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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거리

1.
인간의 내면은 웃음이나 폭소와 같은 비 논리적 표현에 의해 파괴적 계기를 갖는다. 자아의 현실원칙 아래에 구조화된 내면성의 질서들은 인간 본성의 극단적 형태의 분출을 통해 확립된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울음이나 분노 열정 등과 마찬가지로 웃음과 폭소는 한편으로는 파괴적 본질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형성적 힘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괴적 본성과 생산적 힘이라는 두 극단적 계기가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웃음과 폭소는 일종의 변태성(perversity)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의미와 본질에 집중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던 베르그송(H. Bergson)은 웃음이라는 변태성을 선택하여 이 과정을 논의했으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흐친(M. Bakhtin)은 소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웃음에 대한 짧은 견해를 언급한다. 바흐친의 경우 소설은 특정한 양식으로 정리된 장르이기보다는 무정형적 특성으로서 구 장르의 파괴와 새로운 장르의 생산이 가능해지는 계기로서 논의된다. 그렇다면 확립된 질서에 의해 구조화된 내면성을 파괴하는 계기로서 비논리적인 웃음의 열정과 변태성 속에 내재하는 일반적 구조와 법칙은 없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글이 질문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웃음과 그것의 발생적 구조 또는 효과에 관한 논의이지만, 보다 심층적으로는 파괴적 계기와 생산적 계기를 동시에 갖춘 잠재태로서 변태성의 일반적 구조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2.
희극성에 관한 독특한 한 논문에서, 베르그송은 웃음에 관계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제시했는데, 이에 따르면 웃음은 자아의 반성적 기제로서(웃음은 반성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하며 또한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무감동(insensibilite')으로부터 환기되는 효과로서, 그리고 사회적 양태로서 공범의식(웃음은 일정한 사회적 코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을 갖는 등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구성 요소들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웃음이 무감동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점이다.

베르그송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웃음에 통상 수반되는 무감동에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 . . . 무관심은 희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천연의 장소이다. 웃음에서 감정보다 더 큰 적(敵)은 없다. . . . 감수성이 예민하고, 삶과 자신을 일치시키면, 희극성이 사라진다. . . . 공감의 최대화는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하며, 모든 것이 준엄한 색채로 보이며, . . .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으로 삶을 보면 . . . 모든 것이 희극적이다. . . . 장중함으로부터 익살스러운 것으로의 이행 . . . 희극성은 순수한 지성에 호소 . . ."(베르그송 14).

무관심은 자아가 대상에 대해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거리(distance)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적 거리이기도 하며 외적인 거리이다. 따라서 희극성은 자아와 관련된 의식과 지성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기 반성적인 거리를 취함을 의미한다. 웃음은 한마디로 말해 자아가 자기자신(혹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가능해진다.

베르그송이 웃음의 구조를 정식화하면서 한결같이 두 차원의 존재양식(기계적인 것/영혼적인 것, 경직된 것/유연한 것, 반복적인 것/변화하는 것, 지속/물질, 질료/형상 등)을 구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에 의해 뻣뻣해진 육체의 경직성과 유연성을 요구하는 상황의 불일치의 경우(17), 곱사등이처럼 신체의 고질이 되어 습관화된 모양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의 경우(28), 감지되기 힘든 움직임을 파악하여 확대함으로써 "형태의 표면적인 조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물질의 깊은 반항을 간파해 내고 . . . 여러 형태의 부조화와 변형들을 현실화하는" 풍자화가의 경우(30), 옷과 몸의 부자연스러운 조화 아래에 잠재해 있는 딱딱한 옷과 유연한 신체의 불일치와 대조(39), 움직임과 변화를 계속하면서 유연함을 추구하는 사회와 기존 질서의 판에 박힌 상투적 의례들 간의 충돌과 단절의 경우(44) 등의 예들은 모두가 질료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의 불일치, 그리고 유연한 것과 경직된 것의 조화롭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웃음의 근거들이다(주1). 그리고 웃음을 유발하는 이 불일치와 부조화의 근간에는 자아가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분열된 양상을 띠게 됨을 보게 된다.

