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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bernetics

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사이버네틱 미학,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의 미래

공간과 소통은 전자적 virtuality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되고 있고, 텍스트와 상호텍스트성은 하이퍼 텍스트성으로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의 문제는 정보기술 뿐 아니라, 그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야기되는 인식론적 윤리적 사회 정치적인 복잡한 결과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초기의 패러다임(시각적/물질적 현존이나 선형적 독점적 발화)에 젖어있던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반대로, 구식 패러다임을 포기한 자들과 새로운 움직임의 선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환희에 가까운 희망을 보여 주었다. 이 글의 목적은 하이퍼 매체가 읽기 과정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키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인쇄물에서 디지털 텍스트로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현재, 나는 지금 한창 대두되고 있는 하이퍼 소설이라는 장르를 미학적으로 접근하고, 여러 형태의 가상현실 매체의 미래를 논하려 한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극단적인 두 반응이 있지만, 여기서는 사이버네틱스의 미학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적절한 결합에 집중하고자 한다.

사이버네틱스적 읽기는 점점 선형적이고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인쇄물 읽기 방식을 대체하고 있다. 하이퍼 텍스트의 이상적인 독자는 대중매체와 정보기술의 상호 텍스트성과 잠재성(virtualities)으로 구성된 독자이다. . . . 내 생각엔, 하이퍼텍스트가 하나의 예술적 형식으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매체(그래픽, 오디오, 필름)의 가상적 즉시성, 자발성, 복잡한 운동, 풍부한 텍스트망과 텍스트를 재구성하기 위한 창조적 매개의 형식이 독자에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 상상적 세계 속에 침잠했다는 즐거움(리얼리즘 문학의 성과)과 도구를 통해 그 세계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즐거움(가상현실 기술의 목표)을 주지 못하면 하이퍼 텍스트의 그 잠재성은 실현되기 어렵다. . . . Michael Joyce, Carolyn Guyer와 Stuart Moulthrop의 하이퍼 소설을 보면, 이들 모두가 독자에게 새 장르를 알리기 위해 하이퍼 텍스트에 대한 메타서사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퍼텍스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분석하려면 일련의 궤적들을 볼 필요가 있다. 예로, 1945년 Vannevar Bush의 '메멕스'는 개인이 자신의 기록이나 문서 책들을 저장하고, 이 텍스트들간에 경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불러올 수 있는 장치이며, 이는 기억이 연상으로 연결된 개념들이 의미론적 망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메멕스는 인간의 인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료들을 구조화하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이 생각에 약간 영향을 받아, Theodore Nelson과 Douglas Englebart는 60년대에 텍스트들을 연결 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했다. Nelson은 'hypertext'라는 용어를 65년에 만들었고, 80년에 Literary Machines 에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 새로운 텍스트성을 "독자들에 의해 조절되는 링크들로 이루어진 비연속적 글쓰기"라고 부연했다.

하이퍼 텍스트는, 구조주의나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발단이 되었던, 쓰고 읽는 방식의 실증적 예를 보여주며(metatext), 이 이론들을 실천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 바흐친의 dialogism과 heteroglossia, 레비스트로스의 bricolage, 바르트의 생산자로서의 독자와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구분, 데리다의 로고스의 탈 중심화와 현존/부재 이분법의 해체, 들뢰즈 가따리의 rhizome, 그리고 푸코가 말한 독자의 입장(위치)으로서의 저자의 기능 등이 있다. 사이버네틱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하이퍼 소설의 노력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적 실험문학에서도 이미 성취된바 있다. 조이스의 'Ulysses'나 'Finnegan's Wake',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the waves', 거트루드 스타인의 'The Making of Americans', 토마스 핀천의 'Gravity's Rainbow',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Pale Fire', 이탈로 칼비노의 '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등이 그 예이다. 이 작품들은 사이버네틱스와 자주 연관지어 언급되는 사이버펑크 소설인 윌리엄 깁슨의 'Neuromancer'보다 더 하이퍼 텍스트를 닮고 있다. 깁슨의 소설은 사이버 공간의 미래에서 일어나는 삶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그 형식은 전통적인 리얼리즘 방식이다. Moulthrop은 사이버펑크를 하나의 순환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여전히 똑같이 꾸러미로 제시된 구식의 미래로 되돌아가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결함이 많은 사회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는 깁슨과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버츄얼 문화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갖게 해줄 전자적 글쓰기 양식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급진적인 하이퍼 텍스트 작가인 멀드롭은 작가들이 경전화된 책에 묶여 소심함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는 인쇄물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장벽이며, 사이버네틱스적인 현실을 강박적으로 재현하려고만 했지, 실제로는 하이퍼 텍스트 미디어를 사용하여 실례를 보여주는 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한참이 지난 후 Robert Coover 같은 포스트 모던 작가는 자신의 실험을 인쇄물 장벽을 초월하여 확장했다. . . . 특히 그는 집단 글쓰기 구성을 즐겼는데, 그가 보기에 매우 저돌적이며 창의적이었다 . . . : "익명으로 짜여진 조각들로 된 이 공간은 계속 온라인 상태이며, 각각 새로운 워크숍 학생들 집단은 거기서 초대받아 하이퍼텍스트 호텔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1세기나 2세기 가량 더 두고 보고 싶다".

