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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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dyThe Media is the Memory by Florian BrodyI. Midia Fetishes 1. 오래전 나는 일찍 잠에들곤 했다. 가끔, 촛불이 꺼지고, 내 눈은 너무 빨리 감겼으므로, “나는 지금 잠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반시간쯤 후엔 잠을 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잠에서 깬다; 나는 마치 책을 제껴놓은 것처럼 상상했던 것이 아직 내손에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촛불을 불었다(I would make as if to put away the book which I imagined was still in my hands, and to blow out the light); 잠이 드는 동안 나는 생각에 빠졌다. 지금 막 읽었던 것에 대해. 그러나 이 생각들은 오히려 특별한 페이지 넘기기를 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내가 쓴 책의 즉자적인 주제(subject)인 것처럼 보였다: 교회, 사중주, 프랑스와 1세와 촬스 5세의 경쟁 . . . 등. <<욕망의 부분대상성?⇒ 왜? 전체화는 종합적 사유의 결과이므로. . .⇒ ~ 꼴라쥬 . . . 물신=망상 ⇒ 미디어, 매체는 기억 즉 물신으로 (재)구성된다.>> 2. 어째서 시각적인 것이 만연되어 있는데, 오히려 꿈은 사라지고 있나? . . . 내가 보기에 디지털 미디어는 영화나 비디오와는 다르게 새로운 형태의 책을 발생시킬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3. 책은 단순히 글자들의 연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책은 지식의 도상(icons)이며 따라서 칭송되기도, 무시되기도, 불태워지기도 한다. 그것이 사용하는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의미에 따라서 말이다. 책은 인간의 원형이나 관념과 환유적 관계. 이런 이유에서 분서는 테러행위. 《인간과 지식의 관계를 책이 환유적으로 드러내어준다. 그러니 분서는 인간의 관념이나 심지어는 인간 자체를 태우는 행위》. 4. 책은 언제나 개인적 방식으로 사용됨 ⇒ 기억의 확장으로 사용됨《이는 맥루한도 언급. 책은 뜨거운 매체이고, 개인화되고, 밀도가 높다》 /// 인쇄술 변화는 책의 유용성, 휴대성, 지속성의 변화를 초래 ⇒ 독자의 삶에서 책의 위상의 변화 ⇒ 책은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었음; 책의 지적 문화내에서의 위상과는 관계없이 품목으로서의 가치를 중시 ⇒ 또 다른 형태의 강박관념; 상품가치도 아니고, 정보로서의 가치도 아니고 ⇒ 포획된 기억으로서의 특질을 지닌 것으로서의 책 ⇒ 책들간에는 일종의 약속이 놓여있다 ⇒ 책의 소유는 소유자의 정신을 신비하게 확장시켜준다 ⇒ 책은 개인적 항목으로서, 개인의 기억의 확장 ⇒ 중세때 시과에 쓰는 기도서는 친밀한 대상이었다. 개인에 의해 운반되는 유일한 것으로서 책 ; 읽고, 또 읽고, 명상하고 . . . . ⇒ 자아의 확장으로서 현재의 이러한 책의 등가물은 Filofax이며(손바닥 크기의 기계도 있다)인데, 이것은 채워져야 할 빈 페이지의 개요이며 나중엔 지워진다 . . . ⇒ 지금은 컴퓨터라는 장소에 모든 텍스트가 모아진다. . . Window on TomorrowLand 1. 도구로부터 자유로운 측면의 현실(신체화, 체화된 관점의 현실?)은 기능(artifice)의 정점이 되어왔다: 즉각적인 현실(직접본 현실)의 통찰은 테크놀러지 세계에서 하나의 꽃이 되어왔다.(벤야민) 2. 디지털 미디어(연속적인 자료가 아니다 ⇒ 분할하고 단위별로 끊어서 처리하는 방식 ⇒ 예로, 공간적 위치를 좌표로 표현하는 방식?)가 새로운 책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내 기본적 테제를 무색케하는 어떤 요인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디지털 미디어의 왕국은 정보사회의 미래세계이다. 세계가 여전히 디즈니랜드와 그 식민지를 요구하는 한, 정보시대의 문화는 그 자신만의 화려하고 쌍방향적 환경을 요구한다. 그래야만 가능성과 전망의 풍요로움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마공원이 단시간 안에 풍요롭게 하리라는 모든 희망과 열망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옛날에 마이크로 소프트가 걸었던 슬로건인 “당신의 손가락에 모든 것을. . .”이라는 말로.《질료적 무한성을 갖는 사물을 유한한 수치로 양화 ⇒ 요약하고 접어낸다》. 텔레비전이 맥루한이 예견했던 대로 “세상의 창”이 되기를 계속 하고 있을 때, 디지털 미디어(특히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고 거미줄을 칠 때)는 실제로 사용자를 세계로 연결한다.