3.
베르그송의 논의에서 보게 된 두 차원의 존재양식으로 구성된 웃음의 구조를 종합해 보면 심층과 표층이라는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심층은 물질의 깊은 심연에서 정체되어 하나의 구조와 본질을 이루고 있는 반면, 표층은 물질의 표면에서 우연적이고 유동적인 현상을 이루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존재의 두 차원을 정신과 물질로 치환해서 이해한다. 구조와 본질을 이루는 심층은 주관적 관념의 양태이며, 우연적 현상을 이루는 표층은 물질의 양태인 셈이다(물론 이 둘의 대당 항을 바꾸어서 묘사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따라서 한 편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규칙적인 패턴의 반복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끊임없이 흐르며 매 순간 차이나는 지속(duration)이 있다. 이들은 시간의 두 차원으로서, 전자의 경우 주관적 형식의 범주로서, 후자의 경우 물질의 양태로서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물들은 주관적 관념의 형식에 의해 공간적 범주에 고착되기도 하며(뻣뻣이 경화되어 반복적인 패턴을 이루는 것들은 운동의 형식이 공간화된 시간에 고착된 예이다), 물질의 양태로서 변화하는 경험적 시간 속에서 무정형적 성질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이때에 시간은 변화하는 상황에 의해 체험된 시간이다).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심층과 표층의 두 분리된 시간은, 심층의 경우 의도되거나 기억된 내용을 이루며, 표층의 경우 주체의 의도와 기억과는 단절되어 물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두 존재양식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웃음은 주관적 관념과 물질의 지속간에 일어나는 충돌과 관계가 깊다. 기계적으로 뻣뻣하게 경화되어 습관화된 외양과 몸짓 등이, 그 반대적인 것으로서 유연하고 자유로운 운동이나 변형과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어느 것이든지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신과 물질의 독특한 관계가 출현한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은 생명이 없는 물질과는 연결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유로운 정신과 그렇지 않은 물질의 분리된 관계는 우리의 관념이 고안해낸 기본적인 이분법적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둘로 분할 된 두 차원의 존재양식은 안정적 구조 속에 자리를 잡고 각각 자연스러운 영역에 위치하게 된 셈이다. 분리된 관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정신과 사물은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안정된 구조에 고착된다. 그런데 웃음이 발생하는 순간 이와 같은 안정된 구조는 즉시 파괴되어 버린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어 안정된 구조가 파괴되면서 웃음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양식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우리가 믿고 있거나 의도하고 있는 안정된 구조가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분리되어 있다고 믿었던 정신과 물질 혹은 생명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단절된 관계가 파괴되면서 웃음이 나온다. 다시 말해 웃음은 우리가 믿고 있었던 관념(정신과 물질의 분리된 관계)이 그것에 반(反)하는 이질적인 양태(부조화로부터 나오는 우스꽝스러움)에 의해 도전을 받으면서 나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신념은 부지불식간에 물질의 변화와 변형으로부터 파괴되면서, 한편으로는 웃음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긍정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의도된 것이 뒤집혀 지거나 우연한 파격(solecism)에 의해 웃음이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질은 우리의 사유에 의해 조화로운 질서를 띠게 된다. 주체의 이상과 신념은 무질서한 물질의 세계에 특정한 형식을 부여하면서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형식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물질의 반항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 때에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불일치와 부조화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조화의 순간이 바로 정신의 반성적 계기이다. 반성적 계기를 통해 정신은 세계에 부여하였던 주관적 형식의 실패와 파괴를 경험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주체의 역사는 이상적 망상과 이 망상의 파괴라는 패턴이 진행되면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가 여러 다양한 형태로 증식되거나 변형된다.

이와 같은 두 계기들이 나타났다가 파괴되는 과정의 사이사이에 바로 반성적 계기들이 출현하는 것인데,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반성적 계기의 두 가지 경우가 아이러니와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반성적 기제로서 아이러니와 유머는 서로 유사한 발생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와 유머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언제나 심층적인 것(신념, 의도, 이상 등)과 표층적인 것(물질, 현실, 현상, 리얼리티 등)의 단면화된 불일치를 보게 된다(주2). 따라서 문제는 주체의 관념에서 일어나는 망상과 망상의 실패를 경험하는 반복적인 패턴과 이 연속적 패턴의 단절의 순간에 있다. 웃음이 유발되는 조건으로서 반성적 계기는 이상과 신념에 도취된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단절하는 순간에 있는 것이다. 이때에 정신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필요로 한다. 웃음이 유발되는 구조적 조건으로서 정신과 물질의 불일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조건이 바로 이 거리이다.