후버가 발견한 것은 '내러티브의 실질적인 흐름은 조각난 텍스트들간의 연결에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의 창조적 영감은 파편적인 기능을 가진 조각난 텍스트들간의 틈새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플롯이나 성격 전개와는 다르게 하이퍼 텍스트의 창조성은 링크, 여정, 순환, 지도제작(주1) 등과 더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이퍼텍스트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특히 위계적 구조를 배제하고, 정보의 불연속적인 조각의 구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강조된다. 이 조각들은 독자들이 참여하여 배열하지 않으면 내러티브가 되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하이퍼 텍스트는 독자에게 복잡하게 얽힌 텍스트 목록을 조직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유동성, 우연성, 미결정성, 복수성, 불연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방식이 미래적임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작가의 천재성에 위협이 될 수 있고, 탈 중심이나 복수성의 과잉을 초래할 수 있으며, 선형적인 이야기의 교환에 머물 수 있음을 견지한다. 이렇게 볼 때, 하이퍼 텍스트는 너무 과장되거나 힘을 잃고 축 늘어지거나 싸구려 열광이 될 위험도 있다.

조이스의 "Afternoon", 가이어의 "Quibbling", 멀드롭의 "Victory Garden"을 읽고 나면 쿠버가 경고했던 말에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하이퍼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공간을 벗어나서 장면들과 인물들의 대화나 환영들을 통해 부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 . 이야기를 찾아가는 길들이 미로 같아서, 그것을 찾다보면 적어도 얼마간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질지도 모른다. . . . 그러나 이 즐거움은 깊은 성찰이나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미로 찾기 여행이 주는 강요라 할까?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텍스트 공간이든 간에 탐정이야기의 플롯같이 해결의 열쇠를 찾기 위해 고문당하는 듯한 이야기는 확실히 독자가 부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퍼 소설의 또 다른 즐거움은 동적인 활동이라 할 만 한데, 마우스를 이리저리 눌러 여러 항목들을 한번에 보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른 새로운 항목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러나 이 또한 실질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하이퍼 텍스트를 읽고 있자면, 독자는 단순히 표면적인 활동에 머문다. 창조적인 쌍방향적 사이버네틱 경험(MUD, MOOs, MUSHes 게임등?)과는 좀 다른 면모이다.

Michael Joyce의 Afternoon은 하이퍼 소설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텍스트이다.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미스터리 같다. 불륜이 일어나고, 혹은 잠재적으로만 일어나고(환상속에서 처럼) 그리고/혹은 일어나지 않고. 마찬가지로, 이야기에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가 나오고, 그것은 그리고/혹은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그 안에서 열광적이고/거나 무관심한 인물의 아들이 죽고, 그리고/혹은 다치고/거나 관련이 없거나. . . 등 조이스의 이야기의 복잡함은 독자들이 요구되는 다른 노드들의 연쇄를 다 여행해야만 특정한 노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된 경로들은 다른 많은 장소들에서 각각 다른 것으로 횡단한다. 그래서 각각의 경로들은 지나갈 때마다 서로 다르게 링크되거나 연결된다. . . . 그럼으로써 "<만일 내가 네 옛 아내와 잠을 잔다면 어떤 느낌이지?>" 와 같은 질문은 네 개 이상의 이야기 문맥 속에서 매번 다르게 굴절되는 것이다.

