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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섬세히 보고 풍부하게 반응하기: 문학과 도덕적 상상력

이 글은 미국의 철학자 Martha Craven Nussbaum의 저서인 Love's Knowledge : Essay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중에서 한편의 논문인 "Finely aware and Richly responsible: The literature and the moral imagination"을 재구성하였다. 이 저작에서 Nussbaum은 문학과 철학, 욕망과 윤리 등 다소 상반적이거나 대립적인 관계처럼 보이는 문제들을 여러 문학작품의 예를 통해 논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녀는 미국 19세기 작가인 Henry James의 The Golden Bowl이라는 작품을 다룬다. 그러나 그녀는 두 대립적인 영역에서 어느 한쪽의 승리를 선언하기 보다는,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율될 수 있을까? 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1.

명료한 인식과 통찰을 방해하는 외부적인 조건들 속에서도, 진실을 보고 재현하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다고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생각했다. 이러한 노력들 속에서 도덕적 상상력의 역할은 "아무 것도 잃지 않(게 하)는"(on whom nothing is lost)것이며, 이것이 바로 이 글이 다루고 있는 궁극적인 테마이다.1) 즉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Maggie와 Adam의 번민은 승인된 도덕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2) 이것은 또한 죽음과의 맞대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상상적(미몽) 관계의 죽음, 낙원 속 사랑의 죽음,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실세계의 수긍.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딸이 사라진 삶을 인정해야 하며, 딸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탄생(여인으로서, 현실세계로의 탄생)이 결국 아버지의 제도적 권위와 위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이것이 결국 아버지를 살지 못하게 한다는 죄의식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제도 속에서의 아버지의 위엄을 보존하는 문제와, 자율적 존재로서 딸의 (아버지로부터의)분리의 문제. 이것이 이 소설에서 전형적인 도덕적 딜레마이다(욕망과 그것의 포기).

이들은 삶의 관계들이 부여하는 긴장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낙원의 아름다움(부녀간의 충만한 관계)을 더럽히지 않고 여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딸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남편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이것은 결국 확장되어 범 우주적인 회의와 실존적 선택의 문제로 나아간다: "왜 배 안에서 함께 살수는 없을까? . . . 왜 항상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따라서 여기에는 희생이 따른다. 아버지는 Charlotte과 미국으로 가야만 하며, 더 이상 딸을 자신의 낙원에서 보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지, 양쪽이 모두 원해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희생조차도 욕망할 수는 없을까?).

선택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선택의 대상들을 양적(量的)으로 규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선택은 하나의 관점에서만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대상들은 비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나아가 단일한 관점 안에서 선택의 항(대상)들은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편과 아버지 중 하나만을 선택(혹은 포기)해야 한다는 Maggie의 딜레마가 해소되는 과정은, 바로 이 양립 불가능한 두 선택의 사안이 양립 가능한 것으로 치환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단일한 관점을 파괴하면서 시작한다. 남편 Amerigo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Maggie는 사랑의 양태를 복수화 함으로써, 남편과 아버지가 서로 비교될 수 없음을 말한다: 질투에 싸인 관능적 사랑과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3)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러한 이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립된 가치들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 속에서 나타난다. 제도로부터 보호되어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부지불식간에 밀려오는 Maggie의 감성적 직관에 의해 점검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랑에 관한 Maggie의 고백은 (아버지와 딸의)관습적으로 추상화된 논의가 아니라 질투나 성욕까지도 포함하는 매우 현실적인 논의이다. 이제 그녀의 사유 안에서 아버지라는 제도적 존재는(딸로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사라져 버리고, 욕망을 가진 살아있는 실존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버지는 이제 살아있는 실존으로서 한 남자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새로운 인지방식을 취하게 되는데,4) 이로써 자신이 이미 경험했었던(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설득시키지 못했던) 것을 딸이 겪고 있음을 그녀의 대사들과 그녀의 이미지들 속에서 포착하게 된다. 그녀의 경험이 자신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파악하게 됨으로써, 그의 사유에서 제도적으로 부여된 기능화된 존재로서 딸은 사라져버린다.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려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부녀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그녀의 대사에서, 그는 그녀의 관능성과 자유로움 그리고 성숙한 이미지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뜻한 여름 바다에서 부유하는 . . . 은빛의 . . . 경쾌하고도 찬란한 . . . 물고기". Maggie는 이제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한없는 안락 속에서 미몽의 상태에 빠진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두 부녀의 관계의 본질을 언급함으로써, 아버지로 하여금 살아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해주는 여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발견은 확립된 가치와 고정된 윤리의식까지도 문제 삼을 줄 아는 아이의 순진 무구한 유희를 그녀에게서 보게 되며(유희로 가득 찬 인생), 그는 아무런 반론 없이 수긍하면서 만족해하는 구경꾼처럼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더욱이 이 같은 태도의 변화는 그녀에 대한 긍정적 이해로 나아가게 되는 동기가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딸의 통찰력을 수긍하고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실존적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딸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개체임을 이해하는 과정은, 존재의 소유가 어떻게 존재의 긍정으로 전환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기능화된 존재로서 소유대상(혹은 보호대상)은 포기되어야 한다.