현상들이 불일치하거나 조화롭지 않은 면모를 보면서 그것의 우스꽝스러움을 간파해 내고 웃는다는 것은, 그 현상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두 양태 모두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웃음을 아는 존재는 자아를(혹은 자아가 바라보는 대상은 물론이고) 저 편에서 볼 줄 아는 존재이다. 예술에서 감정이입은 거리를 최소화함으로써 자아가 획득하는 지고한 감정의 나르시스적 순화인 반면에, 웃음은 거리의 최대화를 통해 대상을 포함해서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비판적으로 결별하는 통찰이다.

4.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 관한 바흐친의 매우 긴 에세이에서, 웃음에 대해 베르그송과는 전혀 다른 논의를 보게 된다. 여기에 그 긴 인용문을 한번 옮겨보자:

". . . 이 장르[소설]들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기원은 거리를 없애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의미에 있다: 이들은 민중적인(대중적 웃음)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서사시적인 것을 파괴하는 웃음이며, 모든 위계적인 거리(거리를 둠으로써 고착시키기)를 파괴하는 웃음이다. 하나의 주제가 거리를 갖는 이미지로 등장하면 웃을 수가 없다; 웃기려면,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를 웃게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옆에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며, 모든 희극적인 창작물들은 최대한 근접한 지역 내에 있어야 한다. 웃음은 대상을 가깝게 만들고, 인위적이지 않은 접촉의 지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그 대상의 모든 면을 친근하게 만지작거릴 수 있으며, 앞뒤로 뒤집어 볼 수도 있으며, 위 아래로 벗겨보기도 하며, 외부의 껍데기를 열어볼 수도, 중심을 볼 수도, 의심을 해볼 수도, 거리를 둘 수도, 외면할 수도, 발가벗길 수도, 노출시켜 볼 수도, 자유롭게 검토하고 실험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웃음은 대상과 세계에 대한 공포와 신성함을 없앤다. . . . 웃음은 공포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깔보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것이 없다면 아마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realistically)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 . . 웃음은 대상을 탐색하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과학적이든 예술적이든), 그리고 자유롭게 실제로 다루어 볼 수 있다는 환상을 갖도록, 두려움이 없어진 가까운 곳에 대상을 데려다 준다. 웃음과 대중적인 언어를 통해 세계와 친근해지게 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 때문에 아마도 또한 과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생생한 예술적 창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 ."(Bakhtin 23).

바흐친에 따르면 '거리'는 코믹한 문학에 방해가 된다. 베르그송과 비교해 볼 때 이 논의는 거리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바흐친이 의미하는 문학에 있어 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그것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거리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통과 후광(Aura)을 만들어내는 거리이다. 이러한 거리는 시간을 "절대적인 과거(absolute past)"로 고착시키고, 세계가 현재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진지하고 숭고한 예술(장르로서 양식화된 예술)의 심층에는 언제나 근접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 이 절대적 과거가 스며들어 있으며, 개입할 수 없는 위계적 구조로서 작품의 요소들을 지배하고 있는 거리가 내재한다.

서사시나 비극의 심층을 이루는 충동이 언제나 기억(전통이나 영웅에 대한)으로 구성되고, 이들의 심층적 언어가 죽음의 이미지로 짜여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 안에는 웃음이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술에서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아 자체도 분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사시적 의미에서 기억은 자아의 환상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이는 기능을 갖는다. 기억 속에서 과거의 시간들은 현재적 의미로만 구성되고, 주체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현재적 신념과 기대 속에 재구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는 시간과 관련해 자기 동일적 본성을 띠게 된다. 자아의 자기 동일성이 가장 고양된 형태로 나타나는 시간은 신에 대한 신념일 것이다. 자아에게 있어 신은 가장 먼 존재이다.

