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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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메멘토(memento)』에서 기억과 매체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영화 『메멘토(Memento)』(2000)에서 기억과 매체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작가는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주1) 복잡한 이야기 전개. (1) 시간의 추이를 거꾸로 진행. (2) 과거와 현재를 암시하는 대화, 독백, 이미지들의 삽입이 산만. (3) 단기 기억손실 환자의 진술을 토대로 맥락을 유추해야 한다. 복잡한 구성상의 전개방식 뿐 아니라 인과율에 근거한 이야기 흐름 역시 복잡하다. 보험회사의 보험사기 조사원이었던 레너드(Leonard). 그는 직업상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습관적으로 상대방의 눈빛으로 진실이나 거짓을 판단한다. 그는 과거에 새미(Sammie)라는 한 중년남자가 대뇌 손상에 의한 (물리적) 단기 기억 손실증이 아닌 심리적 단기 기억 손실증이라는 점을 간파하여, 새미의 보험금을 회사가 지불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든 공적이 있다. 그 후 갑작스런 강도사고. 아내의 죽음. 이때 강도와의 격투로 단기 기억 손실증 환자가 된다(물리적인지 심리적인지는 분명치 않고, 또 그가 보험금을 요구한 것이 아니므로 중요치 않음.) 그가 기억하는 것은 행복했던 옛 시절과 사랑하는 아내, 갑작스런 강도의 침입 장면과 아내의 죽음 장면, 그리고 격투로 쓰러지기 직전의 의식. 그 후 그의 기억은 3분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백지상태가 된다. 아내를 죽인 범인(2명중 한 명은 죽었고, 나머지 한 명)을 찾기 위해 그는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기억 장애로 쉽지 않다. 기억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사진과 메모. 모든 기억은 이 사진과 메모로부터 출발한다. 교통사고를 내고 2분 이상 기억을 지속할 수 없는 단기 기억 손실증에 걸린 중년남자 새미. 레너드는 새미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기억손실을 위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조사를 위해 새미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새미의 눈빛은 자신을 알아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레너드는 의학 서적을 뒤져서 기억 손실이 심리적 기억손실과 뇌 손상에 의한 기억 소실 두 종류가 있음을 알아낸다. 대뇌 손상에 의한 기억 손실의 경우 전기쇼크나 자극을 받았을 때 반사 신경으로 경험을 학습한다. 즉 기억이 아닌 본능으로 조건 반사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결국 레너드는 반복적인 전기쇼크 테스트를 통해 새미가 조건반사에 반응하고 경험을 떠올릴 수 있는지를 몇 차례 반복적으로 실험했지만, 새미는 전혀 신체적 고통을 기억하거나 그에 반응하지 못했고, 따라서 레너드는 새미가 보험 사기꾼은 아니지만 대뇌손상에 의한 기억 손실이 아닌 심리적 기억손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육체적 손상에만 관련된 상해보험의 피보험자였던 새미는 심리적 손상일 뿐이라는 이유로 보험금을 받지 못한다. 심리적 손상일 경우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다는 레너드의 말을 들은 새미의 아내는 남편의 기억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인슐린 투약 시간을 조작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편을 시험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자신은 과다 인슐린 투여로 죽음을 맞는다. 레너드에게 사건 조사기록까지 넘겨주고 범인을 잡도록 도와준 형사 테디(Teddy). 그의 본명은 갬맬(John Edward Gammal). 레너드의 기억상태를 악용하는 부패한 형사. 그는 마약거래에 관련된 문제 때문에 지미(Jimmy)를 제거하기 위해 레너드를 이용한다. 지미가 아내를 죽인 범인이라고 테디로부터 전해들은 레너드는 지미를 죽이고 그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 후 자신을 사주한 테디와의 말다툼. 테디는 레너드의 아내가 사고당시 죽지 않았으며, 레너드가 기억하고 있는 인슐린 투약과 관련된 새미 아내의 죽음은 사실은 레너드 자신의 일이라고 말하고, 범인들은 이미 다 죽은 상태이며, 사진과 메모를 통해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충고하지만, 레너드는 테디를 믿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테디의 모습을 찍은 사진에 그를 믿지 말라고 메모한다. 레너드는 지미의 옷 속에서 발견된 메모를 쫓아 어느 술집에서 일하는 나탈리(Natalie)라는 여자를 만난다. 자신의 애인인 지미의 옷을 입고 나타난 레너드가 기억장애가 있다는 점, 그리고 테디의 사주에 의해 이용당했음을 간파하고, 나탈리는 레너드를 이용해 테디를 죽이려 한다. 레너드는 나탈리가 애인을 잃은 슬픔 때문에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고 메모하고 그녀를 신뢰한다. 