이로써 희생의 의미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요된 희생이기보다는 발견을 통한 소유의 (자발적인)포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찬탄과 고통이 동시에 출현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존재의 발견이며 동시에 소유로 굳어버린 자아가 파괴되는 상반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Maggie의 존재뿐 아니라 Adam 자신의 발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유대상의 상실뿐 아니라 소유하려는 자아의 파괴를 의미한다. 견고하게 구성되어 굳어버린 자아를 파괴하지 않고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관계 자체를 문제 삼았을 때는, 뻣뻣하게 굳어서 자리잡은 확립된 가치들 속에서 내면화된 자아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스럽게 관점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James는 희생을 상상적인 해석행위로 이해한다. 그것은 Adam의 (제도적)욕망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여인으로서 Maggie의 존재를 (새롭게)인지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존은 양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교환하거나 환원할 수 없다. 따라서 소유(possess, grasp)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James가 의미하는 바 희생적 지각(직관)이다.

이러한 희생적 지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Henry James는 이것을 시적인(lyric) 언어로만 포착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시적인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정의(define)하거나 분석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물을 양화(量化) 하거나 고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언어는 질료들과 기호들의 발산을 감지하는 언어이다: 예술언어의 질문방식은 "이것은 …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것은 … 어떠한가?"이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예술언어의 표현은 질료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존재를 도덕적으로 수긍하고 긍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본질의)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들(징후들)의 충만한 개별성과 관련되면서 나타나게 된다. James가 현실적 존재들의 관계를 이러한 질료적인 언어로 이미지화하지 않았더라면, 이 장면들이 환기하는 긍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덕적인 주제들은 상상적인 해석과 실존의 긍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문제이며, 상상적 해석과 존재의 긍정은 이미지들(기호들, 징후들, 양태들)과 연관된다. 물론 이미지는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인 섬세함 속에서, 그러한 언어들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다. Maggie의 에피파니처럼 말이다.(의식의 눈뜸; 사랑의 지식)

기호와 인상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개별적으로만 출현한다. 만일에 작가가 동일한 존재나 상황에 대해 다른 용어나 어조 혹은 어구들로 표현했다면(paraphrase), 그 느낌들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윤리적 판단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스타일의 문제는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통찰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하는가의 문제는 무엇을 말하는가의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다(사랑은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뉘앙스와 어조의 섬세한 디테일이 지배적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점 . . . 만일 Adam이 이러한 단어들과 목소리와 어조로 이 순간에 적절하게 잘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 . 그의 조심성과 조용함이 이 성과의 일부를 이룬다 . . . 도덕적 담론의 "뻣뻣한 용어들"로는 . . . 고매한 가치를 무디게 할 뿐이다. 일종의 "민첩한 새처럼" 이 용어들을 유연하고도 유쾌하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 . . 이 가치들을 잃지 않고 다른 말로 쓰려면 다른 작품을 쓰는 도리밖엔 없다. 작품뿐만 아니라 존재와 상황은 언제나 특수하며 단수적(개별적)이다. 그것은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말해 존재는 유일하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구별되며 차이 난다.

