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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ulationRonald Bogue, Deleuze's Way, Chapter 6, p.91 이하 요약1. - "인민의 창조"(집단성의 창의 문제)라고 하는 현대적 문제에서의 정치와 예술의 관계 Closed and Open Societies 1. - 베르그송의 경우, "우화"는 폐쇄사회의 핵심기능이다. 우화(종교, 신화 등)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되고, 사회가 유지되고 공고하게 된다. 3. 타인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사회적 응집력을 보장, 그러나 그 의미가 한없이 확장될 수는 없다. 사회의 기능은 집단의 자기방어이다. 그래서 사랑 역시 한 없이 확장될 수 없다. 함께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방어를 전제(타인에 대한 사랑 자체에는 타인에 대한 배제가 전제), 마찬가지로 사회는 유지되기 위해 타인들을 배제하고 방어해야 함. 지능의 경우, 어느 정도는 사회구조 형성에 유연성을 가지긴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폐쇄 사회"를 지향한다. 그 본질적 특징은 특정 개인 집단을 포함하기 위해, 다른 개인들은 배제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무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본능은 기본적으로 폐쇄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가족이나 도시에 대한 사랑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인류전체에 대한 사랑은 "열린 사회"의 존재를 전제한다. 4. 폐쇄사회의 특징: 정적이고, 습관과 전통에 의해 조절되고, 낡은 가정들, 실천들, 제도들이 본능처럼 작동, 자동화된 사회, 몽유병적 사회이다. 언어는 이러한 습관과 전통과 사회적 의무의 저장소 역할을 하고, 종교는 행위의 정적인 패턴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폐쇄사회의 종교에 있어 핵심적 요소는 "우화기능"(신화-창조)이다. "환상적 재현, 환상적 표상".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화기능은 종교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종교가 우화기능의 "존재이유"라고 한다. 그리고 이 둘은 폐쇄사회의 응집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5. 우화기능은 지능적 행위이지만 그 기능은 기능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경향과 반대. 6. 정태적 종교는 신성한 행위와 금기를 강화해서 사회적 의무를 고취. 죽음에 대한 깨달음의 절망에 대항하기 위해 불멸의 영혼을 믿게 하고, 자연의 초자연적 신비를 맏게 하여 무능력에 대한 인식을 점검. 여기에 우화기능이 한몫을 한다. 힘, 정령, 신들의 신화를 만들어 사회적 응집력과 개인의 만족을 강화(종교의 개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은 서로 뗄 수 없고 상호강화. 사회를 안정시키고, 개인의 만족을 가져온다). 우화를 통해 만들어진 신화는 "지능적 본능"의 산물이며, 이 신화들은 지능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표상들로, 이를 통해 자연이 자신을 보호하고, 믿음을 통해 지식의 위험으로부터 보호.(기독교에서 창세기는 그런 의미에서 지능과의 싸움) Hallucination and Emotion 1. 폐쇄적이고 정태적인 사회를 생산하는 기능을 하는 우화. 습관, 전통, 상식을 통해 몽유병적 반복 행위를 강화. 그러면 들뢰즈는 왜 우화기능에서 매력을 발견할까? 우화가 환각이나 경험의 아찔한 붕괴와 맺는 관계 때문일 것이다. 베르그송의 두 가지 예: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인이 겪은 환각(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죽을 뻔 한 순간에 갑자기 남자가 나타나서 그녀를 밀친 것같은 환각),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가 스탠포드에서 겪은 지진에 대한 자신의 경험. 이 두 예로부터 우화기능의 어떤 힘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로 엘리베이터의 여인의 경험의 경우, 그녀는 자신의 지능이 창조해 낸 기적적인 환각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Fabulation 자체가 그 여인의 환각과 같은 것으로, 사회적 붕괴와 개인의 절망의 공허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보호 망상 같은 것이다. 2. 