《이점은 아마도, 텔레비전이 프로그램화된 기획이라면, 인터넷은 그렇지 않아 선택성을 가진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모든 과대선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은 감상적인 파편들을 놀랄만큼 조작하고 꾸며낸다. 인터넷에서의 개인 홈페이지가 웹 자료의 사용에 있어 가장 초보적 가능성을 제시하긴 하지만, 홈페이지는 개인적 출판의 궁극적 형식이 될 것이다; 그 자체로 기억 기계가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더 나가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기억해보자. 그에 따르면 단적인 차이(paradigmatic differences)는 용법의 차원에서 의미를 규정하는 규칙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용어들을 보다 완전히 규정할 필요가 있으며, 쌍방향적 멀티미디어나 아카데믹한 하이퍼텍스트, 웹기반 정보, 컴퓨터 효과 영화, 방송 그래픽 등 다른 모든 종류의 멀티지향적 매체, 즉 “새로운 매체”들에 관류하는 변별적 자질들과 단일한 요소들을 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Buzzwords and Hyphenates 1.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 관한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만든다는 말이다(Gerald Unger).《해석행위, 질문, 이해를 위한 요약, . . 모두가 자신의 텍스트 제작이다》 2. 텔레비전이 50년대의 Wunschmaschine이었던 만큼, 멀티미디어 PC는 오늘날 욕망하는 기계이다 ― 욕망의 새로운 장치. 그러나 이 욕망들은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고 불완전하며, 그 명칭 또한 부정확해서 디지털정보를 스크린위에 개념화하는데 복잡성을 더해간다: 텍스트, 그래픽, motion, 소리 등이 쌍방향적 환경 속에 있다. // ⇒ 매체 역시 다중매체로 변화하고 있다 3. ⇒ 새로운 매체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조절(modulate)하고 있는가? // 시간은 존재의 조건인 한에서 인간의 오래된 전통(문화적 의미)이다. 시간을 이용하는 모두는 개인적 수준에서 그것을 지각한다. 이 개인적 수준이란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알려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그리고 심지어는 시간의 단방향성 조차도)은 모든 미디어에 반영되어있으며 나아가 실제로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강화된다. 그것은 우선 시간과 공간이 우리가 환경을 규정하는 초석이며, 모든 미디어에 관한 담론 내에서 중심적인 카테고리이기 때문이다. 맥루한에 따르자면, 만일 매체가 메시지라면, 그리고 만일 메시지가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진정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기억인 것이다《메세지와 기억의 차이, 이것이 맥루한과 브로디의 차이가 아닐까?》: 테크놀러지, 메시지, 그리고 기억은 궁극적으로 혼합되어 있다. 진정한 다중매체성은 따라서 여러 종류의 매체 형식의 조작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 시간적 그리고 상호작용적 매체의 통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을 위한 새로운 장소는 문맥화의 새로운 형식 뿐 아니라 새로운 해석과 설명을 허용한다. Models and Content 1. 다중 매체성의 구조적 분석을 개념화한 것 중 가장 훌륭한 모델은 아이젠슈타인의 diagrammatic "score"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 라인의 기저구조를 구성하기 위한 이 다이어그램은 러시아군대와 독일군대간의 얼음위에서의 전쟁의 초반부에 등장 . . . 이미지들의 레이아웃은 고도로 구조화되어 있고, 철저히 그래프화된 개념들을 따른다. 각각의 장면을 실제로 구성함으로써, 아이젠스타인은 여러 가지 종류의 기억 시스템을 창안해 내었다. 이것은 무성영화시절의 그것과는 다르다(병치되는 것을 동시에 파악하게? 요약 . . . 새로운 것을 기억하게?) . 각각의 모든 프레임을 하나의 실체로 구성하는 동안 그는 또한 조심스럽게 이미지들의 시간적 흐름을 편성했다. 이미지와 이야기 전개 둘 다를 확실한 개념, 공간적 시간적으로 구성하고, 나아가 음악과 함께 이 다이아그램을 이루고 있다. // Alexander Nevsky에 있는 감독의 다이아그램은 Macromedia Director와 같이 상호작용적 다중매체 프로그램을 위한 악보와 흡사하다. 