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Changes - Search:

Medianote


Main

Literarystudy

Literarynote

Blog

Recently Written

Recent Comments

edit SideBar


Iches

자아와 이드(Das Ich und das Es, 1923)

[ ]는 편집자 주, 굵은 글씨는 편집자 강조

1)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

― 무의식적인 것의 존재
“. . . 정신계를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이다. . . . 다른 식으로 말해서, 정신분석학은 정신계의 본질을 의식 속에서 찾지 않고 의식을 정신적인 것의 한 특성으로 간주 . . . 철학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식적이지 않은 어떤 정신 현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이 보이고 논리적으로 쉽게 반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 . . 의식에 관해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심ㄹ학은 꿈과 최면의 문제들을 풀 수 없다”(94-95).

― 의식 상태와 의식을 벗어난 상태 사이의 잠재적 관념
“<의식적이라는 것>은 . . . 지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의미 . . .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적 요소(예컨대 관념)가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의식 상태에 포함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의식의 상태는 대단히 일시적인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지금 의식적인 관념은 잠시 후에는 의식 상태를 벗어난다. 물론 그것이 일정한 조건 . . . 에서는 다시 의식화될 수 있지만 말이다. 의식상태와 의식을 벗어난 상태 사이에 그 관념[즉, 잠재적 관념?]이 존재한다. 단지 . . .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의식이라는 것은 그러고 보면 정신적 실재에 있어 매우 적은 부분만을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관념이 <잠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고, 이는 언젠가는 <의식화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관념이 <무의식적>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에 대해 정확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무의식적>이라는 표현은 <잠재적이고 의식화될 수 있는>이라는 말과 일치한다”(95-96). [이 문단에서 프로이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다. 의식 상태와 의식을 벗어난 상태 사이의 잠재적 관념이란 전의식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 의미에서 무의식을 말하는 것인가?]

― 억압된 것으로서의 무의식, 그리고 의식화되지 않으려고 대항하는 것으로서의 저항
“. . . 일반적인 관념이 활동하는 정신생활의 온갖 효과들(관념으로서 의식화될 수 있는 효과를 포함해서)―물론 그들 자체가 의식화되지는 않지만―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대단히 강력한 정신 과정이나 관념이 존재한다. . . . 그러한 관념이 의식화될 수 없는 이유는 어떤 힘이 그것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왜 그 관념을 의식화시키려 하는가 하면, 환자가 자신의 억압을 의식화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드에게 있어 치료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의식화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의식화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인정되는 다른 요소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지 않는가 . . . 정신분석적 기교 . . . 대항하는 힘을 제거하여 문제의 관념을 의식화하는 방법의 발견, . . . 어떤 관념이 의식화되기 전에 존재한 상태를 일컬어 우리는 <억압 Verdrängung>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억압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힘을 분석작업중에 나타나는 <저항 Widerstand>이라고 생각 한다[즉, 치료과정에서 환자의 의식으로 떠오르지 못한 것은 억압이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은 저항이다]”(96-97).

― 두 종류의 무의식: 무의식과 전의식
“이와 같이 우리는 억압의 이론에서 무의식의 개념을 얻는다. 억압된 것이 무의식의 원형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종류의 무의식, (1) 즉 잠재되어 있으나 의식화할 수 있는 것, 그리고 (2) 억압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의식화할 수 없거나 순조롭게 의식화할 수 없는 것 등, 두 종류의 무의식이 존재 . . . 역동적인 의미가 아니고 오직 서술적으로만 잠재적인 것을 우리는 <전의식>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이라는 용어는 억압되어 역동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에 국한 시킨다[여기서 서술적으로만 잠재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또 역동적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서술적이라는 말은 설명상으로만 혹은 명목상으로만 잠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의식 Bw.>, 전의식(Vbw.>, 그리고 그 의미가 더 이상 서술적이지만은 않은 <무의식 Ubw.>이라는 세 용어를 갖게 되었다. <전의식>은 <무의식>보다는 <의식>쪽에 훨씬 더 가까이 . . . 우리는 <무의식>을 정신적인 것이라고 했으므로 잠재적인 <전의식>을 정신적인 것이라고 하는 데는 주저함이 훨씬 덜할 것이다. . . . 그런데 우리는 왜 철학자들과는 달리, <무의식>뿐만 아니라 <전의식>까지 의식의 정신성과 한결같이 구별하려는 것일까? 철학자들처럼 <전의식>과 <무의식>은 <잠재적 정신 현상 Psycoide>의 두 종이나 단계로 서술한다면, 설명하는데 더 어려워질 것이다”(97-98).