나탈리는 마약문제로 자신의 애인을 죽인 테디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내를 죽인 범인의 이름과 차번호라고 속여 레너드에게 테디의 본명과 차번호를 제공. 결국 레너드는 기억 장애를 악용한 테디의 사주에 의해 나탈리의 애인인 지미를 죽이고, 이번엔 나탈리의 속임수에 의해 테디를 아내 살인범으로 간주하고 그를 죽이게 된다. 이 작품의 맨 첫 시퀀스는 사건의 인과적 흐름의 맨 끝인 테디를 죽이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후부터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맥루한의 매체론: 매체는 자르고 봉합하는 형식적 운동으로 일정한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지각의 구조를 변형시킨다. 이 과정에서 동질적 전체화. 레너드를 이해하기 위해, 맥루한이 지적한 절단하고 재연결하는 매체의 형식적 운동에 주목하자(주2). 영화 Memento를 매체와 연관시켜 고려할 경우, 작품의 구조를 지탱하는 두 개의 커다란 축: 사진과 메모. 감각적 식별 기호와 상대적 판단 기호로 이루어진 두 축은 레너드의 전체 시간과 관계하며 행위의 조건이 된다. 그가 방문하고 마주치고 포착하는 모든 장소, 인물, 물체는 사진에 찍히고 메모로 저장된다. 실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실적 자료들이 끊임없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레너드의 강박. 모든 틈새들은 메워져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 레너드에게 사진과 메모는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2차적일 뿐이다. 그의 강박과 집착은 하나의 체계에 대한 열망에: “새미도 메모를 했죠. 그러나 그에겐 체계가 없었어요. 나는 그와 다릅니다.” 사실적 자료의 팽창이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하는 편집증적 망상. 체계를 위해 사실들은 한없이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쉽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신체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백지상태의 레너드는 자신 앞에 펼쳐진 사실들에 압도당함. 무엇보다도 그것들로부터는 아무 대답을 얻을 수 없으며, 심지어 기억조차 불가능하다. 그는 이 사실들을 빨아들이고 먹고 싶어진다. 자신의 내면을 감싼 피부에 새긴 수많은 문신들. 레너드가 사용하는 사진의 기능은 상당부분 축소되어 제시된다. 매체 기호학은 사진이 단순히 사실의 기록을 보증해주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나 문화적 코드를 함유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주3), 레너드의 경우 이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한다. 그는 사진 제작자도 아니며 이미지 덩어리에 자신의 특별한 관점을 투입하는 예술가도 아니다. 그에게 사진은 단지 사실을 보증해주는 일종의 증거물 또는 기념물일 뿐이다. 일차적 의미에서 사진은 존재와 역사를 냉동하고 거기서 모든 장소와 시간을 하나의 박제로 만들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믿었던 과거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확증한다(바르뜨는 이를 이상한 환각기능이라고 불렀다). 언어가 현재를 미래와 연접하거나 미래로 지연시킨다면, 사진은 현재를 과거와 이접하고 그 속에 고착하게 한다. 사진이 종종 물신에 비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그것은 현재적 감각이나 인간적 지각과는 관련이 없는 가운데 대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비록 사물의 형상만이 고스란히 남아 질적 본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이라고 해도, 어쨌든 사진은 존재를 확증(논증이나 예증이 아닌)한다. 이것이 레너드의 관점이었고, 이 관점에 충실하고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던 것이다: 테디의 사진, 나탈리의 사진, 도드(Dodd)의 사진, 자신이 묶고 있는 호텔의 간판 사진, . . . 사진에 관한 기호학적 지식이 없어도 그는 그 매체의 본질에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인지의 기능만을 겨우 취할 뿐 어떠한 판단도 제시해주지, 심지어 정보조차 그 근거를. 사진에 의한 레너드의 지식은 2차원적 사영(寫映)이주는 무색무취 빛의 이미지의 순간적 인지일 뿐. 레너드가 두 번째 범인까지 죽이고 아내의 복수를 완결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테디가 찍어놓은 사진이 좋은 예이다. 레너드는 그 사진을 몇 차례 보았지만 거기에는 복수완결에 관한 어떠한 Index도 없었으므로 그 무엇도 도출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행위와 윤리의 규준이 되는 다른 매체가 필요: 레너드 자신의 메모. 그는 모든 추리와 판단을 메모에 근거하고 그 자신의 메모를 신뢰한다. 이 우스꽝스러운 순환논법을 힘차게 딛고 일어난 그는 더 이상 칠흑 같은 빛의 어둠 속에 휘감긴 물질의 모호함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중화된 이미지에 색채를 가미하고, 혼란스러운 스프상태에 윤리적 지평을 펼친다(한편, 자신의 동일함을 확인해 줄 자신만의 필체가 필요했다). 야만스러운 물질의 건망과 사실의 급류로부터 벗어날 것! 문화주의적 본성의 출현. 무의미하고 지각불가능하여 생포하기 어려운 모든 것을 포로로 취할 것! 