디지털 미디어는 엄격한 계획하에 출현하지만, 너무 많은 다중 매체 조각들은 기저구조에 있어 아직 정교화되지 못해서 널부러진 쓰레기가 된다. Alexander Nevsky는 확고부동한 이론적 기초위에 고도의 구조적 이해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젠스타인은 자신이 선택한 매체들 내에서 장소들과 이미지들에 대한 인공적인 기억을 구성한 것이다《매우 중요: 파편들 자체는 아무 힘이 없다. 이를 구조적으로 구성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하나의 기억이 완성된다. 기억은 재현이 아니라 구성이다》. 그의 모델을 보면, 그가 어떻게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요소들을 배치 하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창발적인 매체들을 가지고 매개변수를 찾아내는지의 모델을 제시한다. 새로운 매체 속에서 우리는 아직 시간과 공간의 개념적인 상호의존이 완전히 실현되는 지점까지 가지는 못했다. The lack of such specificity in the new media speaks to the need to get beyond the obsession with placing buttons on the screen. The task of the designer is not to create a better button, but to determine if buttons are required in the first place. 우선 보기에, 창발적인 디지털 매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설정하고 따라서 그 내용에 대해 더 깊고 정확한 이해를 하게 하는 정보와 연결된 길에 구조화된 접근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도구들”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스스로 거울의 미로 속에 빠져있음을 발견한다. 어떤 종류의 내용물이 이들 갑작스럽게 출현한 매체를 가장 잘 재현하는가? 소설이나 허구가 문제설정을 통해 이해하는 것인 반면에, 백과사전, 사전, 그리고 다른 참조물들은 이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하이퍼텍스트에 관한 과대선전을 관련짓지 않아도, 여전히 새로운 매체에서 이야기를 말하는 힘과 작가의 힘을 완전히 보여주는 예는 거의 없다.《몽타쥬가 특정한 하나의 메시지를 말하고자 하는 힘이 있는가? 아니면 몽타주는 해석적 힘이 더 강한가?》 Memory and the Limits of the Library 1. 바벨탑의 도서관은 그것이 구가하는 지식과 세계의 한계 혹은 무한함에 대한 은유이다. 그러나 컴퓨터는 세계를 변화시켰는데,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책과 관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기억과 관련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문자이전의 사회에서 우리가 “text"라고 부르는 것은 기억의 왕국 내에서만 존재했었다. 즉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있었던 것이다. 글이 발명되면서, 텍스트는 수서본의 형태로 변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처럼 그것은 찾기 힘들고 귀중한 대상이었다. 인쇄기술은 텍스트를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변형시켰다. 몇 세기 동안 이 관행이 계속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방대한 도서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필요한 텍스트에는 접근을 못하고 있다. 2. 컴퓨터는 전자텍스트, 즉 불안정한 형식의 텍스트를 낳았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보다 정교한 장치로 텍스트를 포착하는 동시에 우리의 머릿속으로 되돌리는 텍스트이다(전원공급이 없으면, 장치가 없으면 현시될 수 없음?). The rampant confusion, and even revolt, that such a blurring of boundaries brings in its wake can be minimized by applying those rules for places and for images defined for the art of memory, making them hold for books as well as for new media systes.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사용자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상상의 집을 짓고 자신이 이야기 속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한다. 길을 잃으면, 그것은 시스템 고안자가 전통적인 기억기술(mnemotechne)의 전통적인 구조(적 약속)들을 어겼기 때문이다. 3. 전자 텍스트는 몸이 없고, 오로지 마음만 있다―they close the circle to the mnemotechne of the Classical era. 