그러나 문제는 단수적인 차이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발생하는 정서(기쁨)에 있다. 어느 것으로도 교환하거나 치환할 수 없는 능동적 존재의 발견. Maggie의 실존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Adam의 희생이 슬프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율성으로 채워진 능동적 희생이다: 그녀를 물고기의 이미지로 감지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그녀를 아는 것이며, 그들의 관계(상황)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 관계 속에서 "아무 것도 잃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 . James가 보기에 도덕적 지식이란 단순히 명제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특수한 사실들을 지적으로 소유(grasp)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지(perception)하는 것이며, 전체의 복합성을 보는 것이며, 명료함 속에서 구체적 현실을 느끼는 것이며, 풍부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감지하고 느끼는 활동은 실존의 무한함을 사유의 틀 속으로 채워 넣기 위해 고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가 뿜어내는 관점의 여러 양상들을 가능한 한 잃어버리지 않고 가장 가까이서 음미하는 활동이다. 예술언어는 철학언어보다 더 가깝다. Maggie를 아는 것은 그녀의 분리된 존재, 그녀의 적실성(felicity)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잃지 않는 방식이다. 만일 그가 이러한 반응과 이미지들이 없이 동일한 일반적 사실들만을 포착했다면, 그래서 제도적으로 기능화된 딸로서 그녀를 이해하고자 했더라면, 그녀를 진정으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아버지를 기획된 가치들과 제도가 부여한 역할로서 자랑거리 혹은 일종의 예술품(work of art)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이해함으로써, 도덕적 균형과 사랑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 역시 소유를 포기하는 문제이다: "그의 힘은 곧 그녀의 힘이고, 그의 긍지는 곧 그녀의 긍지이며, 그들은 서로 점잖게 겨루고 있었다. . . . 동등함, . . . 상호작용 . . . 대상의 힘이며 동시에 해석의 힘 . . . 둘 다 긍정됨 . . . 서로를 포기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존엄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 . . 모두 도덕적 위엄을 달성 . . .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서로간의 풍부한 끈을 만들어냄 . . . 도덕적 소통 . . . 유사한 그림을 공유"(153). 여기서 그림을 공유한다는 바가 의미하는 것은 동등하게 같은 세계에서 공존하는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공유가 아니라면 어떻게 동일한 것을 관점들의 차이로 공유할 것인가? 따라서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딸의 것인지 혹은 아버지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 . 이미지와 그림들의 공유; 이미지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속한다. 같은 그림이 각각의 관점으로 스며 듦 . . . 두 의식과 두 관점을 용해 . . . 이것은 그들의 분리와 독립성을 혼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과 주의가, 어떻게 동일하게 창조된 듯 보이는 세계에 서로 다른 두 분리된 개체들을 거주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문제이다(고립되고 단절된 신체들이 같은 세계에서 공존하는 주제).

2.

그러나 이러한 초 감성적 존재들의 도덕성은 원리와 공약 같은 것들이 없다면 자칫 자의적인 내면의 심미적 특질로 과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를 James는 Bob과 Fanny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즉 책임이 없다면 감성적 지각이 얼마나 위험한 유희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각없는 의무가 얼마나 둔하고 맹목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5)

여기서 책임의 의미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진지함이나 문제의 심각함에 대한 통찰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내적인 강렬함과 연결될 것이다. 이미 Adam의 희생의 예에서 보았듯이, 윤리적 책임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억압은 윤리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외면적인 원인이며 동기이기 때문이다. 윤리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 욕망을 끌어내는 방식, 즉 내적인 강렬함을 발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강렬함과 진지함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고, 섬세한 배려들이 가능해진다.

물론 예술적 창조는 자의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들의 의무는 리얼리티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일반적 원리들과 내면화된 규칙들을 배제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정직함을 유지하기 힘들다. 진지함은 원리와 습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원리들은 자의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필연적인 경로들을 통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지각(perception)의 과정은 필연적인 조건(natural reality)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즉흥적인 행위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필연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심포니와 재즈의 예). 즉흥연주를 토대로 하는 재즈에서도 조화의 문제가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특한 개인의 특수성을 조화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연주가 바로 이것이다.6)