그리하여 자신의 능력에 상응하는 선취 가능한 부분들을 선별하고 소유할 것! 형식으로서의 절단. 은판이나 감광판에 물질-빛-흐름을 가두고 절취하는 일 만큼이나, 레너드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빛-시간을 흰 백지 위에 투사하여 잘라내는 일. “사실1: 남자, 사실2: 백인, 사실3: John G가 아내를 강간하고 죽였다, . . . 사실5: 마약거래와 관련, 사실6: 차번호 SG137IU . . . 나탈리의 사진: 연인을 잃고 동정심에 나를 도우려는 여자, 테디의 사진: 그의 거짓말을 믿지 마라, 범인이다, 죽여라.” 작품 전체에 걸쳐 메모가 제작되는 과정 혹은 순간에 주목하자. 나탈리에 관한 연민에 찬 메모는 언제 작성되었나? 테디를 거짓말쟁이라고 믿은 것은 언제인가? 또 다른 형식으로서의 재 연결이 나온다. 테디와 나탈리의 사진에 적힌 레너드의 메모는 범인을 지목하고 살인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인과적 흐름의 단절과 연결에 중요하다: 두 개의 메모는 논리적 도약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과 추리에서 행동으로의 도약. 그리고 레너드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의 반영. 레너드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은 자료들 간의 논리체계가 아닌 선택적 도약. 그러나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되어 빛으로의 도약은 오히려 그 자신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회로망에 가두어 버린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범인을 찾아 복수하는 레너드의 복수극이 아니라, 복수라는 거꾸로 된 이미지를 세계에 투사하여 이를 실현하기 위해 범인을 발명하는 사회 심리극 혹은 X-파일류의 변형된 탐정극. 레너드는 자신이 서 있거나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는 지반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산한다. 자신의 엄지발가락을 손으로 높이 받쳐 들고 공중에서 부유하고 있는: “너는 네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는 놈이야!” 이 아이러니는 필연적으로 사건들의 맨 처음 즉 도약의 지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논리적 연쇄와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기 위해 도약의 지점으로의 수렴과 퇴행의 반복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작품의 시간순서는 도치된다. 이 작품이 매체를 기억과의 관계에서 직접 고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소 복잡하다. 브로디(Florian Brody)는 매체를 기억과 동일시했지만, 그의 글이 전체적으로 모호한 것은, 그가 매체를 두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편으로 매체를 기억의 저장소라고 단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창조적이고 구성적인 행위와 관련을 짓는다. 제목을 위시하여 여기 저기 많은 구절들 속에서, 매체를 개인의 연장으로(Brody 136), 인공적인 것으로(140), . . . 기억의 일부이거나 그 연장으로, 심지어는 기억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매체(활동)를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행위와 연결한다: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글쓰기(135), 웅거(Gerald Unger)가 쓴 “텍스트를 읽는 것은 그에 관한 자신의 텍스트를 만드는 일이다”의 인용(138), “상상의 집”(142) 등. 물론 그의 논의는 주로 Text 매체에 편향되어 있긴 하지만, 그의 논의에서 매체가 어째서 기억이며 창조활동의 그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둘러 말해, 결국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매체는 물론 기억의 저장소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말했듯이(143), 매체는 내적 기억체계를 외적인 기억 테크놀로지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체계가 기술로 변질된다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Writing을 위험하다고 간주한 이유이다). 심상이나 관념을 사멸시키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글로 쓰거나 그려놓아야 한다. 육체의 물질적 한계는 두뇌와 지각의 양적 역량을 제한하기 때문에, 그것이 연장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의 부착 혹은 연결을 필요로 한다. 단순하게는 펜과 붓 혹은 광학기계를 비롯하여 그 밖의 첨단 테크놀로지. 레너드가 의존하는 사진과 메모가 이와 같은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매체는 또한 창조적 활동과 관계가 있다는 지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브로디의 논의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기억과 창조의 관계를 단순화하여 기억 자체의 문제로 전환할 수가 있다. 