―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
“서술적 의미로서는 두 종류의 무의식이 있고[즉, 전의식+억압된 것], 역동적 의미로서는 오직 하나의 무의식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라는 세 개의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 . . 의식과 무의식의 구별은 결국 지각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로서 그것은 <예>나 <아니오>로 대답해야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지각 행위 그 자체는 어떤 것은 지각되고 어떤 것은 지각되지 않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 . . 실제적 현상이 역동적 요소를 모호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원주1. 이 시점에서 무의식 비판론자들의 새로운 경향을 고려해보자. 무의식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어떤 연구자들은, (한 현상으로 간주되는) 의식에는 강도나 선명도 면에서 다양한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다는 사실에서 탈출구를 모색 . . . 대단히 생생하고, 눈부시고, 만져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의식적인 과정이 있듯이, 우리는 또한 희미할 뿐, 의식적인 것으로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과정들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이 매우 희미하게 의식적인 것들이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이라는 적합지 않은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것들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들 역시 의식적이거나 <의식의 상태 속에 있는> 것이고 만약 그것들에 충분한 관심을 집중하면 그것들은 충분히, 강렬하게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즉, 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이지 않은 것을 정도상의 강도상의 차이로 보려한다]. . . . 의식 속에서 선명도의 차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아도 확실하지 않고 어떤 증거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는 마치 다음의 진술들이 증거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과 같다. 즉 <조명에는 가장 눈부시고 번쩍번쩍하는 빛부터 가장 어둠침침한 미광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단계적 차이가 있다―따라서 어둠과 같은 그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생명력에는 다양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로, 죽음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 . <의식적인 것>이라는 개념 속에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마음에 관해서 알고 있는 유일하게 직접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라는 발상은 무의식적인 정신이라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부조리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무의식적인 것과 동일시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분명히 그 속에 관련되어 있는 역동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동적 조건이 바로 정신분석적 견해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시도는[무의식과 의식을 정도상의 차이로 보는 것]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1) 이런 종류의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것에 충분한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도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2) 이런 일이 성취되었다 해도 전에 알아차리지 못한 생각은 의식에 의해서 인식되지 못하고, 아주 낯설거나 반대 세력으로 보여 의식에서 즉각적으로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혹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서 무의식적인 것의 도피처를 구하는 것은 결국 정신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을 완전히 하나로 보려는 기존 믿음의 한 유형에 불과한 것이다[즉,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무의식은 다른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을 정도상의 차이로만 보려는 사람들이 간과한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프로이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을 하나로 보려는 기존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또 그 둘을 하나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원주.) ”(98-100).

― 자아의 기능
“ . . . 각 개인 속에는 정신 과정을 일관성 있게 조직화하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 사람의 <자아>라고 부른다. 바로 이 자아에 의식이 부착되는 것이다. 자아는 흥분을 외부 세계로 방출하는 운동성에 접근을 통제한다[이 말은 좀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아마도 리비도 집중이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을 통제한다, 혹은 이드의 운동을 통제한다는 말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개체 자신]의 모든 구성 과정을 감독하는 정신 기관이다. 그리고 밤에는 쉰다. 물론 이때도 꿈에 대한 검열 작용은 계속 하지만 말이다. 이 자아에서 억압이라는 것도 생기는데, 이 방법을 통해 마음속에 있는 어떤 성향을 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유효성과 행위에서도 제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즉, 자아는 마음속에 있는 어떤 성향을 억압하여, 의식에서 그리고 다른 행위들에서 그 성향을 제거하고자 한다]. 분석과정에서 밀려난 이 성향이 자아와 대치 상태에 서게 된다[즉 이 성향은 자아에 의해 억압된 것이므로 자아와 대치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자아는 이 성향과 관련하여 어떤 저항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자아가 억압된 것과 관련해서 드러내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그래야만 환자의 억압된 것을 의식화할 수 있으며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 과정에서 어떤 문제를 환자에게 제시했을 때 환자가 곤란해 하고 그 문제가 억압된 것 가까이에 접근할 때는 그의 연상이 실패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환자에게 어떤 저항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말해 주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 한다”(100).