어떠한 창조적 행위에서도 역사, 원리, 구조 혹은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에 책임이 있다. 전통적인 문맥을 완전히 벗어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상황에 쉽게 동화되고 변화되는 관점은 James 식의 윤리가 아니다. 확립된 가치들과 체계는 몸을 둔하게 하지만 동시에 삶을 유지하는 조건이 되어 버렸다. 이를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조건들 속에서 선택된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것에 대한 통찰은 요소들에 충실한 것이며, 이것이 또한 진지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Maggie는 아버지를 쉽게 잊을 수 없으며,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 상호간의 조심스러움의 전체 과정은 "바로 그들 사이의 얇은 막이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도 뚫어질 수 있다는"것을 아는 과정이다. 훌륭한 즉흥연주란 이 "예민한 직물"을 보존하는 것이지, 찢는 것이 아니다(156). 재즈 연주가들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가장 윤리적인 섬세한 배려들을 보존한다. 연주가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재즈적 윤리는 내면적인 강렬함과 진지함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내면성, 즉 내적 강렬함으로부터 발생해야 한다(발생적 윤리). 외면적인 악보나 지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이고도 강렬한 내면적 진지함에 의해 주변에 펼쳐진 다양한 형태의 문맥들이 고려되는 즉흥연주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 내적 강렬함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대답을 대신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뻣뻣한 용어들과 동일성으로 고착된 가치들 속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풍부하게 해석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없다면, Maggie와 Adam은 어떠한 규칙과 확고한 공약들이 운용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섬세한 지각이 없는 단순한 의무는 맹목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Bob의 경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구체적 상황, 즉 우리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발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감성적 직관은 언제나 사유와 이성에 앞선다. 우리 자신을 보편성 속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은 게으름을 감추려는 노력이다: 둔감함은(obtuseness) 한마디로 윤리적 실패이다.

3.

이 작품은 반복해서 개별적인 것을 잘 조율해서 지각하는 문제와 규칙이 지배하는 일반적 의무간의 대조적 관계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있다. 나아가 이 두 세계가 각각 독립적으로는 왜 도덕적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① Bob은 규칙과 일반적 개념에 몰두하는 인물; 특수한 것을 무시함; 지적반응의 결여; 즐거움의 부재 . . . . ② Fanny는 극단적 감성주의자; 위험할 정도로 섬세하게 조율된 지각을 소유; 일반적 규칙의 극단적 거부. 따라서 그녀의 상상력은 너무 자유롭고 산만하고 화려하다(157-58). 이 두 대조적인 성격의 인물들로부터 작가가 질문하는 것은 어떤 것이 완성된 인식(fine awareness)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Fanny의 예를 통해 경고하는 것은 규칙과 조화를 거부하는 극단적 감성주의가 자칫 자아 도취적인 환타지에 이를 수 있다는 점, 남편의 간단명료한 사고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감성적 지각 그 자체는 실천적 추론에 있어 자기 충족적인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며, 스타일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며, 도덕적 가치는 내용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성적 지각은 존재의 능동성을 발견하지만, 매우 우연적이며 따라서 그것은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쁨을 촉발하긴 하지만, 우연적이며 수동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 스스로를 반복하거나 (선험적으로)구성하지는 못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론적 사유이다. 이론적 양식(common-sense)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지각이 시작되어야 하는지, 단수적인 것(차이)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또한 이들의 기쁜 경험들을 어떻게 반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지표로 작용한다(기쁨과 반복의 메카니즘. 반복의 이중성).

결국 James는 지각과 규칙의 대화(dialogue)를 통해 어떻게 윤리적 토대, 책임 있는 비전이 구성되는지를 말하고 있다(우연과 필연의 계주관계, 주사위 놀이, 수동촉발과 능동촉발의 관계, 영겁회기). 결국 Fanny와 Bob은 서로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인정하고, 그들의 맹목성이 빚은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도덕적 고통의 "보다 섬세한 의미"를 감지하고, 이것이 남편의 옛 의무감에서 배양된 것임을 이해한다. 반면에 Bob은 그녀가 매우 약한 배에서 위험스럽게 항해하고 있음을 상상한다. 결국 그는 그녀를 위해 "신비로운 연못가에서"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녀가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그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그녀의 옆에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각의 예민한 감성과 이성의 단조로움, 발랄함과 완고함은 모두 삶의 토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나 언제나 전자가 먼저 나온다). 이 둘은 모두 "신비스러운 연못"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혼합은 보편성을 넘어서는 사랑하기에 의해 가능해 질 것이다. 규칙과 지각의 대화는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유지된다. 사랑은 지각의 영역이며 어떠한 도덕적 일치에도 우선한다(사랑은 상대방이 뿜어내는 기호들에 예민해지고, 그 기호들을 특화하는 활동). James는 도덕적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만일 우리가 실제적인 것의 공유된 지각을 얻으려면, 불일치와 질적인 차이들 속에서 우선 사랑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다(불일치 속에서 일치를 경험하는 것으로서 사랑; 금지됨으로써 더 달콤해지는 단절되고 고립된 존재들의 유일한 통로로서 사랑; 사적인 관계, 즉 상대방을 어떤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만드는 관계; 그러나 이 사랑은 잘 짜여진 온전한 기능을 갖는 개인이 아닌 부분적 대상을 특화하는 작용이다; 제도적(통계적)으로 구분된 남/녀의 파괴). 사랑은 정의와 윤리에 앞선다. 다시 말해 사랑은 윤리의 토대이며 나아가 삶의 토대이다.