작품의 전체 방향을 최초의 메모 시점으로 퇴행시키거나 영상 조작을 이용해 객관성의 계열에서 주관성의 계열로 축소하는 경향 즉 문제의 초점을 자료들의 축적과 배열에서 해석과 도약의 문제로 압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브로디가 서두에 인용한 프루스트의 다음 구절을 보자(참고로, 이 구절을 포함한 글의 제목에서는 매체를 물신과 관련짓는다). 나는 오래 전에 일찍 잠에 들곤 했다. 가끔 촛불이 꺼지고, 내 눈은 너무 빨리 감겼으므로, “지금 잠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반시간쯤 후엔 잠을 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잠에서 깬다. 덮어놓았다고 상상했던 책이 아직 내 손에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촛불을 불었다. 잠이 드는 동안 나는 지금 막 읽었던 것에 대해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이 생각들은 오히려 특별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쓴 책의 저자라도 되는 듯이: 교회, 사중주, 프랑스와 1세와 찰스 5세의 경쟁 . . . 등.(135)
화자(마르셀)는 지각경험의 촉발 혹은 연상적 기억의 이미지 파편을 통해 과거의 사실, 장소, 역사적 사건을 떠올린다. 이 기억은 현재 화자의 중추신경계를 물리적으로 직접 자극하는 것으로서의 현실은 아니지만, 그의 삶 전체와 의식의 흐름 안에서 잠재적으로 축적된 실재이다. 그의 존재성 자체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실재의 구성이다. 특별한 감각 징후들의 촉발에 의해 그는 일생을 짊어지고 다니는 이 시간을 낯선 지각을 마중하기 위해 혹은 경험을 해석하기 위해 현재에 펼친다. 그러는 가운데 이 파편들은 그의 삶의 필요에 따라 혹은 육체가 원하는 바에 따라 봉합될 것이다. 기억이 곧 창조적 활동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파편들의 하나의 전체로의 도약. 따라서 마르셀과 레너드는 서로 반대의 경향을 취한다. 마르셀의 경우 스스로 보존하는 실재적 과거가 현재 쪽으로 나아가면서 지각-현실을 구성하는 반면, 레너드는 현재적 지각에 가까운 자료들의 축적과 체계를 빌어 비실재적 과거를 종합한다. 미리 결정된 도약으로부터의 허구적 기억의 종합. 이것이 두 의식적 존재의 직접적 자료로서의 지속과 간접적 자료로서의 테크놀로지의 차이가 아닐까? 물론 레너드의 단기기억 손실증이 과거 자체의 상실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새미의 사건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오히려 심리적 혹은 물리적 장애에 속하는 문제이다. 심리적 장애가 무의식적 실재로서의 과거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물리적 장애는 주관적 실재로서의 기억과는 그 본성에 있어 무관하다. 과거를 실재성의 수준에서 보아야 한다면 우리는 심리적 과거 혹은 두뇌-물질이라는 함정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푸르스트가 객관주의적 해석에서 맛보았던 실망(가령 콩쿠르 형제)과 이를 보상하기 위한 주관주의적 연상(가령 베르고트) 모두를 비판했던 것은, 그것이 대상과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자의적인 만족에 쉽게 안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너드의 문제는 과거의 실재성이 아니라 그 구성의 관점에서 제기된 것이다. 그가 체계를 통해 완성하려는 과거는 기억상실증에 의해 심리적 혹은 물리적 현실로부터 배제된 시간의 온전한 반환이 아니라, 마치 탐정이 범인을 식별하기 위해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떠한 가상의 상황, 마르셀의 실재적 과거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추상화된 상황에 다름 아니다. 한편에는 실재적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진화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현재적 지각으로부터 비실재적 과거로의 퇴행이 있다(주4). 조각과 파편의 종합 혹은 전체로의 도약이 창조활동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종합과 체계는 레너드 역시 집착하고 있는 문제이며,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마르셀의 실재적 과거와 레너드의 추상적 과거의 본성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실재성은 창조활동의 본성적 차이를 낳는다. 한편 레너드의 경우 창조활동과 기억의 분리. 그에게는 마치 기억 외에 기억을 결합하고 배열하는 다른 체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점액질의 아교처럼 기억은 주관적으로 침전된 시간 전체로서 증식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축적되는 그의 시간은 우주의 팽창과도 같은 인생 전체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는 과정으로, 모든 흔적이며 그 자체 시간 전체의 흐름으로서, 이것이 마르셀의 실재적 조건인 가운데, 시간의 실재성은 마르셀을 매순간의 변형(becoming)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한다. 