그 인물을 바라보는 것은 그 인물의 실재의 부분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한 특정 관점, 즉 부분적 표지를 본 것이다. 그것은 풍경 중에서 특정 부분을 메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분석의 정의란 바로 이런 것이다. 분석은 상태에 주목하는 것, 즉 흐름 속에서 상상적으로 정지된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실재의 부분이 아니라, 실재의 표지의 한 부분이다. 기껏해야 이 상태들, 표지들을 모아놓고 여기에 자아라든가, 실재라든가, 운동이라든가 하고 이름 붙일 뿐이다. 그것은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영역에 머무르면서 단어 배후에서 사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일련의 크로키, 표지, 도식, 부호적인 표상 . . . 따라서 ① 경험론은 직관의 관점과 분석의 관점을 혼동한 결과이다. 즉, 실재를 정지시켜놓고 바라보면서, 즉 분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실재를 찾을 수 없다는 구실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경험론은 필연적으로 부정으로 귀착된다. 이미 출발부터 잘못된 방법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 즉 베르그송은 경험론이 분석을 통해 실재를 재구성하려 했다고 본다. 즉 그림자들을 가지고 놀이감을 만들려고 하였기 때문에, 대상이 언제나 도망가는 것을 본 것이다. ② 이성론 역시 경험론처럼, 심리상태들을 단편들로 생각하고, 이 단편들은 자아에서 떼어낸 것들이라고 . . . 단편들을 재결합해서 단일성을 포착하려는 이 싸움에 지친 경험론이 결국 오직 심리상태의 다양성만이 있다고 천명하는 반면에, 이성론은 인물의 단일성을 계속 고집한다. . . . [중략] . . . 경험론과 이성론의 차이 . . 경험론은 간격 사이에서, 다시 말하면 심리적 상태 속에서 자아의 단일성을 찾으면서, 이 간격을 다른 상태들로 메꾸기를 무한히 계속한다. 그래서 자아는 수축되어 가는 간격 속에 갇혀서, 우리가 분석을 행해감에 따라 영으로 수렴해간다. 반면에 이성론은 자아를 상태들이 위치하는 장소로 생각하면서 눈앞에 공허한 공간을 대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공간을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한계 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이 공간은 우리가 부여하려고 하는 연속되는 한계를 하나하나 뛰어넘어 계속 확장해가서 드디어 이번에는 영(零)이 아니라 무한(無限)속으로 사라져버린다.(207-211 요약)》
― 참된 경험론에 대해
“. . . 두 경우에 모두 방법은 유사하다. 즉, 그들은 모두 요소들에 기초하여 번역을 추리해서는 그것이 마치 원작의 부분인 양 생각하는 것이다《베르그송은 계속해서 성분(요소)과 부분을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경험론이라면 원초적인 것 자체를 가능한 한 꽉 쥐어 잡으려고 하며, 그것의 생명에 더 깊이 파고 들어가려 하고, 일종의 정신적인 청진(auscultation spirituelle)을 통해서 그 영혼의 고동소리를 들으려 한다. . . . 이 작업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다. 왜냐하면 사유가 일상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개념은 어떤 것도 여기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다양성이거나 아니면 단일성이라고 말하는 것, 혹은 자아는 양자의 종합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여기서 단일성과 다양성은 대상에 따라 재단할 필요가 없는 표상, 이미 만들어져 있는 표상, 오직 쌓여 있는 곳에서 골라내기만 하면 되는 대상, 요컨대 갑과 을에 모두 잘 어울리는 기성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누구의 형태에 따라서도 도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단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일반관념은 너무 커서, 어떤 것도 다 들어간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어느 것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그 옷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론이라는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경험론이라면, 오직 치수에 따라 작업하면서 자신이 연구하는 새로운 대상 각각에 대해 언제나 절대적으로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경험론은 대상을 위해서 그 대상에 적합한 개념을 재단해낸다. 이 개념은 여전히 개념이라고는 거의 불리울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그 사물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참된 경험론은 이미 쌓여있는 관념들, 예를 들어 단일성과 다양성이라는 관념들을 조합시켜가면서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르게 하는 표상은 유일하고 단순한 표상이다. . . . 이렇게 정의되는 철학은 여러 개념들 속에서 어떤 개념들을 선택하거나 어떤 하나의 학파를 지지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 철학은 유일한 직관을 추구한다.”(211-212)
― 직관의 좋은 예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하는 단일성과 다양성은 이런 것이다. A가 B와 본성적으로 다르게하는 것 . . 그것이 A의 단일성일 것이다. 그것은 A와 B를 공통하는 것으로 묶는 그런 단일성이 아니다. 여기서의 단일성이란 단순한 것, 일회적인 것을 뜻한다. 다양성이란 이 단일한 것이 변화와 흐름의 과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지해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말이다. 이때 단일성이란 그 다양성의 단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어떠한 것과도 공통하지 않는 다양성이다: 그의 눈 속에는, 그를 파고들어 영향을 주고, 그의 동공의 깊은 색조와 부드러운 눈매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 . 참으로 철학에 중요한 일은 추상적인 일자(一者)나 추상적인 다자(多者)보다 우월한 어떤 단일성이, 어떤 다양성이, 또 어떤 실재성이 바로 인물의 다양한 단일성인가를 아는 일이다. . . . 개념들을 혼합시킨다고 해서 지속하는 인물을 닮은 그 무엇을 얻을 수는 결코 없다.
내 앞에 고형(固形)의 원추(圓錐)를 제시해 보라. 나는 그것이 어떻게 꼭지점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수학적 점에 가까워지는가, 또 어떻게 밑면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져서 무한히 증대해 가는 원이 되어 가는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점이나 원 혹은 이 둘을 평면 위에 병치시킨다 해도 나는 원추의 관념을 조금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내면적 삶의 다양성과 단일성도 마찬가지다. 또한 경험론과 이성론이 인격성을 향해 가도록 하는 영(零)과 무한(無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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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January 2013
10:59 by Barca?!You've mangaed a first class post
25 Januar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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