― 자아 속에 있는 무의식
“. . . 그러나 이 저항이 그의 자아에서 나오고 또한 자아에 속한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다. 우리는 자아 속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이고 억압된 것과 똑같이 행동하는 어떤 것과 만난 것이다[매우 흥미로운 생각이다. 자아가 마음속의 어떤 성향을 억압하고 그 억압된 것과 대치상태에 직면하면서 저항하지만, 동시에 그 저항 속에서 자아는 그 억압된 것과 같은 경향을 갖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하는 것이다]. . . . 무의식이 억압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다. 억압된 모든 것이 무의식이라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지만 무의식적인 모든 것이 억압된 것은 아니다. 자아의 일부 역시―그 일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누가 알랴―무의식일 수 있다. 아니 의심할 나위 없이 무의식이다. 그리고 자아에 속한 이 무의식은 전의식과 같이 잠재적이지 않다[결국, 지금까지 말했던 무의식의 종류를 열거해보면, (1) 무의식(억압된 것), (2) 전의식(잠재적인 것), (3) 자아 속의 무의식(억압되지 않은 것)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무의식은 의식화되는 일 없이는 활성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화시키는 과정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이 말은 좀 이해가 안 간다. 자아 속에 있는 무의식인데, 의식화시키기 어렵다?]. 억압되지 않은 제3의 무의식을 가정해야 할 필연성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인 것의 특징들이 그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01-102).

2) 자아와 이드

― 의식화란 무엇인가? 또 어떤 식으로 가능한 것인가?
“. . . [자아와 의식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 . . 자아도 역시 올바른 의미에서 무의식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 . .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다. . . . 이제 우리의 모든 지식은 항상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 심지어는 <무의식>까지도 그것을 의식화시킴으로써 알 수 있게 된다. . . . 그러나 의식화시킨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 우선 우리는 의식이 정신 기관의 <표면>이라고 말해왔다. 즉 그것은 한 기능으로서 [외적 자극이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공간적으로(기능적 의미 뿐 아니라 해부학적으로) 첫 번째인 조직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았다[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쾌락원칙에서 말한 바가 있다]. . . . 우리의 연구[의식화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연구?] 또한 이 지각적 표면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 우리가 외부와(감각-지각) 내부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각―우리가 감각과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처음부터 <의식>적이다[즉, 지각을 두 방향에서 보고 있다. 즉 외부와 관계하는 지각(감각)과 내부와 관계하는 지각(감정). 그런데 프로이드는 이 지각(표면)이 의식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 . . [그러나 프로이드는 여기서 정신생활을 이렇게 공간적, 혹은 <지형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의식화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고 본다. 왜냐면 의식화를 의식 조직의 공간적 양태로 설명하는 것은 의식이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과의 관계에 따른 양태를 말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3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 . .”(102-103)