불변의 일자가 이미 현존하고 여기에 변형된 시간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기억의 공존 속에서 생물체의 호흡과도 같은 그 자신만의 독특한 현재적 수축과 과거 쪽으로 흐르는 이완이 그의 존재를 지속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를 매순간 다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시간 전체가 무엇인가로 가득 차있는 가운데 그것은 하나의 시간이면서도 동시에 다양성의 새로움을 되풀이 한다. 이 점액질의 시간은 자의적 절단과 봉합이 가능한 물리적 수로 추상화된 시간을 실제적 지속으로 대체한다. 지속의 관점에서 마르셀과 레너드는 본성적으로 다르다(물론 단기기억 손실증의 레너드가 지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므로 명목상으로만 그렇다). 지속은 기억이며 존재 자체이다. 또한 지속으로서의 존재는 매순간 그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셀은 책을 읽거나 잠이 드는 순간에도 현재적 지각을 마중하는 중(촛불, 밤, 잠)에 자신의 과거를 빨아들이고 내 뱉으면서 지속하는 전체의 시간을 생산한다. 독서와 그 내용의 재현을 되풀이하는 순간조차 그는 이미 저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반복에 불과한 레너드의 체계와 그를 보조하는 매체는 지속할 수 없고, 시간 전체를 보존하거나 구성할 체계의 ‘힘’이 없어 보인다. 지속으로서의 기억은 일련의 운동인데 레너드의 모든 조건들은 절단되고 불연속 할 뿐만 아니라, 불연속의 간극을 채워줄 그 어떤 지속의 이미지로부터 배제되어, 분할된 공간에 갇혀 동질화된 시간 속에서의 위치상의 혹은 정도상의 변화 속에서, 실질적인 주관성의 운동 혹은 질적 변화를 생산하지 못한다. 이는 유기적 휴머니즘과는 관계가 없는데, 브로디가 매체를 기억과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저장과 보존의 측면에 관련짓고 다른 한편 변화의 측면에 관련지음으로써, 그것을 테크놀러지 이상의 존재성 즉 기억을 기능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레너드는 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는 기억과 매체를 정도상의 차이로만 구별하여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체하고자 했다. 정신을 물질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려는 이 미국식 기계론에서, 우리는 아주 오래된 고전주의적 오류들, 즉 하나의 기능을 그 기체(機體)로부터 분리하여 기능적 유추를 통해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체하는 식의 존재와 기능의 혼동을 본다. 기능의 양적 재현이며 그 현실화인 테크놀러지가 존재를 수의 사이버네틱 회로와 그 표상 안에 고착시키는 것은 이 혼동에 기인한다. 감독은 매체와 기억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재적 지각 능력에 사로잡힌 레너드를 매개로 하여 이 둘을 교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보다 근본적으로는 기억을 테크놀로지나 물질의 기제로 환원할 수 없음을, 그 둘을 치환한 체계 속에서 어떤 존재가 탄생하는지를 예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맥루한의 논의처럼 매체의 형식적 운동으로서의 절단과 재연결 사이에는 불연속의 종합이 개입한다. 매체에의 노출이 자연적 지각의 변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은 종합의 차이 혹은 불일치에의 예견 같은 것이었다. 결국 존재의 경험적 조건들이 기능적 단일성과 동질적인 것으로 묶여 사실들의 추상의 조합으로 남게 될 것이다. 신문이나 책에 옮겨놓은 우리의 직접적 경험들이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한편 레너드의 고고학적 운동을 기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파편적인 지각들로 흩어져버린 레너드의 조건 하에서(“너는 내가 준 사건 기록조차도 여러 장이나 바꾸고 없애 버렸어! 왜냐구? 퍼즐 놀이를 하기 위해서겠지!”), 축적과 체계에 집착하는 그가 기억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는 기억이 사실을 저장하거나 보관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실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새로운 재료들을 채워 넣는 행위라고 일축한다. “기억은 배반이다.” 그의 불만은 기억이 보존이 아니라 변질로, 진화하고 증식해가며 그 자신까지도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는 인식에 기인한다.(주5) 확고한 증거로서의 기술매체와 단단한 기계적 체계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레너드의 체계의 실천 속에서 기술매체가 기억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실재하는 시간은 본성적으로 물리적 시간 체계 이상의 운동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사실적 자료들의 불연속, 선험적 체계에의 강박, 다가올 시간을 위해 보존되거나 연속하거나 운동하지 않는 부분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기억과 존재를 허구로 만들어 놓았다. 이 영화는 매체에 대한 연구이자 그 심층에 있어 사유의 한계를 질문하는 작품이다. 매체는 우리 자신이다. 맥루한 아니 블레이크의 선언처럼,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한편 이 작품은 기술매체주의에 대한 냉소가 있다.