서구 문화에서, 책은 공유될 수 있고, 팔리고, 혹은 살 수 있는 지식을 포함한다. 정보는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인간과는 독립적이다―기억이 우선적으로 지식의 저장소로 정립되었던 고대시대의 모델로부터의 급진적인 전환이며, 인간의 정신과는 분리된다<<즉, 기억이 하나의 실체가 되어 있어서, 인간의 한 요소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교육받은 로마인들에게 ars memorativa는 가장 중요한 수사법 훈련의 일부(주요과목?)였으며, mnemotechne의 규칙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이후의 문자전통은 아직도 그 흔적을 가지고 있다. Francis Yates는 그 두 가지 형식간의 연결을 지적한다: “기억 기술(art)은 일종의 내적인 글쓰기(inner writing)와 같다. 알파벳 글자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적을 수 있으며 그들이 무엇을 썼는지 읽을 수 있다.” 4. 집처럼, 우리가 들어가서 탐색하는 공간으로서의 책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고전시대의 ars memorativa에서 사용된 극장과 유사한 기억공간에 우리자신이 있음을 보게된다. Giulio Camillo, Giordano Bruno, 그리고 자중에 영국의 연금술사인 Robert Fludd가 사용했던 개념인 Memory Theater는 세계의 개념들과 지식들을 저장하게 될 하나의 극장이었다. 그 극장에 들어가면, 그 지식에 접근할 수 있으며 저장된 개념들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 극장은 거꾸로 되어 있었다―정보는 청중석에서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사용자/독자가 무대에 서게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이 중심적 위치에서 그에게 제시된 모든 사물의 면모들을 관찰했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 위아래 모든 것들을. 5. 나중에는 책이 바로 우리의 기억극장의 무대가 되었으며, 우리는 텍스트의 기술을 통해 우리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흥미롭게도, 텍스트가 전자적인 형식으로 훨씬 더 다루기 용이하게 될 때, 원전과 2차 텍스트간의 차이는 사라졌다―기억의 흔적들은 모호해졌다. 인쇄된 책에 있는 자투리 노트(handwritten marginalia)가 인쇄된 텍스트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반면에, 수서본에서 이 노트들은 원본 텍스트와 동일한 구조적 수준에서 나타난다―even down to the same font. 6. 만일에 매체가 메시지가 아니라 기억의 저장소(conveyor)라면, 이것은 어떻게 새로운 미디어를 고안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는 우리의 기억기술이 우리의 삶을 은유화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바로 그 수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3세대 전에, 나는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에 어쩔 수 없이 연결되는 것으로서 도발적인 냄새를 범주화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 나는 매일 아침에 걷는 그 길을 누벨바그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길게 연속되는 화면으로 보았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을 상호작용적인 네트워크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연결된다는 것은 지금 여기의 상황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어떻게 해서 기억이 발생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그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다. 종합과정을 적어보자》 Print and the People of the Book 1. Constat igitur artificiosa memoria ex locis et imaginibus.(AD Herennium III). 2. 이미 말했듯이, 책과 기술매체는 언제나 기억의 기술로 제공되었다. 텍스트를 쓴다는 것은 관념이나 사유 그리고 텍스트의 이야기를 저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외적인 기억기술은(즉 쓰기 등) 개인의 “내적인” 기억 시스템을 발전시킬 능력을 사라지게 할 위험이 있다. 플라톤은 Phaedrus에서 글쓰기의 위험을 지적한다; Druids와 같은 해석학 그룹은 자신들의 지식을 써놓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구술로 전달되어야 했다. 