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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girascope미디어와 사이버공간: Stuart Moulthrop의 Hegirascope의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있으며, 하이퍼 텍스트의 주목할만한 형식을 이 텍스트의 특징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글이 가만히 붙박혀 있지 않는다. 편집된 화면에 나타나는 일군의 글은 저자가 계획해놓은 절차에 따라 순환적이거나 연결적으로 바뀌면서, 다음 화면의 다른 내용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지금 읽고 있는 글의 내용을 마치 버스를 타고 창가에서 지나가는 광경들을 보듯이 쳐다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글들을 꼼꼼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행동을 직접 취해서(부라우저 조작) 억지로 붙잡거나 편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자는 그 글들에 무심해야 할 것이며, 순차적으로 바뀌는 화면에 눈을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dive in). 2. 순환적인 화면 전환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출구가 있다. 매 화면에 나타나는 글에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연결 지점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특히 눈에 띠는 단어가 나오거나 관심이 가는 구절이 나오면, 현재 화면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순차적인 변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 텍스트의 특징은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전체의 스토리와 내용을 이해하여 큰 틀로 구조화할 수가 없다. 플롯을 따라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파편화된 문구들을 계속해서 연결하여 놓았기 때문에, 하나의 구조를 띠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맥락을 전체화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지도가 없는 셈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처럼, 이 글들은 처음과 끝이 없으며, 어디에서 시작해도 무관하다. 이 텍스트는 하나의 브리꼴라쥬이다. 4. 저자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활동을 텍스트로 재현하고 있다. 파편적으로 흐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탈하게 끔 제작된 이 텍스트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도약하여 본성적으로 다른 내용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이나 연상의 흐름처럼, 이리저리 흐르다가 다른 출구로 나가는 방식을 재현하고 있어, 이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꿈의 흐름을 쫓는 듯 하다. 5. 이 텍스트는 의미와 관련하여 메타-텍스트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의미해석의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1. 저자가 꾸며놓은 의미에 독자는 침잠되어 그 의미를 내면화하거나 향유하고 느끼는 방식이다(내면화된 독자). 2. 저자가 계획한 의미에 함몰되기보다는, 텍스트에 나타난 의미가 어떻게 제작되고 짜여지는지를 찾는 방식이다(분석적 독자). 독자는 Hegirascope를 읽으면서, 의미해석의 두 번째 방식처럼, 계속해서 넘어가는 구문들과 사방으로 갈라지는 링크들에 침잠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잘 드러난 의미를 내면화하고 음미하기보다는(드러난 전체의미 조차 파악 할 수가 없다),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더 나아가 독자는 구성된 의미의 수용자가 아니라, 오히려 의미의 구성자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하이퍼 텍스트는 메타텍스트적이다. 6. 하이퍼 텍스트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퍼포먼스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문자 기호들이 지시하는 의미를 통해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연결된다. 다시 말해 하이퍼 텍스트는 기호의 의미론적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각활동 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Hegirascope는 쓰여진 글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 즉 글자 크기, 색깔, 화면 레이아웃, 화면 색, 이동 속도 등, 각각의 노드와 링크가 구성되는 모든 요소들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요소들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고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퍼 텍스트는 하나의 화폭에 그려진 단일한 재료의 의미론적 구성이 아니라, 모든 공 감각적 요소들을 동원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7. 선을 벗어난 시간 이 텍스트의 저자인 S. Moulthrop은 이 작품이 시간을 근간으로 하는 텍스트라고 말한 바 있다. 문학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텍스트 역시, 저자의 말에 따라,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 구현된 시간은 고전적 형식의 문학(아리스토텔레스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우선 이 텍스트의 흐름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순차적이며 선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를 구성한 저자나 텍스트를 따라가는 독자의 시간은 전혀 선형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흐르는 창에 짜여진 글은 각각이 서로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관점과 묘사 혹은 서술 기법 등이 모두 동일하지 않다. 또한 일관적인 단계를 취하지도 않으며,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지도 않는다. 특정한 플롯이 없는 것이다. 시간은 고전적 방식의 재현에서처럼 주관적 사유의 계열이 아니라 객관적 신체(혹은 무의식)의 계열에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시간은 (주관적 형식으로서)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되었다. 실존하는 몸이 배제되고 있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하이퍼 미디어나 사이버 미디어에 관한 이러저러한 논의들에서 '직접적인 경험의 문제'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결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든 것들이 파편화 되어 있다. 따라서 전체화할 수가 없다. 기억은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인 방식으로만 기능할수 있다. 오랫동안 머물러 정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억은 부분적인 잔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니 어떠한 의미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 고유의 mapping이 요구된다. 부분적인 것들은 독자의 임의적인 구성력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거나 잠재적이다.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재판(1995년도에 이어 97년도에 다시 수정됨)을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2006/10/18 03:45 2006/10/18 0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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