(주6) 복수라고 믿고 있는 살인을 끝내고 피에 물들어 환희에 차 있는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백치와도 같은 순진한 눈빛의 레너드를 담아놓은 사진에 투사된 작가의 연민 같은 느낌이 이 작품에 있다. 레너드는 매체에 의해 가공된 하나의 실험이며, 메시지 창안에 대한 강박증이며, 스스로 메시지가 되고자 한다(신체에 각인된 문신들). 그의 심리적 혹은 물리적 조건으로서의 단기 기억 손실증은 작가가 사유의 두 방식에 가하는 비판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지각 자료들을 꿰매기 위한 미리 결정된 선험적 직관형식으로서의 움직이지 않는 초월적 시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단되어 연속하거나 운동하지 않는 자료들의 양적 단절. 전자에 대한 비판이 추상적 시간론에 향해있다면, 후자는 기계적 결정론에 향해있다. 그리고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기억 상실이 아닌 기억 손실이라는 설정을 통해 기억에 관한 논의에 있어 지속의 의미를 복습하고 있다.(주7) 베르그송적 궤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주1) 그렇기 때문에 매체나 기억에 관한 각론으로 파고들어 그 두 주제 자체를 논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밝혀둔다. (주2) 맥루한의 매체와 지각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McLuhan 7-23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3) Lasica나 Barthes의 경우 사진은 단순히 사실의 기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축적인 메시지가 있음을 언급한다(특히 디지털 매체를 보라). 사진은 생생한 자연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가치중립적 장치인 것 같지만(그래서, 법정에서는 사진자료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한다), 여기에도 물론 코드화된 공정 과정이 개입된다. 사진 제작자의 의도는 물론 문화적 메시지, 즉 사진매체에는 이미 하나의 관점이 있다. 맥루한이 메시지와 관점이라는 술어를 크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의 기호학적 분석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Roland Barthes(1977), Struart Ewen(1988), J. D. Lasica(1989)를 참조하라. (주4) 레너드의 경우를 물신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신주의는 고착적이고 퇴행적인 측면이 있지만, 이것이 레너드가 물신주의자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혹은 분명치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물신들이 환타지를 열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5) Ridley Scott의 Blade Runner(1982)는 테크놀러지에 의한 기억의 복제와 조작이 어떤 존재를 만들었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주6) 소박한 접근이긴 하지만, 기술매체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맥루한이 계속해서 감각적 경험의 문제를 언급하는 대목을 주목하자. 나탈리가 레너드에게 사고 이전의 아내를 기억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는다. “미세한 순간들을 합치면 새살이 돋듯 그녀의 숨결까지 살아나. . .” (주7) 이 작품에서 새미(Sammie)의 경우는 왜 중요한 것일까? 우선 레너드는 새미의 기억손실을 육체적 원인과 심리적 원인으로 분할하여 파악함으로써 문제를 쉽게 풀어갔다는 점을 기억하자. 참고문헌 Bergson, Henri. Matter and Memory. trans. Nancy Margaret Paul and W. Scott Palmer. London: George Allen&Unwin Ltd., 1911. ______. Creative Evolution. trans. Arthur Mitchell. New York: Macmillan &Co., 1944. ______. Duration and Simultaneity. trans. Leon Jacobson. Indianapolis: Bobbs-Merrill, 1965. Brody, Florian. "The Medium is the Memory". The Digital Dialectic. ed. Peter Lunenfeld. Cambrige: MIT Press, 1999. Deleuze, Gilles. Bergsonism. trans.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Zone Books, 1997. Ewen, Stuart. All Consuming Images: The Politics of Style in Contemporary Culture. New York: Basic Books, 1988. Lasica, J. D.. "Photographs that lie: The ethical dilemma of digital retouching". Washington Journalism Review, June. 22-25, 1989.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08 October 201105 October 201122 October 200912 October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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