두 번째 예는 윌리엄 제임스의 지진 경험 예. 그는 지진을 느끼면서 공포 보다는 쾌감을 느낀다. 운동감에 대한 실감, 친구가 말했던 그 지진과의 동일성을 경험한 것에 대한 유쾌함 등, 그는 지진을 느끼며 공포가 아니라 찬탄과 기쁨을 느꼈다. 그는 지진을 일종의 개인적 실체(individual entity)로 느꼈던 것이다. 지진을 개인화하여 일종의 우화 같은 형태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행위에서 이토록 생기(animus)와 의도(intent)를 가진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인간적 활동이 이토록 살아있는 행위자와 일치되는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 있음. 베르그송에 의하면 제임스의 지진에 대한 반응은 일종의 우화적 기능의 선언이라는 것. "원시적 정신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명인이 느끼는 우화기능, 즉 인간의 사유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라는 점이다. 지진의 충격은 경탄과 기쁨과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속성을 가진 의도와 인간성을 지진에 부여한다. 그러나 원시인들과는 달리, 완전히 인격화하지 않은 채로 우화적으로 기능한다. 즉 원시인들이었다면 악마를 떠올리거나 신을 떠올리며 인격화 했을 텐데, 제임스는 그렇지는 않았고, 지진 자체에 인격을 부여한다기 보다는 인격화된 모습으로 투사한다. 즉 원시적 정신상태보다 중화된 형태의 의인화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연적 사건은 개인적 사건이 되고, 여기에 사건과 개인 경험을 묶어주는 유대를 제공ㅎ하는 의도와 기본적 humanness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예에서 우리는 우화기능의 가장 단순한 형태를 보게 된다. 본능에 의해 강요된 지능은 상황을 변형시킨다. 그리고 확신과 믿음을 주는 이미지를 도출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 3. 허구는 마치 "초기 환각"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판단과 이성에 대항하게 한다. 허구의 이미지가 생생할수록 지각을 모방하게 되고, 이것은 행위를 막거나 변조시킨다. 즉 우화기능을 통해서 행동을 하게 되므로, 우화기능은 행동을 촉발시킬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고, 변조시킬 수도 있다. 왜냐면 사유를 통해서 만들어진 이미지와 우화가 지각을 대신해서 모방하기 때문에 행동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우화기능은 폐쇄사회를 만드는(왜냐면, 우화에는 친숙한 사회가 있고, 한정된 특정 사회와 관계, 공동체들이 있기 때문에?) 종교를 지원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유대를 해체하는 지능에 내재한 경향들을 극복한다. (즉 허구는 폐쇄사회의 구성요소이지만 동시에 폐쇄사회를 변조시키고 깨트리는 수단일 수도 있다. 지각을 모방하고 행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종교는 행위의 영역에 속한다(철학은 사유의 영역이다). 그리고 우화의 목적은 인간에게 종교의 교리에 따라 행위를 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으로 일관된 행위를 보증하기 위해 존재. 우화기능은 따라서 환각적 허구ㅡ지각을 모방하고 행위를 촉발하며, 따라서 판단과 이성의 운영에 대항하는 생생한, 사로잡는 이미지ㅡ를 창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한다. 4. 사건의 충격, 방향을 잃은 아찔한 순간에 우화가 출현하고, 이미지는 이성을 지나 직접 감각에 작용하여 행동을 부추긴다. 그러나 우화의 반대 지점에는 창조적 정서가 있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전통적 개념의 상상력 개념은 fabulation과 genuine artistic creation을 동일한 능력으로 혼동. 이 둘은 본성적으로 다르다. 보통의 예술가들은 기존의 사회가 제공하는 기성의 개념과 단어들을 수용하고, 이들을 결합해서 새로운 설정, 그러나 언어의 저장소에 새로움을 첨가하지도 못하고 표현적 가능성을 첨가하지 못함. 그러나 진짜 창조자들은 발생적이고 독특한 정서를 창조. 표현이 형언할 수 없게 하고, 작가들이 단어를 주조하고 개념을 창조하게 강요하고, 단어에 폭력을 가하고 언어의 요소에 압박을 가함 5. 정서는 평범한 구성과 진정한 창조 둘 모두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본성적으로 다르다. 