― 무의식과 전의식적 관념(생각)의 차이: 의식화가 무엇인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으로서, 무의식에서 전의식으로 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
“. . . 무의식과 전의식적 관념(생각)의 실질적인 차이 . . . 즉, <무의식>적 관념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어떤 자료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반면에 <전의식>적 관념은 거기에 덧붙여 <언어표상 Wortvorstellung>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조직을 구별하는 표시를 지적한―이 두 조직과 의식의 관계는 논외로 하고―첫번째 시도였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것이 어떻게 의식화하느냐?>라는 질문은 이제 좀더 유리하게, <어떤 것이 어떻게 전의식화 하느냐?>라는 문제로 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은 <그것에 상응하는 언어 표상과 관련을 맺음으로써>라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의식화의 문제는 언어표상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소리의 분절능력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도식이 가능하다: 무의식 ⇒ (언어표상 과정) ⇒ 전의식 ⇒ 의식] . . . 언어표상은 기억의 잔재물이다. 그것은 한때 지각의 내용이었다. 모든 기억의 잔재물이 그렇듯이 그것은 다시 의식화될 수 있다. 그것의 성격에 더 깊이 관여하기 전에, 한때 <의식>적 지각이었던 것만이 의식화될 수 있으며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감정은 별문제로 하고)으로서 의식화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반드시 외부 지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이러한 일은 기억의 흔적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생각과 함께―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발견과 같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의식은 외부지각에 의해서만 생겨난다는 말인가? 다음부분에서 프로이드는 자신도 모를 듯한 논의를 하고 있다] . . . 기억의 잔재물은 <지각-의식> 조직에 인접한 조직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잔재물의 리비도 집중이 안에서부터 지각-의식 조직의 여러 요소들에 쉽사리 확장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환상의 문제를 떠올리고 대단히 생생한 기억은 언제나 환상과 구별되고 외부적 지각과도 구별[생생한 기억/환상/외부지각의 순으로 나열할 수 있는가?] . . . 그러나 기억이 재생되었을 때 리비도 집중은 기억의 조직 속에 남아 있는 반면, 지각과 구별할 수 없는 환상은 그 리비도 집중이 단순히 기억의 흔적에서 <지각>적 요소로 퍼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덮어 버릴 때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 . . . ”(104-105).[즉, 기억의 경우엔 리비도 집중이 기억 조직에 남아 있으나, 환상은 리비도 집중이 기억의 흔적에서 지각적 요소로 퍼지고 또한 지각적 요소를 완전히 덮어 버릴 때 발생?]. . . . 언어적 잔재물은 주로 청각적 지각에서 유래하고, 따라서 <전의식>의 조직은, 이를테면, 특별한 감각적 원천을 갖고 있는 셈이다. 언어 표상의 시각적 요소는 이차적인 것이고 독서를 통해 얻은 것이다. . . . 본질적으로 언어란 결국 청각적으로 전달된 말의 기억 잔물이 아니겠는가. . . . 그러나 . . . 시각적 기억 잔재물―특히 <사물>에 관한 것일 때―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되고, 사고의 과정이 시각적 잔재물로 되돌아감으로써 의식화될 수 있으며 . . . 꿈에 대한 연구나 바렌도크J. Varendonck의 관찰이 보여준 전의식적 환상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시각적 사고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 속에서 의식화된 것은 원칙적으로 사고의 구체적 주제뿐이며 사고의 특징을 이루는 이 주제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시각적 표현을 얻을 수 없다[무슨 말인가?]. 그러므로 그림을 통해 사고하는 것은 의식화의 매우 불완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또한 언어로 사고하는 것보다 무의식적 과정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을 통하여 사고하는 것이 언어로 사고하는 것보다 개체 발생론적으로나 계통 발생론적으로나 더 원시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03-106)

― 중략: 내부적 지각과 자아의 관계, 쾌-불쾌의 고리에 속하는 감각, 쾌, 불쾌로 의식화되는 것을 정신 과정의 양적, 질적 <그 무엇(Es)>이라고 할때 . . 이 그 무엇이 지각의 조직에 전달되어야 의식화하는 문제, . . . 그 무엇은 억압된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는 사실, 억압된 충동과 같은 그 무엇에 대해 자아는 그 강박성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 . . . 감각과 감정도 역시 <지각>의 조직에 도달하여야만 의식화될 수 있다는 것 . . . 무의식적 관념과 유비적 관계속에서 나온 무의식적 감정에 대한 언급, . . . 의식과 전의식의 구별은 감정의 문제에 관한 한 의미가 없다는 점 . . . (106-108).

― 자아의 개념과 그것의 이드와의 관계
“. . . 언어 표상의 역할: 언어표상이 개입됨으로써 내부의 사고 과정이 지각 . . 그것은 마치 모든 지식은 외부적 지각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는 일반 법칙을 증명이라고 하는 것 같다. 사고 과정에 리비도 과잉 집중이 발생하면 사고는 마치 그것이 외부에서 온 것처럼 <실제적으로> 지각되고, 결과적으로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 . . . 자아는 그 핵심인 <지각> 조직에서 출발하고, 기억의 잔재물과 인접해 있는 <전의식>을 끌어안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 . . 자아도 역시 무의식적이다.[즉, 이미 언급했듯이, 자아에 속하는 나르시즘적 무의식을 말한다]. / 게오르그 그로데크Georg Groddeck의 주장: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 . . 우리는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살게 된다>고 주장(그로데크의 『이드에 대한 저서 Das Buch vom Es』(1923)) . . . 나는 <지각>의 조직에서 출발하고 <전의식>, <자아>로 시작되는 실체를 주목함으로써, 그리고 그로데크를 따라 정신의 다른 부분―이 다른 부분 속에서 위에서 말한 실체가 연장되고 또한 그것은 마치 <무의식>이나 <이드 das Es>처럼 행동한다―을 주목해 봄으로써 그 문제를 고찰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원주: 그로데크는 니체를 따른 것이 틀림없다. 니체는 우리의 성격 속에 있는 비인간적인 것, 자연의 법칙에 부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이 문법적 용어를 사용했다). . . .