유대기독교전통은 좀 달랐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지칭했으며, 그들의 볍률은 정확히 이 기억기술에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Torah는 읽혀지는 것이며 특별한 법칙들에 따라 다루어졌고 더 이상 사용될 수 없으면 묻혔다. 개혁이후에, 서구 기독교는 신념과 믿음의 필수요소로서 성경을 가지고 있어왔다. 3. 물론 이 서구는 종말론적이었으며, 지난 몇 세기 동안 그 유토피아적인 희망은 분명하게 기술적 취향을 가지고 이었다. 다음세기 이전의 이 몇 년 동안의 시기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선 상호 작용 다중매체, 그리고 가상현실, 그리고 이제는 World Wide Web이 구원의 수단으로 출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구원받기 원하는가? 내 생각엔 이 기술들에 대한 희망은 기본적으로 이 기술이 궁극적인 기억기계를 제공할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들을 저장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지식, 모든 이야기, 폭소에서부터 인간적 유머의 모든 것까지, 모든 질문들, 대답의 총체 모든 것까지. 다시 말해, 우리는 모아진 기억들로부터 영원성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현대의 기술들은 기억을 보충하고 기억을 돕기위해 필요함(부시의 생각) ⇒ 그러나, 이것이 구술문화에서 요구하는 기억을 대체하지는 못함 ⇒ 월터 옹이 말하듯 구술문화의 기억은 총체적 판단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 즉 기억의 본질이 다르다》 4. 하드웨어 제작자들의 기저에 깔린 메시지는 언제나 궁극적인 구원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사라질 것으로 가정되었던 문제들은 항상 기억의 문제였다: 간직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것들. 오늘날, 우리는 방대한 규모의 기계를 가지고 기억을 도모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망각하게 해주는 장치는 몇 안 된다. 아마도 망각하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S C CS B 이 에세이의 제목은 “덮개를 닫은 채로 조금씩 마시세요”였다. 이것은 미국 도시인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장 그리고 최소한 볼 수 있는 유럽 추방자의 그노시스주의이다. 나는 비엔나 사람이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내게, 커피는 카페에 있다. 그러나 로스엔젤레스에서 커피는 자동차문화의 일부이다―미적지근한 자바커피의 종이컵은 차를 모든 사람에겐 편리한 기술이다. 그래서 나는 그 비밀스런 코드를 익혔다―잃어버린 경험의 기억을 드러내기. 비엔나에서 커피는 컵에 담겨진다―물론 블랙으로―그리고 우리는 그 컵과 커피의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알고 있다. 컵이 발명된 이래 모든 사람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LA에서는, 커피가 덮개로 씌어져 나오고 색조조차 분간할 수가 없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직접 접근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야만 한다. 커피의 향을 맡을 수도 온기를 느끼기도 어렵고, 안내자로서 인간의 역사에 의존할 수도 없다. 마치 CD를 해석하는 것이 Rosetta Stone을 해석하는 것보다 어렵듯이. 로제타는 아마 S C CS B 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까? 미래의 로제타는 우리 현재를 발굴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냄새와 맛은 뚜껑 아래에 놓여있고, 그 뚜껑이 바로 작은 양의 커피에 접근하는 출입문이 된다. 컴퓨터 화면처럼, 그것은 hyperreal 지각을 하도록 길을 열어준다. 매우 평범한 것인데도 말이다. 마치 영화의 놀라운 효과처럼,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벗겨진다: Sugar Cream Cream&Sugar and Black. 5. 언뜻 보기에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효과를 가진 그림, 즉 입체화법인 Trompe l'oeil은 현실을 조회하기 위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18세기의 집에 그림이 그려진 창문은 Window NT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망상이다.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기능성과 다른 목적들에 사용된다. 