두 종류의 정서: "infra-intellectual emotion", "supra-intellectual emotion"이 있다. 전자는 "개념이나 재현된 이미지의 결과"이며, 전통적으로 코드화된 감정이며, 독립적인 지성의 재현에 의해 촉발된다. 반면에 초-지능적 정서는 재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pregnant with representations, no one of which is actually formed, but which it draws or might draw from its substance by an organic development". 즉, "재현의 효과이면서, 재현에 덧붙여진 정서 이외에, 재현에 앞서는 정서, 재현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어느 정도는 재현의 원인이 되는 정서가 존재한다" 위대한 예술가는 새로운 정서를 창조한다. 6. 초-지능적 정서는 궁극적으로 elan vital의 선언이며, natura naturans의 힘의 선언이다. 이것들은 새로움을 만드는 힘이다. 창조적 정서의 기본 원리는 기쁨, 자유, 운동이며,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은 이 생의 약동에 충만해 잇는 사람들. 신비주의는 수동적이거나 사색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종교와 사회의 능동적 지지자들이며, 이것은 우화기능과 연관된 것들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보편적 사랑 인류애 모든 창조의 종교를 품고, 사랑은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열린 사회의 근간이 된다. 7.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잠재적 본능 / 생의 약동 => 우화기능/창조적 정서, 의무의 도덕/사랑의 도덕, 폐쇄사회/열린사회, 지능의 해체와 절망에 대항하는 잠재적 본능 / 창조적 약동의 선언으로서의 창조적 정서(잠재적 본능의 지배를 깨고 새로운 사회와 도덕적 질서를 가능케), => 폐쇄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점진적 변형이란 있을 수 없다. 도약, 단절, 폐쇄적 순환의 파열에서만 가능 8. 들뢰즈 역시 베르그송처럼 예술적 발명을 cosmic creation의 일반적 과정의 발현이라고 봄. 진정한 예술적 창조는 affective activity, desire, desiring production이라고 봄. 베르그송이 거칠게 말했던 creative emotion과 유사. 들뢰즈가 말한 언어의 minor use는 베르그송이 말한 "단어에 폭력을 가하고 긴장을 일으켜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감각양태의 창조"와 같은 말. 베르그송에게 진정한 창조는 열린 사회, 자유로운, 역동적으로 항상-생성되는 사회를 말한다. ㅇ는 들뢰즈가 말한 미래의 집단성과 유사. => 그러나 베르그송은 예술을 종교에 종속시키고, 예술적 발명을 신비주의가 열린사회를 그리는 과정으로 설명, 반면에 들뢰즈는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들뢰즈가 개별 작가들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민중의 형성, 즉 새로운 존재양태를 형성하는 능동적 집단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 => 베르그송은 우화기능과 예술적 창조를 분리했지만, 들뢰즈는 이를 결합시킨다. 엘리베이터 여인과 제임스의 예를 통해 베르그송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평형과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 문명화된 이성적 존재에 조차, 자동화되고, 잠재적 본능이 발동하는 우화적 기능이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시적" 사람들이라 불렀던 것의 믿음체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도약(평형이 깨지고 혼란스런 상황에서의 도약)은 사건의 충격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우화기능 역시 진정한 창조과정의 일부였다. 그 사건을 통해 도래할 민중의 발명을 형성하는. The people to come 1. 이 문단에서는 생의 약동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앙띠오디푸스를 예를들면서 욕망의 사회적 집단적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 욕망하는 주체가 형성하는 역사적 환각들은 자아를 넘어서 집단적이고 인종적이고 사회적 주체성, 즉 집단-주체를 드러낸다. 욕망 자체가 집단적으로 진행된다. 