5.
이런 의미에서 바흐친의 웃음에 대한 논의는 베르그송의 그것보다 더 나아간 듯 보인다. 그의 논의에서는 웃음의 순수 구조뿐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효과와 웃음의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에 대한 논의는 베르그송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그렇게 나아간 듯 보인다. 우선 그에게 있어 웃음의 발생적 기원으로서, 그리고 친숙함과 민중적인 웃음을 가능케 하는, 위계적 거리의 파괴는 고착된 시간(과거)을 살아있는 현재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위계적 거리란 자아와 세계의 단절과 자아 자신의 분열된 양상 속에서 보게 되는 상대적이고 공간화된 거리이기보다는 도달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 과거란 주체뿐 아니라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심층적 시간을 말한다.

따라서 바흐친에게 거리를 제거하는 문제는, 심층과 표층이라는 위계적 질서를 새로운 동 시간적 평면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시간으로서 심층을 다른 이질적인 표층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거리가 제거된 지형 위에서 순수한 심층은 어디에도 없으며, 이것은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들에 의해 손때가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철학적 사유의 논의이기보다는 정치적 힘의 관계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주체와 외부세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웃음의 발생적 구조의 문제보다는, 위계적 거리가 제거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로서 웃음에 관한 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의는 웃음이 왜 발생하는가 혹은 웃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본원적인 질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웃음에 관한 그의 논의는 그것이 무엇을 발생케 하는가 혹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주체가 세계와 가지게 되는 망상적 관계에 대한 논의라든지, 내면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상실된 고향의 주제(루카치의 경우처럼)를 찾기가 힘들다.

예술에서 웃음이 나오려면 모든 예술적 요소들이 동 시간적 지대에 집결되어야 한다. 즉 시간적 배경뿐 아니라 작품이 형상화되기 위해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 언어, 스타일 등 모든 예술적 요소들은 현재화되면서 우리와 친숙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접근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었던 절대적 시간으로서 전통이나 과거를 현재 속에 위치시킴으로서, 진지함이나 권위와 같은 위계적 거리들이 파괴되면서, 비로소 웃음이 가능해 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은 이러한 거리들을 파괴한다. 그런 식으로 웃음은 심층 깊숙한 곳에 은폐된 시간과 공간을 밝은 표면으로 끄집어낸다. 들뢰즈(G. Deleuze)는 유머를 "표층의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물을(심지어는 정신까지도) 동일한 평면 위에 끌어올림으로써, 그리고 이들을 가까운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이제 그들에 대한 신비적인 공포가 사라지고 그들의 신성함이 제거된다. 접근할 수 없었던 가장 먼 존재로서 신은, 이제 두려운 존재로서 그 신성함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현재의 이차적 자연 안으로 끌어내려지면서 표면화된다.

6.
거리에 관해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의 의미에 관한 해석에 있었다. 베르그송의 경우 웃음은 거리를 필요로 한다. 열정과 신념이 강렬한 존재는 웃을 수 없다. 반면 바흐친의 경우 웃음은 거리가 사라짐으로써 발생하고 동시에 이 거리를 제거한다. 웃음과 거리에 대한 모순적인 이 두 관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웃음과 관련된 거리의 문제에 대해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갖는다: 1) 베르그송의 경우 거리는 웃음을 유발하는 발생적 구조이다. 이 구조는 웃음의 조건이기도 하며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거리는 심층적 관념에 몰입되어 사물을 이해하는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계기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조건으로서 상대적 거리를 의미한다. 2) 바흐친의 경우 웃음과 관련하여 거리의 문제는 좀 복잡한데, 그것은 우선 웃음을 유발하는 발생적 구조의 효과와 관련되며, 다음으로 웃음의 결과와 관련된다. 물론 두 경우 모두에서 거리는 제거된다. 여기서 웃음이 발생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순수한 심층으로서 절대적 거리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의 발생적 구조의 효과에 의해 거리가 사라지며, 동시에 웃음의 결과로 인해 거리가 제거된다.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심층적인 것과 표층적인 것이 동 시간적 지형 위에 단면화됨으로써 심층의 신비주의가 사라지고 공포가 제거되며, 사물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유자재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주체가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가능해지는 비판적 계기(베르그송의 경우)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됨으로써 대상은 매우 가깝고도 친숙한 것이 될 수 있다. 바흐친에게 있어 친근하게 되고, 대상의 권위가 사라지고, 심층적인 것이 파괴되는 것은 웃음의 구조의 효과이며 동시에 웃음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거리의 이중적인 본질을 보게 된다. 하나는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기제로서 거리이고(베르그송),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효과로서 거리이다(바흐친). 따라서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모순적인 논의를 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두 사람에게 웃음은 거의 동일한 의미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의 의미는 서로 완전히 반대적이다. 이로써 웃음은 두 방향을 갖게 되는데, 한편에는 사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제로서 웃음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접근할 수 없는 거리를 제거하는 기능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과거를 공시적 평면 위에 위치시키면서 과거와 기억을 현재적 관계들로 끌어들임으로써 유발되는 웃음이 있다.