스토리 스페이스 프로그램은 기본 옵션을 제공하여 독자가 선택하지 않고도, 텍스트 전체를 이동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수동적이고, 선형적이고, 비모험적이긴 하지만, 조이스를 포함해서 이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 기본옵션을 통해 변화를 요구하지만 여전히 인쇄문화 습관에 젖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기본옵션으로 이야기 전체를 훑고 나면, 이제 부스러기를 고르고, 약간 거칠게, 여기에 있는 단어들을 활동적으로 쫓아 다른 이야기 공간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단어들을 찾는 일은 즐겁지만, 찾아서 클릭하면 다른 스크린으로 넘어가고, 다른 단어를 찾으려면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소개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분명한 신호가 없는 것은 당신들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고 유희를 도모하여 그 깊이에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관심 가는 단어에 클릭 하세요". 구석에 있는 단어는 경로를 유발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다른 경로에 자리를 내어 준다. 그에 따르면 단어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texture'를 이루고 있으며, 독자들과의 실제 상호작용은 "texture의 추구에 있다고 "말한다. Texture를 통해, 조이스는 언외(言外)의 느낌과 낯설음으로부터 공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 .

그러나 만일에 그가 생각했던 흥미로운 단어들을 독자가 똑같이 선택한다면, 조이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상호작용의 희망은 실현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emphysematous라는 이상한 형용사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조이스의 관점에서 직물화되지 못했다. 조이스의 이 텍스트가 도모하는 상호작용의 성과를 판단하면서 그는 인정하기를 "부분적으로 실패한 시도"라고 했다. "구성적"이기 보다는 "탐색적"일 뿐이다. 탐색적이라는 말은 독자들이 이야기 경로들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매개되는 것에 제한이 있다느 말이고, 구성적이라는 말은 독자들이 구조적으로 그 텍스트를 변경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적 하이퍼 텍스트에서 독자는 저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의 기대와 작가의 생산간의 이러한 갭은 상호작용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독자들과 텍스트 작가들간의 수많은 인터페이스가 있어야 하며, 단어 선택의 경우, 독자들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 충분해야한다. . . . 모험의 차원에서 결국 이야기의 놀라움 같은 것 말이다. 하이퍼 작가들에 의해 고안된 비틀고, 바꾸고, 돌고 하는 장치들이 놀라움을 주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경로에 다달았을 때 나는 실망했다. 하이퍼 경험은 선전과는 많이 다르다: 내가 기대했던 끝없는 이야기(칸트적 의미에서 양적/수학적 숭고와 같이)는커녕 너무 단순했다. 그리고 비전통적이거나 거칠기보다는 오히려 섬세하고 절제된 느낌이었다.

조이스 작품에서 보게되는 서정적 아름다움의 경우도, 이야기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쿠버가 우려했던 것처럼 서사운동을 멈추게하여 축 늘어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 . 여러 가지로 파편화된 서정적이고 세밀한 묘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머물러 한참 그것을 생각하게 하여, 하이퍼 매체의 활동적 잠재성을 축소하고 정체된 상태의 집중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Guyer의 Quibbling은 조이스의 텍스트보다 덜 완벽하고 꽉 짜여지지 않았다. 가이어의 텍스트는 근사한 산문 몇 편을 통해 중세 수녀 마가렛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헨리라는 수사와 관능적 관계에 빠진다. . . . 그러나 이 서정적인 구문들은 조이스의 그것 보다 확대되고 이질적이고 대화적인 텍스트로 짜여져 있다. 가이어는 단호하게 관념적 심미주의를 거부하여, 천제로서의 단일한 존재인 작가, 유기적 총체로서의 예술작품, 거리를 두고 관조함으로써 획득되는 감수성(reception) 등의 개념을 거부한다.

가이어는 우선 독자를 위해 지도와 챠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목록으로 만든 지도는 독자들에 대한 그녀의 세심한 주의를 알 수 있다. . . 종종 작가-화자가 독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작가의 이야기 선택과 독자의 보고싶은 희망을 둘 다 고려한 것이다: "어디 봅시다. 여기에 링크를 놓을 테니, 한번 찾아보시죠. 미스터리 좋아하죠?"라는 식으로 화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내기도 하며, "따라오지만 말고, 저 변덕스러운 것을 잡으세요 . . ." 라고 말함으로써 독자들의 기대나 이야기 전통을 조소하기도 한다.