욕망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사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여러 관계들과 정동적 집단성을 원하는 것이다. 욕망 자체가 구성이고, (욕망은 여기에 없는 대상에 대한 신경증적 강박이 아니라 집합체의 구성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떤 여인이나 물건이 아니다. 욕망은 그 여인과 물건 주위에 감돌고 있는 컨텍스트 전체를 향해있다. 이렇게 집합체를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구성주의다.) 2. 여기서도 역시 앙띠오디푸스의 예를 들어 욕망은 사회적이며, 집단성의 형성과 분리될 수 없다고. 특히 열등한 인종과 우월한 인종은 인종적 환타지를 서로 다르게 구성. 열등한 인종은 혁명적, 분열적 욕망, 타자가 되려는 욕망, 새로운 집단성을 만들려고 한다. 반면에 우월한 인종은 편집증적 욕망을 표현. 특권과 억압의 사회구조를 영속화하려고 한다고. 혁명적 욕망은 집단-주체(group-subjects)를 창조하고, 그 내적 관계의 패턴이 이행적이고, transverse하고, forever mortal이며, 위계가 없거나 집단적 초-자아인 반면, 편집증적 욕망은 주체화된 집단(subjected groups)의 통제와 지배가 퍼져있다고. 3. 니체가 말했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바로 나이다", 슈레버의 망상 속에 나오는 독일인, 아리아인, 유태인, 카톨릭교도, 슬라브, 예수교, 몽골 이 모두는 바로 욕망의 사회정치적 차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정신병자의 언어는 사회에의 정동적 참여(affective engagement with the social)를 드러내고 있다. 집단적 욕망의 역사적 정치적 투자를 식별하는 진단적 도구가 된다. 인종들의 환영적 담론들은 분열증분석 정치학의 우선적 임무를 논의하는 수단, 즉 능동적이고, 자기-결정적 집단의 형성, 즉 민중의 발명의 문제 4. 카프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소수 문학이란 결국 민중의 문제 5. 중략 6. 페로와 루쉬는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외부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개입을 해서 공동작업 과정을 통해 찍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돌고래 영화의 경우 페로는 퀘벡사람들 집단에게 제안을 하여 그들이 오래동안 잊혀졌던 공동사냥, 즉 이상한 기둥을 바다에 세우고 세인트 로렌스 강에, 흰 돌고래를 잡으라고 한 것 ,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이 그 사냥을 하는 것을 다큐로 찍은 것. 사람들은 게획을 세우고 사냥을 실행 . . 그러면서 그들은 먼 기억들 조상들의 사냥 음악 등을 떠올리고 공유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상과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집단적인 과거를 말할 때 카메라는 그들을 보착한다. 이를 베로의 말로 "in a state of legending," "of legending in flagrante delicto [en flagrant delit de legender]," 즉, 새로운 communal lore를 짓는 과정 속에 있는 것. 7. 이 '전설화'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fabulation"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소수자들이 자기-발명의 과정 속에 참여하는 실천이었던 것. 퀘벡 사람들은 anglophone canadian society 내에서 주변화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프랑스 문화 내에 있음. .이들은 비-표준화된 방언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로 자신도 바로 이 퀘벡인 이었지만 그는 교육을 잘 받은 다른 퀘벡사람들럼 옛-영광의 프랑스 제국의 이미지들과 담론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문어체 형식, 표준 발음, 그리고 "올바른 프랑스"의 교조적 가치에 의해 흡수되었고 형성되었기 때문. 그의 말: "The famous Age of Enlightenment never spoke of the people of the 17th century. That century produced princely images. A princely imaginary. And a writing and a language were imposed on people who had a language and did not have writing . . . Each epoch produces royal images, images that normalize . . . My soul was conditioned by centuries of the French Academy. Through writing I became a stranger to my own surroundings. Superior.