[(1) 자아와 다른 부분들 간의 경계선] ― 이제 우리는 한 개인을 알려지지 않고 무의식 상태인, 정신적인 이드―이 표면에 자아가 자리잡는데, 이 자아는 그것의 핵인 <지각>의 조직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 . .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자아는 이드를 완전히 감싸지 않고 배반(胚盤)이 난자 위에 자리 잡듯이, <지각>의 조직이 자아의 표면을 형성하는 정도까지만 감싼다 . . . 자아는 이드에서 칼로 자르듯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자아의 하부 일부는 이드와 합병된다. / 그러나 억압된 것도 역시 이드와 합병되어 이것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단지 억압된 것은 억압의 저항에 의해서 자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이드를 통해서 자아와 의사소통할 수 있다[그렇다면, 무의식은 이드를 통해 자아와 소통한다는 말인가?]. 병리학의 도움을 받아 설정한 이 같은 경계선은 오로지 정신기관의 표층부에만 관련되어 있다(110쪽 그림 참조). / 아마도 우리는 자아가 <듣는 모자 HÖrkappe>(청각 인지 영역)를 쓰고 있다는 것, . . . 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림 참조). (프로이트는 여기서 <베르니케의 영역>, 즉 언어 이해와 관련된 대뇌엽의 위쪽 청각 인지 영역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 자아의 기능성 중요성] ― 자아가 <지각-의식>의 매개를 통해 외부 세계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서 수정된 부분의 이드라는 사실 . . . [즉, 자아는 이드가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아 수정된 일부이다] . . .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표면 분화(分化)의 한 연장이다. 더구나 자아는 외부 세계의 영향을 자아와 그 경향과 연결시키려하고, 이드 속에서 무제한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쾌락 원칙을 현실 원칙Realitätsprinzip으로 대치시키려고 노력한다. 자아에서는 지각이 이드 속에서의 본능에 해당하는 역할을 한다[즉, 이드 속에서의 본능이 하는 역할을, 자아 속에서는 지각이 하고 있다]. 자아는 열정을 포함하고 있는 이드와는 대조적으로, 이성과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대변한다. . . . 그러나 이는 평균적 의미나 <이상적> 의미로만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 자아의 기능적 중요성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운동성의 통제 임무를 떠맡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 . . 이드와의 관계에서 자아는 말 등에 타고 있는 사람과 같다. 이 사람은 자기보다 더 센 말의 힘을 제어해야 한다. 한 가지 차이점은 말을 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말의 힘을 제어하는 반면, 자아는 빌려온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 . . 말을 탄 사람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말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도 이드의 의지를,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 양 행동으로 나타내는 습관이 있다.”(108-112).

― 자아가 형성되고 이드에서 분화하는데 있어 <지각>조직의 영향 외에 다른 요소: 육체(감각)
“<지각> 조직의 영향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자아가 형성되고 이드에서 분화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육체, 특히 그 표면은 외부적 지각과 내부적 지각이 생기는 장소다. 그 표면은 다른 대상물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것과 <접촉> 할 경우 두 가지 종류의 감각을 지어내는데, 그 중 하나는 내부적 지각과 동일시할 수 있다. 정신 생리학은 어떻게 해서 사람의 육체가 지각의 세계에서 다른 대상물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를 충분히 검토해 왔다. . . . 계속 114쪽 까지 발췌 정리할 것

3) 자아와 초자아(자아이상)

114쪽부터 - 130쪽 까지 발췌 정리

4) 두 종류의 본능

 ― 자아는 특별히 변형된 이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 . . 마음의 구조를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해 놓은 것 . . . 마음속의 역동적 관계를 이해하게 . . . 자아가 특별히 지각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과, 넓게 말해서, 본능이 이드에 대해서 갖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각이 자아에 대해서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이미 표명한 바 있다. 그와 동시에 자아는 또한 이드와 같이 본능의 영향에 종속된다. . . . 자아는 특별히 변형된 이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130-131). [프로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드가 지각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이 자아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자아는 변형되었지만 여전히 이드로서 본능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지각의 영향 역시 받는 것이다]