조이스의 이야기는 중심 인물들의 상호작용을 따라 움직이지만, 가이어의 텍스트는 지각연상을 통해 퍼져나간다. 예로, 한 남자의 팔의 촉각-시각적 굴곡으로 시작하여, 어떤 여자의 등, 다음엔 손에 쥐인 멜론, 다시 점토로 된 병의 굴곡 등으로 이동한다. 다른 형태의 응집력을 위해 이야기의 응집력을 피하면서, 그녀는 일종의 흐르는 망을 구성하여 텍스트 요소들간의 연결을 퍼트리고 있다.

화자는 스스로 이야기 조직을 변화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의심해보고, 그 대답을 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히기도 한다 . . . . 잡지 목록 중 하나에서 가이어는 Mary Gordon의 에세이집에 대한 비평을 읽은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언급했던 고든의 인용구를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 . .

가이어의 텍스트로 알수 있는 것은 상호텍스트성이 하이퍼 소설에서 표제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다른 작가나 화자로부터 나온 텍스트 스크린들(보르헤스, 바르뜨, 보들리야르, 베이슨,조지 부시, 바이어니 . . .이들 작가들은 다만가이어의 텍스트에 나오는 B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이들일 뿐이다)은 직접적인 코멘트 없이 웹 상에서 짜여진다. 이들간에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또한 "marginal notes" 메뉴선택을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텍스트들을 하이퍼텍스트에 첨가할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텍스트에 동화되지 않고 서로 불연속하는 파편들(다른 작가의 텍스트들)을 포함시킴으로써 "main"텍스트의 위계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 하이퍼 텍스트는 바흐친이 말하는 dialogic과 heteroglossic적인 경향으로 간다. 이것은 인쇄 문화의 텍스트가 단일 화자나 작가의 목소리나 관점에 종속된 상태에서 다른 텍스트를 끌어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단일목소리/독백적인 텍스트는 다른 모든 작가들을(인용되든, 부연하든 혹은 인유되든) 허수아비로 만들며, 원래 목소리를 묽게 하여 작가가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게 한다. 랜도우는 바흐친이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는 방법이 책에서의 형식보다는 하이퍼 텍스트의 형식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바흐친 주석가인 Caryl Emerson은 바흐친이 인용할 때 "상세하게 인용하고, 각각의 목소리를 완전히 인용한다. 인용하는 작가의 특권적인 힘을 인식한 탓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주2).

Moulthrop의 Victory Garden은 조이스나 가이어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 이는 하이퍼 소설 장르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야기 노드의 부분적인 지도를 삽입하고 북쪽 남쪽 정원 구역의 형식으로 경로들을 연결한다. 지도 없이는 읽기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순환고리들이 있어 단순히 기본 옵션 버튼만을 클릭하는 독자에게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 . . 빅토리 정원은 독자에게 처음 몇 개의 화면 안에서 경로를 선택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다. . . .

멀드롭의 초기 작품은 핀쳔에 집중해 있었다. . . . 빅토리 정원에서도 핀쳔의 작품의 영향이 많이 있다. 핀쳔의 작품에서 2차대전과 베트남전쟁이 뒤섞인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전과 걸프전이 섞여 있다. 빅토리 정원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는 핀쳔의 편집병적 인물인 Boris Urquhart이다. 그는 무의식과 전자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에 가담하여 "세계 최초의 쌍방향적 꿈"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이상한 인물들로 가득차 있고, . . . 이야기의 어조는 갑자기 달라지고 유머러스한 문구들이나 정치적인 심각한 문구들, 포스트 모던적인 매체의 비판과 전화내용 등이 여기저기 병치되어 있다. . . .