[p.56]" 8. 돌고래 영화에서 페로는 대중들의 퀘벡 구어체에 목소리를 부여, 그리고 그 발화에 자기가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시작한 집단적 자기-발명 프로젝트의 필수적인 요소로 만들었음. . 들뢰즈의 분석에서, 페로의 노력은 Anglophone, 고급 프랑스 문화의 교조에 반대. 그 문화의 진리는 "언제나 주인의 진리 또는 식민지배자의 진리였으며", 이렇게 반대할 수 있는 수단은 "가난한 자의 fabulative function"이었다고 분석. 페로의 영화에서, 우리는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을 'fictioning' 함으로써 자신을 새로운 존재가 되게 생성하게 했다는 점, 그는 'legending in flagrante delicto'하고 따라서 그의 인민들의 발명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실제의 퀘벡 어부들은 "스스로 타자가 되고, 그가 자신을 fictive 되지 않고 fabulating하게 된 것이다"(IT 196/150) 9. Fabulation은 지배적 사회 질서의 수용된 진리에 도전, 그럼 점에서 fabulation은 "falsifies"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발명을 통해 그 자신의 진리를 생산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창조적인 "거짓말의 힘"을 선헌한다.(일종의 시네마베리테.. 공동작업으로 지어내는 이야기, 감독, 대상자의 공동작업. 따라서 감독 자신도 그 인물의 일부로서 변화한다) 페로의 영화에서, falsifying하는 fabulation의 힘은 감독과 그 배우들이 참여하는 공동과정을 통해 작동한다. 페로는 주장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는 자신의 문학, 고전적 프랑스 정신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그의 잘 교육받은 인터뷰 중재자들 중 하나가 말한다. 페로의 필름에서 "당신 바로 자신인 농부는 언제나 말을 할 수 있잖아요,"라고. 페로는 반대한다. "아니요. 왜냐면 나는 내가 아닌 농부에 의해 식민화되었고, Le Notre(베르사유 정원 건축가)에 의해 식민화되었다고. 내가 읽는 법을 배운 것은 Le Notre의 기하학에 따르는 책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야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죠"(Perrault 56). 그에겐 퀘벡 사람들이 중재자가 되기를 원했다 . .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구어전통을 잃지 않고 있었고, 그러나 그 사람들은 또한 페로가 필요 . . 옛 조상의 그 고래잡이를 하게 해서 집단 기억을 부활하고 새로운 집단성의 발명을 끄집어 내기 때문에: " 나는 다시 신화로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탄생시키고, 신화를 피하고, 전통을 빠져나가고, Writings을 피하려는 것. 나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쓰기를 바라고, Writings로부터 그들 자신을 해방시키킬 원합니다"(p. 56) 페로와 섬주민들은 상호 중재자로서, 받아들인 진리를 falsification 속에 함께 참여, 도래할 인민들의 "legending"에 참여: "Thus it is that I am interceded by Alexis, and Grand-Louis and Leopold and Joachim and all of the Ile-aux-Coudres [the island community of Pour la suite du monde] and little by little by all of Quebec. So that I might know what I am outside writing"(p. 56) 10. 페로와 그 대상자들의 관계는 들뢰즈가 보기엔 예술가가 민중들과 맺는 적절한 관계의 선언. 카프카의 <심판>에서처럼 실제적 예술가와 잠재적 공동체는 단일한 기계의 부분들이며, 예술작품은 이들의 상호 개입 속에서 그 힘들의 발생적 연접이 된다. 우화는 그 과정의 이름이며, 거기서 예술작품은 도래할 민중의 발경을 개시. . 페로의 영화에서 퀘벡 사람들의 설화는 "legending"에 참여함으로써 우화적 과정의 중심을 이룬다. Fabulation and Narration 1. 우화 = 허구, 발명, 거짓의 힘을 의미. 