― 두 부류의 본능
(1) “. . . 성적 본능, 혹은 에로스는 훨씬 더 눈에 잘 띄고 연구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것은 억제받지 않는 정통적인 성본능과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목적에 의해서 억제된, 승화의 성격을 띠는 본능 충동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보존 본능도 포함된다. 이 자기 보존 본능은 자아에 귀착시켜 마땅한 것으로서 분석 작업의 초기에는 그것을 성적 대상 본능과 대조시켜 놓았는데, 그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2) “두 번째 부류의 본능은 지적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는 결국 사디즘을 그것의 대표적 표현으로 인식 . . . 생물학의 이론적 고찰을 바탕으로 우리는 <죽음 본능>의 가설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 본능이 하는 일은 유기적 생명체를 무생물의 상태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에로스는 살아 있는 물질을 구성하는 미립자들을 점점 더 광범위한 결합체로 묶음으로써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동시에 삶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 . ”(131).

― 두 본능의 보수성
“. . . 이런 식으로 작용하니까 두 본능 모두가 엄격한 의미에서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둘 다 생명의 출현에 의해서 흐트러진 사태를 재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쾌락원칙에 관한 논문에서 말한 바 있다. 참고하라]. 따라서 생명의 출현은 삶을 지속해 가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향해 움직여가는 원인을 제공한다. 삶 그 자체가 이 두 경향 사이의 갈등이요, 타협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우주론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생명의 목표와 목적의 문제는 그 해답이 <이원론적으로> 주어져야 할 것이다[어째서?]. . . . 이 두 본능은 생리학적 과정으로서 동화작용Aufbau과 이화작용Zerfall을 두 부류의 본능과 연관시킬 수 있을 것 . . .”(131-132)

― 두 본능의 융합 방식
“ . . . 단세포 유기체가 다세포 생명체로 결합된 결과 단일한 세포의 죽음 본능은 성공적으로 중화될 수 있고, 그 파괴적 충동은 특수한 기관의 도움을 받아 외부 세계로 전향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 특수한 기관이란 근육기관이 될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죽음 본능은 외부세계와 다른 유기체를 향하는 <파괴 본능Destruktionstrieb>으로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설령 일부분일 가능성이 크지만).[즉, 단세포가 성적 본능에 의해 다세포로 묶이고 결합하면, 단세포의 죽음본능이 중화된다. 그리고 이 중화된 죽음본능은 근육기관의 도움을 받아 외부 세계로 전이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죽음본능은 외부세계나 다른 유기체에 대한 파괴본능으로 변한다].”(132)

― 두 본능의 융합과 분열의 몇 가지 예들
“두 부류의 본능이 융합Mischung될 수 있듯이 <분열 Entmischung>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적 본능의 사디즘적 요소가 우리에게 이로운 본능적 융합의 고전적인 예가 될 것이다. 반면에 성도착으로 독립한 <사디즘>이 분열의 전형적인 예―물론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가 될 것이다. . . . 여기서 새로운 사실 . . . 방출을 위해서 <파괴본능>은 습관적으로 에로스에 봉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왜냐하면,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방출되려면 죽음본능이 중화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세포의 결합이 있어야 하기 때문. 다시 말해서 파괴본능이란 에로스의 결과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파괴본능이 생성되려면 에로스가 전제가 되어야 하므로, 파괴본능은 에로스에 봉사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프로이드 특유의 사고패턴이 또 나왔다]. 간질병의 발작은 본능적 분열의 산물이고 지표라고 생각된다(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작에 관한 논문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버지 살해> 전집 18집 참조). 그리고 본능적 분열과 죽음본능의 현격한 출현은 심한 신경증, 예컨대, 강박신경증 Zwangsneurose의 영향을 특별히 고려해 볼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다. 서둘러서 그것을 일반화해 보자면, 우리는 리비도 퇴행(이를테면, 성기기에서 사디즘적 항문기로 퇴행)의 근본이 본능의 분열에 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초기 상태에서 결정적 성기기로 진입하는 것이 성적인 요소의 접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통 <양가감정 Ambivalenz>―이것은, 흔히 체질적 신경증 성향의 사람들에게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은 분열의 산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양가감정은 하도 근본적인 현상(?)이라서 그것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본능적 융합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말인가?]”(132-133).

Edit - History - Print - Recent Changes - Search
Page last modified on November 30, 2010, at 11:50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