조이스나 가이어처럼 멀드롭은 하이퍼 텍스트성에 대해 메타서사적 관찰을 시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하이퍼 텍스트는 정보들의 일시적인 흐름을 능동적으로 관리하고 다루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다. 이 매체는 "발명하고, 발견하고, 쳐다보고, 여러 가지의 조직적인 구조들을 실험"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보를 재구성하고 인식의 지도를 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연속하는 이러저러한 텍스트 파편들을 땜질하여 새롭게 결합하는 기술의 효과는 지각이나 개념에 관련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은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해준다: "비록 단어생산이 가끔은 불연속을 창조하지만, 이는 또한 연결 지형을 만들기도 한다". 멀드롭은 paraknowledge(Lyotard의 paralogy에서 암시 받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편집병과 지식의 관계를 설정하고 모든 것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멀드롭은 질서의 개념은 무질서로부터 출현한다는 카오스 이론을 상기시키고,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확률론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기본옵션으로 제시된 경로를 바꾸어 정보의 바다에서 길들을 연결하고 찾으라고 요구한다. 하이퍼 텍스트의 혼돈을 보고 있지만 말고, 독자들은 질서를 구성하는 임의적이고 즉흥적인 결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 문학의 미적 가치를 판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매체에 적합한 규준을 사용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 매체는 독자의 상호작용을 최대화했을 때 완전히 실현된다. 무작위성과 확장성만으로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미적 가치나 성공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사실 무작위성과 확장성은 그 자체로 하이퍼 텍스트 작가가 물신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쿠버의 관찰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어떠한 방향에서건 이야기를 취할 수 있는 작가의 자유는 의무가 되어 버린다: 결국 그 자유는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몇몇 하이퍼 소설의 생산과 판매에서 보면, 텍스트의 확장, 복수성과 복잡성에 관한 이러한 강조를 볼 수 있다 ― 예로, John McDaid가 쓴 "Uncle Buddy's Phantom Funhouse"의 기술적 포트래치가 있는데, 이것은 Eastgate Systems가 "Five disks Two basement tapes One chocolate box Too many links to count"라고 광고하는 소책자를 판매한다.

복수성과 확장성이 여러 독자들에 의해 텍스트로 확장될 때, 하이퍼텍스트는 그 잠재성을 실현하게 되며 단순한 탐색이 아닌 구성이 된다. 이 효과를 성취한 작품이 바로 Deena Larsen의 "Marble Springs"이다. 역시 Eastgate 판매 책자에서, 이 작품은 "an open constructive hypertext"라고 적혀있다. 라슨의 텍스는 쌍방향적인 시인데, 미 서부 변방에 사는 여인들의 삶을 탐구한다. 디자인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유령마을의 교회의 익명의 저자들이 있고, 이들은 독자들을 끌어들여 텍스트 전체에 널려진 실마리에 숨겨진 시인들의 정체성을 찾도록 한다. 이 하이퍼 텍스트는 복잡한 망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문화의 여인들간에 상호연결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라슨의 헌신적 연구에서 구성된 것으로, 그러한 법률, 종교, 이불 누비기나 요리와 같은 주제들에 관한 폭넓은 전기들로 연결된 노드로 구성되었다. 구성적 하이퍼텍스트로서 Marble Springs는 독자를 부추겨서 새로운 인물들과 이야기를 덧붙이게 하여 새로운 연결을 도모한다. 또한 라슨의 텍스트를 역사와 문학 수업에서 일어나는 독자-작가간의 쌍방향적 교육과 창조적 협동과제로 계획할 수 도 있다.