우화는 대체로 이야기, 전설, 신화 등의 뜻. 그렇다면 narrative와 우화의 차이는? 2. 베르그송이 신화에서 인물을 발명하고 창조하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신화의 내용,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간의 철학자이고 서사는 시간의 차원의 문제임에도 서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폐쇄사회 형성에서 종교의 기능이었지 서사 자체는 아니었다. 3. 서사와 언어는 그 자체로 폐쇄사회와 친밀하다. 언어에는 사회의 영혼이 내재해 있다. 셰쇄사회의 사회적 의무가 언어 속에 내재. 인간 사회의 최초의 형태가 있는 어디든지 언어 속에 4. 우화적 예술과 정서적, 창조적 예술은 다르다. 우화적 예술은 창조적 정서적 예술보다 열등하다고 베르그송은 감추지 않음. 소설은 우화이고, 음악은 정서와 창조에 속한다. 서사가 시간의 예술이고,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단어들과 제한적인 습관, 관습, 가정과 편견등 자연언어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을 넘어서, 음악은 직접적으로 emotive art이다. 따라서 아마도 베르그송의 서사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그의 우화에 대한 낮은 관심을 반영, 그리고 진정한 예술에 대한 그의 감각, 본질적으로 초-언어적인 것으로서의 진정한 ㅖ술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 5. 서사에 대한 폄하는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소살가에 대한 세권의 책 (프루스트, 카프카, 마조흐)을 썼지만, 그의 관심은 소설의 내용이나 이야기 전개 서사,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비연대기적 비전에관심, 마조흐의 경우 그는 이야기 전개가 아니라, 얼어붙은 따블로의 연쇄로서의 그의 소설을 지적 . . 내러티브는 단지 무시간적 마조히즘적 따블로를 연결하는 단순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 . 카프카의 경우도 플롯상의 미숙함 결점이 많은 플롯이 열린 결말의 기능을 하는 중심적 측면이라고 . . 가령 심판에서 K의 죽음은 꿈장면이고, 끊없는 에피소드의 연쇄가 가능, . 결국, 내러티브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6.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논의에서도 베이컨이 그림에서의 서사적 "일러스트레이션"에 대한 혐오를 논의, 베이컨의 목적은 이야기와 연계된 관례로부터 자유로운 이미지, "the brutality of fact"를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 . 영화에서도 감독은 스토리-텔러가 아니라 시간-공간의 조각가라고. 내러티브는 시간 구조의 부수적 산물, 고전 영화의 전통적 서사는 운동-이미지에서 나오고, 이는 감각-운동적 도식에서 조절됨 . . 현대 영화의 파편화된 혼란스러운 서사는 비연대기적 시간, 즉 감각운동도식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비연대기적 시간의 지표라고. 베켓의 텔레비전 연극인 "The Exhausted"에서도, 들뢰즈는 그의 침묵, 단어를 견딜 수 없어하는 면을 강조. . 단어에 구멍을 내고, 단어들 사이에서 비언어적 "something"을 추출 . . 단어들의 문제는 그것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계산들, 의미들, 의도들, 개인적 추억들, 낡은 습관들로 가득차 있으며, 이 모두를 굳건히 한다는데 있다. 베켓의 각 인물들은 "가능 세계", an "Other", 그리고 the "Other"를 드러낸다. 7. 들뢰즈의 베켓 연구의 목적은 "순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데 있다. 즉 모든 인간적인 의도, 계산, 의도들, 추억들, 이야기들과 연관된 것들을 제거한 순수 이미지. . 그리고 결국 드로리즈가 예술과 우화 개념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바로 visual image이다. 문학은 언제나 "생성"과 "역능"과 연관, . . 타자-되기의 변신과정, 그리고 이 생성과 역능은 저자나 인물의 개인적 정서, 기억, 꿈, 환상과는 관계가 없다고. 문학적 인물들은 개별화된다, 그러나 그 모든 개별적 특징들은 하나의 비전, 그들을 무한한 것으로 데려다주는 어떤 비전으로 기양한다. 너무 강한 생성으로. . . fabulation 없는 문학은 없다. 그러나 베르그송이 보기에 fabulation, fabulative function은 상상이나 자아의 투사로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비전들로 되어 있다. 