James가 말하는 "비결(getting the tip)"은 지각과 사랑에 근거한 도덕성 안에서 가능하다. 이것은 추상적인 법의 언어에서가 아니라, 친구의 안내에 의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안내에 의해(단어로, 이야기로, 이미지로), 구체적인 상황의 새로운 면을 보면서 시작된다. "tip"을 준다는 것은 넌지시 실마리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근원과 본질을 질문하는 방식(…은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태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어떠하다)으로 가능해 진다. 스타일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James식의 지각과 행위는 James식의 예술적 산문으로만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존재와 사물에 가장 근접한 방식이다.

비결을 주고받는 것은 추상적 결정론이나 철학적 산문에서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도 우리는 직관적 방식으로 구체성에 도달하지 않는가?(수학적 직관의 경우) 비결을 아는 것은 단순한 기술 습득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규칙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 규칙은 경험적 내면화가 이루어놓은 양상에 따라 성숙해 진다(장인들의 섬세함). 이 과정에서 단일한 하나의 관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관점의 복수들이 내재한다. 마찬가지로, 사물의 질적인 차이들은 특이성을 가지며 비결정적이다. 사물의 특이성과 비결정성은 기호학적 담론의 텅빈 계사(繫辭)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무한하게 감싸여 있는 질료들 때문에, 더 이상 하나의 관점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혼란의 상태를 의미한다(기관없는 신체, 부정사, 지속, 순수시간, 아이온적 시간). 그러나 또한 이것은 새로운 존재가 발생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계기이며 동력이기도 하다. Maggie가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가 Maggie를 무엇으로도 치환 가능한 텅빈 실재가 아니라 꽉 들어찬 질료로 보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존재를 보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는 풍요롭다.

James는 단순히 언어적 재현만을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무언가(something) 설명할 수 없는 어떤(something) 섬세함이 있다("어떤"이라는 말버릇의 징후들). Maggie는 이를 상상력으로 창조적으로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작가의 말들 속에서 적절하게 번역되고 있다. Maggie가 이것을 적절하게 말로 옮겼는가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사실 감성적 지각에는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들은 예술적으로 표현된(putting) 일련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질료들은 예술이라는 그릇 속에 담기면서 육화된다.

4.

그렇다면 철학 텍스트는 왜 중요한가? 문학 텍스트 자체는 다른 도덕적 관심의 개념들과 자신을 분리시켜 구별 짓거나 특화 하지는 못한다. 이성, 사유, 철학 텍스트는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조망하도록 하는 역할을 갖는다. 비판하고 분류하는 작용이 철학 텍스트의 실질적 역할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방자하지 않고 겸손하다면 말이다. "Aristotle이 말하듯이 철학적 설명은 구체적인 특수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겸손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방향을 안내해주는 윤곽 혹은 도안만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삶의 내용은 그 윤곽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텍스트의 동반자로서, 동맹자로서, 제안하고 암시하는 기능으로서"(숲과 나무의 관계)(161). 결국 문학은 삶의 내용을, 그리고 철학은 그것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마치 문학이라는 질료를 담아 내는 그릇처럼.