6년 전에 New Literary History에 글을 쓴, Richard Ziegfeld는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는 곧 독자들에게 문학텍스트를 상호 재구성하게 할 뿐 아니라, 독자들의 반응들로부터 자료들을 모아 미래의 텍스트(예로, cybernetic feedback loop)에서 독자들의 참여에 의해 하이퍼텍스트 매체를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비록 요즘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는 아직 독자들의 반응을 수집할 능력이 없지만, 새로운 매체에 빠진 많은 작가들 대부분은 하이퍼 텍스트를 자신의 수업에 사용하고 자신의 텍스트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학자들이다. 독자가 고무되어 자기 자신을 반추할 수 있도록 하는 가이어의 텍스트와 더불어, 조이스에서 라슨으로 이어지는 궤적은, 독자들의 쌍방향성에 대한 커지는 욕구가 당연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읽기의 이러한 면모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18세기이래, 칸트나 코울리지나 아놀드, 그리고 리차즈와 크린스 부룩등이 말하는 읽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올바른 반응이라는 개념은 위에서부터 문화를 주입하는 교육적 방식을 특징짓는데, 이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주체적 경험의 한계나 특수성을 초월하여 허가받은 문학 독자가 되고, 심미적 수용과 심미적 창조를 일치시키도록 강요했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고급)문화를 독자에게 하향시키기보다는, (독자의)문화를 상향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이퍼텍스트가 쓰기, 읽기 연구 비판적 사고를 촉진시키기 위한 교육 도구로 폭넓게 사용된다면, 예술 형식으로서 하이퍼 텍스트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지배적인 문학매체의 자리를 차지해 왔던 인쇄물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이것들은 출판과 비평이라는 구비된 제도를 포함하고 있다: . . . Raymond Carver, Jayne Anne Phillips, Brett Easton Ellis 그리고 Bobbie Ann Mason과 같은 신사실주의 작가들의 문학의 위상과 대중성은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리얼리즘적 서사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아직도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선호하고 물질적 감각을 즐기고 묶인 책을 들고 다니길 즐기는 독자들이 있는 한, 여전히 문학 인쇄물 산업은 존속할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에 도전하는 세력은 가상현실 기술에서 출현할 것이다: 완전히 매몰된 가상 경험(시각 청각 헤드셋이나 장갑 혹은 옷 등을 필요로 하는)은 점점 세련되고; 전자 토론이나 동호회와 같은 것들이 이미 미국에서만 60,000개에 달한다. Marie-Laure Ryan 이 지적하듯이, 가상현실 체험의 힘은 "신체 자체를 매개로한 집중(immersion)과 상호작용"이다. 반면 문학의 경우, 인쇄물이든 하이퍼텍스트든, 독자는 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다 경험할 수는 없다(주로 사유의 영역에만 작용). 소설 작품(너무 실물 같아서 독자가 의심하기를 유보하듯이)에 더 더욱 침잠할수록, (텍스트 구성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쌍방향적인 메타-소설적 경향은 사라질 것이다. 비록 포스트 모던적인 인쇄물이나 하이퍼 텍스트가 보다 능동적인 독자로 인해 쌍 방향성을 도모하긴 해도, 이 쌍 방향적 소설 형식은 가끔은 허구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독자의 즐거움을 부정하기도 한다. 라이언은 가상현실(신체 내부로부터 허구세계의 경험 뿐 아니라 그 세계 내부에 직접 도구를 통해 상호적으로 개입하는 역할을 제공하는)이 제공하는 특별한 종류의 침잠은 두 관점(작가/독자)을 화해시킬 것이며, "언어를 극적인 연기로 바꾼다"고 지적한다.

비록 모든 문학 읽기는 일종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가상 세계에서 직접 참여하는 행위와는 상반되는 문학적 리얼리즘의 침잠된 경험에 의해 위임된 행위(신체적 지각적 감각적 경험과 사유의 경험이라는 두 측면을 말함). . . . 상호작용과 협동적 창조를 찾는 사람들을 유혹하려면, 하이퍼 텍스트는 가상현실 기술과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은 실시간으로 다른 독자들과 극적인 행동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

(주1)

링크는 연속의 의미(소통, 연속)에서 연결이라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튄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여정은 오랫동안 상주하지 않고 머문 자리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순환은 프로그램화된 원환적 고리의 뜻이기보다는 거미줄과 같은 망으로 구성되어 우연적으로 출발점이 종착점으로 되는 모양새를 의미한다. 지도제작의 의미는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역자)

(주2)

바흐친이 보기에 언어 혹은 발화에서 사물의 의미를 지시하는 측면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의미를 지시하기 위한 표현들보다는 어떠한 목소리(어조, 언어습관 . . .등)를 갖는가에 따라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흐친은 따라서 인용할 때, 의미만을 요약한 상투적인 표현 보다는, 직접 말하거나 쓴 사람의 목소리 '아!', '글쎄. . .' 등과 같은 행위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여 이를 인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역자)

  • 이 글은 Molly Abel Travis의 다음의 논문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Cybernetic Esthetics, Hypertext and the Future of Literature". Mosaic. 29/4 (Dec. 1996): pp. 115-129.

2006/10/18 03:59 2006/10/18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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