7.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정리해보자: 베르그송은 웃음의 발생적 구조에 집중한다.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것과 경화되고 뻣뻣한 것의 충돌. 이것이 웃음의 발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조적 조건이다. 따라서 웃음의 구조적 요인은 거리이다. 왜냐하면 충돌과 부조화를 볼 수 있는 반성적이고 비판적 시선은 종합적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판단은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르그송의 논의들 속에서 아이러니와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웃음은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웃음은 거리가 없는 관계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웃음 속에 이미 대상에 대한(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본성이 내재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은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행위이며, 웃음은 열정과 신념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그것은 관념에 몰두하는 망상적 자아에 관한 자기비판이 된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었다고 믿었던 신념이 파괴되면서 나오는 비판이기도 하며, 심층과 표층이 심연에 가로놓여 순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고 믿는 신념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따라서 웃음은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 가장 강렬한 형태의 분열증적 표현이다.

그러나 바흐친에게 웃음은 거리가 제거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웃음의 대상은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 과거 속에 위치하여 광채를 발하는 접근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가 접촉하고 만지고 볼 수 있는, 무게를 가지지 않는 존재이다. 웃음 속에서 모든 존재는 그 권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웃음 속에는 거리가 없으며, 권위가 없으며, 세계는 웃는 주체와 동일한 평면과 시간 속에 위치한다. 고귀한 존재는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웃음은 그 자체로 대상을 심층으로부터 현재적 표면으로 완전히 끌어올림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표면 위에 드러나 스스로 분열한다. 웃음 속에서 주체는 대상과 거리를 가지지 않으며, 자기자신을 지고한 절대적 시간 속에 고양시키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웃음의 구조와 그 요인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했으며, 바흐친은 웃음의 정치학적 효과와 결과에 집중한다. 이 두 연구자들은 서로 웃음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가지지만, 웃음의 요소를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한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의 발생적 요인과 그것의 정치적 효과. 이 둘을 종합하면 웃음의 아이러니컬한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웃음은 거리를 만듦으로써 거리를 없앤다.

주1) 예를 들어, 자연스럽게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을 연상해보자. 장애물의 출현은 상황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유지되려면 장애물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걸음걸이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이 되면서,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때, 장애물에 걸려(즉 변화된 상황과 충돌)넘어진다. 웃음을 유발하는 우스꽝스러움은 새로운 상황과 부딪치면서, 유연했던 걸음걸이가 기계적인 자동화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가볍고 유연한 것과 기계적이고 뻣뻣한 것과 충돌하면서 나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2) 아이러니와 유머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각각 다른 본질을 띠고 있다. 아이러니의 경우 자아의 반성적 계기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기제인 반면, 유머의 경우는 긍정적으로 사유한다. 그래서 아이러니의 어조는 주로 짜증과 조소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는 주체의 신념이 물질의 반항과 맞서면서 실패할 운명에 처해있음에 대한 통찰인 반면 이 통찰로부터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정신적 기제이다. 그러나 유머의 경우 이러한 통찰을 긍정한다. 신념과 이상의 불완전성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사유가 아이러니와 유머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아이러니에도 유머러스한 측면이 눈에 띠지만, 이때의 웃음은 주로 쓴웃음의 형태를 띤다.

참고문헌

Bakhtin, M. M.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 Trans by Caryl Emerson and Michael Holquist.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2.

앙리 베르그송. 『웃음: 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 정연복 옮김. 세계사. 1992.

2006/11/10 18:53 2006/11/1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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