James에 의하면 윤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창조의 관점에서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근거 없는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란 실질적인 것에 관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보는 것을 다룬다 . . . 그것은 삶의 정원에서 그 소재를 뽑아낸다"(163; James 재인용). James에게 창조는 상대주의적인 것도 자의적인 것도 아니다. James 식의 예술은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창조적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 얽매인 존재, 아무 것도 놓치지 않는(놓칠 수 없는) 존재, 둔하지 않으며 민첩한 존재. . . .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인간 능력의 섬세한 발전; 덜 놓치는 능력. 그래서 더 책임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James가 말하는 도덕적 지각(상상력)인 것이다.

소설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직접적인 삶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삶으로부터 거리 두게 만들며, 이를 지각할 수 있는 윤리적 입장을 갖도록 한다(심미적 자율성). 여기서 우리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발견하며, 선입견 없는 배려와 분별 있는 관계들을 맺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윤리적 판단의 문제는 대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감성적 직관은 가장 대상에 근접하게 하는 수단이다(직접 자료로서의 지속/방법으로서 직관). 대상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판단에서 발생하는 기쁨은 커질 것이다. 대상을 제대로 구체적으로 보지 않고 판단이 가능할까? 이런 이유에서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은 이미 윤리의 테마이다.


1) 이 글은 Martha Nussbaum의 다음 논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Nussbaum, Martha Craven. "Finely aware and Richly Responsible: The literature and the moral imagination". Love's Knowledge: Essay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New York,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p. 148-67. 이 책 전체의 주제가 주로 문학과 철학, 욕망과 윤리 등의 관계인데, 저자는 이 문제를 대립적 관점에서 보기도 하며, 또 이 두 항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는가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를 잘 반영한다고 여겨지는 논문 중 하나인 이 글은 Henry James의 The Golden Bowl(이하 "황금잔")을 다루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논의한다.

2) James의 소설 "황금잔"의 주요 모티브는 Adam Verver와 그의 딸인 Maggie Verver의 복잡한 윤리적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제도적 관계를 넘어서는 실존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처음에 이들은 한번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한 효성과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들은 충만한 부녀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였으며, 한번도 자신들의 제도적 관계를 의심해보지 않는다. 그러나 Maggie가 남편인 Amerigo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효성)이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의 제도적이고 상상적인 관계 자체를 회의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녀관계를 넘어서서 실존적 관계를 고민한다. 그녀에게 Adam의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딸로서가 아닌 동등한 인간적 관계에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남편에 대한 관능적인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어떻게 다르며, 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Maggie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3) 이 장면에서 Maggie는 아버지에게 남편에 대한 관능적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매우 섬세하고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 대해 "가장 깊은 사랑은 질투를 넘어서며, 모든 것을 초월해 버리므로, 아무 것도 그 사랑을 꺾을 수 없다"고 말한다: "Oh, it's you, father, who are what I call beyond everything. Nothing can pull you down"(150쪽; James 재인용).

4) Adam은 딸의 고백을 들으면서 아련히 밀려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이 때 그는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어느 것으로도 포획할 수 없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한다. "찬란한 은빛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물고기". Adam은 이 물고기의 비유를 통해 딸이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와 그늘 아래에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실존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자기자신만의 실존(151쪽).

5) 이 작품에는 Adam과 Maggie 뿐 아니라, Amerigo와 Charlotte, 그리고 Bob과 Fanny가 등장한다. Bob과 Fanny는 서로 대조적인 특징을 띠는 인물들이다. Nussbaum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통해,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철학적 언어와 문학적 언어, 윤리적 사유와 욕망 등의 대립적인 항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고찰하고 있는데, 이 때에 Bob과 Fanny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들이 위의 대립적 관계의 전형을 나타내고 있다고 논의한다.

6) 재즈에서 즉흥연주는 연주자 개인의 자율적 패턴을 모티브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함께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렇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 때에 연주자들간의 관계는 삶 속에서 보게 되는 공약적인 조화와는 차이가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율성을 상대 연주자와의 관계 안에서 통찰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자율성 자체에 위협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즈 연주에서 타자는 방해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아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연주자들은 조화로운 연주에서 나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연주자를 초월한 외면적 공약으로서 악보에 의존하는 연주가 아니라, 연주자들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문맥들에 의해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 아마도 이것이 Nussbaum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발생적 윤리일 것이다.

2007/02/12 23:44 2007/02/12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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