그것은 이 생성들과 힘들로 상승한다. => 여기서 말하는 비전이란 잠재태이다. 육체를 초월하면서도 내재한 잠재적 이미지들. 이것은 개인성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우화가 드러내는 것은 이 잠재적 이미지들인데,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의 도약(elan vital)이 아닌가? => 우회 기능의 두 측면이 있다. 자아 투사만이 아니라 생성과 힘의 측면 8. 다음 문단은 T.E. Lawrence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 . 우화기능은 자기의 이미지, 타자의 이미지를 사물과 미래에 투사한다는 것, 너무 강해서 스스로 살아내는 이미지 . .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우화기능은 표현과 동의어처럼 말하고 있다. (중략) 9. 우화와 환각의 관계 . . . 그리고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베르그송은 우화와 환각을 연결 . . "만일에 허구적 이미지가 너무 생생ㅎ해서 사로잡으면, 지각을 모방하고, 이것은 행위를 발해하거나 변조한다" 베르그송에게 우화는 그 이미지를 현실에 강제하는 힘이며, 이성과 지능의 작동에 방해하는 힘,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 도덕과 폐쇄사회를 위해서만 존재. . . 그러나 드로리즈에게 우화기능은 예술에 적합한 기능 . .그것으 ㄴ생명이 자기 자신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세계에 투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청각적 비전에 대한 논의 . . 문학의 목적은 언어를 시청각적으로 전도된 측면 외부로 밀어 내는 것 . . Visions과 Auditions는 여기서 환각적 비전과 청각을 말하는데, 이것은 언어를 사로잡고, 그들이 세계 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10. 우화란 따라서 "visions과 auditions", "becomings", "powers", "giants"를 창조하는 환각적 힘이다. . 집단성의 타자되기의 이미지 . . 수용된 진리를 변조하고 바꾸고 위조해서 새로운 것을 꾸며내기 11. 모든 사회적 혁명에는 사건의 시간이 필요 . . 그것은 사회적 결정이나 인과적 계열로 환원할 수 없다 . . 역사가들은 인과관계를 연구 . . 그러나 사건은 인과성과 단절 한다. . 그것은 bifurcation이며, 법칙 관계로부터의 이탈이며, 가능성의 새로운 장을 여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견지의 상태, 견자들의 현상, . . 갑자가 보게 되는 참을 수 없는 것, 다른 무엇인가의 가능성을 보는 것, . . 니체적으로 말해 untimely즉 , 우리 시대에 반대하는,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 위에서 작용하는, 바라건데, 도래할 시간을 위한 것, . . 이것은 서사적 인과성의 역사로부터의 해방된 시간이며, 미래와의 관계에서 미결정된 것이다. 12. 다음은 푸코에 대한 언급. . .seeing, the intolerable, the disruptive event의 연계들 . . 중략 13. 깊게 보는 것은 담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 즉 수용된 진리에 대한 비판, 현재적 현실에 대한 비판 . . 환각의 순간, 시청각적 비전은 참을 수 엇는 것이 갑자기 보이는 것이고, 그러나 과거에 의해 둘러싸이지 않은 ㅅ로운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것 . . 그 사건이란 바로 제임스의 지진이나 여인의 현기증 순간과 같은 것이다. . 이것은 평이한 것에 균열을 내어 예측되지 않는 것을 여는 것, 환각적 이미지를 여는 것, . 우화는 사건과 함께 나온다. . 우화의 비전은 그 사건 속에서 출현한다. . 이 비전들은 그 자체 사건들을 구성한다. . 우화는 가시적인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수용된 진리를 위조하는 비전들을 창조 그럼으롰 현재를 비판하고, 반면, 그 동일한 비전들은 마치 거인의 신화적 형상처럼 그러나 탐구된 가능성들로 빛을 발한다. . 우화의 비전은 역사적 연속성을 깨고 전통적 내러티브를 단절시킨다. . 그들은 untimely visions이며, 역동적인 생성과 역능이며, 그러나 서사적 가능성 속에서 특정되지 않는다. . 따라서 이야기를 생성하는 시간적 힘, 그러나 그 자체로 내러티브의 요소들은 아닌 The Two Sources of Fabulation 지금까지 한 얘기들을 좋은 말은 모두 골라 종합해서 정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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