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Changes - Search:

Medianote


Main

Literarystudy

Literarynote

Blog

Recently Written

Recent Comments

edit SideBar


Mcluhan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왜 미디어는 메시지인가?

기술 매체는 두 방향의 형식적인 운동을 통해 작동한다. 우선, 그것은 연장(延長)의 속성을 갖는 덩어리를 절단한다. 기계 테크놀러지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매체의 절단 기능은 외면적 방식으로 수행된다. 예로, 자동화된 기계는 사물의 본성과는 관계없는 방향을 따라 대상을 절취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결을 잃어버리고, 절단의 외면적 운동과 그 힘의 규격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지지 않고 잘릴 뿐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적 공간은 기하학을 재현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현대적 표현은 바로 이 힘에 대한 역기능으로 일관되어 왔다. 둘째로, 매체는 절단된 것들을 다시 연결하여 일련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이로써 하나의 자동화의 메커니즘이 출현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자동화는 자연적 인과성을 결여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메커니즘의 요소들은 이미 외면적인 방식으로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연된 관계를 갖는 잘려진 것들이 특정한 연속을 띠기 위해서는 이들의 간극이 얼마나 최소화되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 매체의 관건은 거리와 간극의 최소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간은 이제 속도로 대체되고 공간은 이를 압축이라는 형식으로 표상한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조차도 지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공간화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대의 미적 표현에 있어 선(線) 특히 직선은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현대의 기술매체는 사물의 유기적 연장을 불연속의 연쇄로 치환하고, 이 외삽으로부터 생기는 간극과 균열은 속도의 최대화에 의해 봉합된다. 물질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서의 생산기계의 자동화는 배치와 순차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공간의 활용, 즉 속도의 최대화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나아가 대중 매체나 컴퓨터와 같은 전자매체가 활용되면서 이 간극은 제로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공간으로부터 시간성이 완전히 제거됨으로써, 세계는 이제 선분이 아닌 하나의 점의 상태가 된다.

매체는 사물과 현상들의 불연속적 연쇄를 만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우리의 지각패턴을 동시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우선 그것은 감각능력들의 종합적 활용을 요구한다(멀티 미디어를 보라). 나아가 그것은 공간적 거리를 종합함으로써, 이 거리에 상응하는 신체 경험의 간극을 현재적 상태로 만든다. 여기서 공간지각은 매체의 속력의 증감에 의존한다(승강기나 자동차를 보라). 또한 매체는 시간적 차이 역시 무한한 현재 속으로 체포해 버린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순간이며, 우리의 지각에 포착된 모든 사물들은 일종의 에테르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사물의 연쇄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물질적 두께가 제거되고 나면, 다시 말해 지각의 동시성이 발생하여 물질의 운동에 상응하는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자연적 인과성이 절연되어 요소들 각각 자신 안에 어떠한 것도 내포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던 연쇄 메커니즘은 또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단순한 시간상의 연쇄가 이제는 인과성을 갖는 새로운 내용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맥루한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보자: "가장 위대한 반전이 전자성(electricity)과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사물들을 순간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연쇄를 없앤다. 그리고 이제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마치 연쇄나 조작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것처럼, 사물들의 원인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McLuhan 12). 하나의 관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맥루한이 언급한 영화매체나 큐비즘도 역시 분절과 연속의 메카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이것은 특정한 형식의 인식활동을 만들어낸다. 큐비즘의 발생 시기와 근사(近似)한 영화매체는 분할된 컷들의 단순한 기계주의를 넘어 일종의 구조적 환각을 생산하는 장치가 된다.

기술 매체의 운동이 연결이나 이동인 것만큼이나 그 심층에는 절단과 절연이 있으며, 그들간의 재 연결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유활동이 있다. 그런데 자르고 봉합하는 종합형식이 동시성을 띠면서, 매체는 세계를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 치환해 버린다. 이러한 매체의 급진적인 변화는 경험 능력들을 신체로부터 박탈하여 그 자신이 대리자가 된다. 매체는 일종의 신체가 되는 것이다. 매체가 인간의 감각능력을 비롯하여 신체일반의 확장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가상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물질성을 벗어버리고, 과거였다면 반드시 자연적 조건들과 결합함으로써만 현존할 수 있었을 실재성을 그 자체 순수회로로 변형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효과의 실재만으로도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연장하고 확장시킬 수가 있게 된다.

맥루한의 관심은 바로 이 매체가 갖는 통합체적인 특성에 있었다. 모든 계열을 합목적성을 띤 사이버네틱 회로망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실체가 되는 힘. 그는 이 힘이 질료적 경험을 축소하고 추상적 견해와 반응만을 유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주1). 그는 매체가 모든 부분들을 종합하는 원리를 허위적 연결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허위적인 이유는 인식의 실질적 조건인 감각과 지각을 불균형적인 상태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차적인 문제는 매체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관념이나 동의보다는, 매체가 이미 갖춘 추상적 운동에 의해 동질화되는 감각과 지각의 패턴들이다. 감각에서 사유로의 이동이 아니라, 동질적인 추상관념으로부터 감각으로의 이동으로 순서가 역전된다: "기술의 효과는 여론이나 개념의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서히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패턴을 바꾸어 놓는다. 진지한 예술가만이 오로지 형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기술과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감각의 변화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McLuhan 19).

단일한 회로로 동화된 신체로부터 우리 자신은 자연스럽게 행위나 관념 뿐 아니라 삶 자체를 단일성과 전체성의 효과 아래로 집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매체는 이미 그 자체 하나의 신호이며 메시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응하고 행위하고 사유하도록 강요하거나 권고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자신의 반응이며 행위이며 사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체는 이미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거나 나쁘지도 않은"(11) 것으로서 사용이나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윤리를 결정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주1)
"토인비는 영매화(etheri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매체의 변형적 힘을 논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기에는 모든 조직이나 기술에서 진보적 단일화와 능률의 원리이다. 대체로 그는 이 형식들이 우리의 감각적 반응들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한 사회에서 매체와 기술의 효과와 관계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적 반응이며, 인쇄기술의 결과는 우리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성이 발달하고 동질화된 사회 속의 인간은 다양한 것과 불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민감해지지 않으며 감각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3차원의 망상을 통해 자신의 나르시스적 고착의 일부로서 '비밀스런 관점'을 갖게되고, 블레이크나 다윗왕이 간파했던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경구와는 담을 쌓는다".(McLuhan 20)

인용문헌
McLuhan, Marshall.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 New York: McGraw-Hill, 1964.

2006/10/18 03:25 2006/10/18 03:25

Edit - History - Print - Recent Changes - Search
Page last modified on November 30, 2010, at 11:45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