그 기능들은 기억 공간으로서 존재하며 모두가 이와 유사한 기능들을 갖는다. 컴퓨터는 마음의 창이기보다는 사용자가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아이콘들을 저장하는 기억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의 시스템들이 대체로 커피뚜껑처럼 작동한다는 점이다―문자로 인터페이스를 설정하고 냄새나 맛을 차단하고 그리고 커피의 경험을 차단한다.<<컴퓨터는 재사용하기 위한 기억장소인데, 오히려 커피컵처럼, 지금은 경험을 차단하고, 너무 과도하게 시스템화되어 오히려 학습하게 한다 ⇒ 이부분은 맥루한과 비슷한 말이다>> 6. 하나의 뚜껑으로 인터페이스를 이해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으로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컴퓨터 화면은, 새로운 매체의 경험은 기계와 공유될 수 없다고 이해했던 때처럼 그렇게 마술적인 힘을 잃어버렸다. 상호작용성은 컴퓨터와의 상호작용성이 절대로 아닌 듯 하다. 기계는 기억의 저장소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억 연쇄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컴퓨터를 기억 기계로 이해함으로써 그 도구적 성격에 대한 질문은 이제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다. <<새로운 매체의 경험이 더 이상 그 원래 목적과 상응하지 않고, 넘어섬으로써 그 매력을 잃었다? 기계는 기억의 저장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계, 컴퓨터는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오히려, 커피컵을 막아 기호화한 것처럼 더 어려워지고 학습을 요하는 일이 되었다? 경험적인 것을 차단함으로써? ⇒ 맨 마지막 문장이 모호하다. 도구적 성격에 대한 질문은 왜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을까? 기억의 문제가 도구적 저장의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창조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맥루한이 말한 바를 그대로 말하면서, 메시지가 아니라 기억을 끌어들임으로써, 창조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7. 작가인 Bohumil Hrabal의 흥미를 끈 것은 유물론의 역사나 이론이 아니라 책의 소비, 즉 독자들이 게걸스럽게 사실들과 지식과 그리고 신화를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35년동안 나는 쓰레기 문서더미 안에 있었으며 그것은 전부 내 사랑이야기이다. 35년 동안 나는 쓰레기 문서와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내 자신은 문자들로 희미해졌다. 내가 나의 백과사전처럼 보이게 될 때까지 ― 그리고 나는 몇 년 동안 3톤 이상을 쌓아놓았다. 나는 물로 가득찬 물주전자이며 마술이며 대지였다: 나는 다만 몸을 구부려야 했으며 나로부터 흐르는 아름다운 생각들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내 교육은 무의식중에 생겨나 나로부터 생겨나는 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없고 어떤 것이 책에서 나오는 것인지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내 자신과 세계를 조율하는 방식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읽고 있을 때, 나는 진짜로 읽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운 구절하나를 툭 입밖으로 내서 마치 과일방울처럼 그것을 빨거나, 알콜처럼 내안에서 그 생각들이 분해될 때까지 액체처럼 그것을 홀짝거렸다. 머리와 가슴속에 섞으면서, 각각의 핏줄의 뿌리에 흐르게 하고. . . 보통 1달에 2톤가량의 책을 쌓아놓고 있었다.” // Hrabal의 주인공이 처리하고 있는 몇 톤의 책은 실제로 그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찾는 지식은 한 번도 얻지 못한다. 그는 책을 먹고 싶어한다. 그 전체를 빨아들이고자 한다. 책의 내용을 분석하기 보다는 . . . 음식을 대하듯이, 책에 관한 그의 토템신앙적 접근은 분석적인 것과는 대조적이며, 컴퓨터에 기본을 두는 하이퍼텍스트의 해체적 영혼과는 반대적이다. The New Book 1. 우리는 아직도 인쇄술에 따라 읽는다. 또한 출판인쇄양식에 따라 쓰는 것 모두에 정향되어 있다. 2. 새로운 책을 만들려면, 텍스트 기억, 지식기술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석해야한다. 텍스트와 텍스트성의 개념들은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있다. 그러다보니 그 형식에서 패러다임적 변화는 지식을 표상하는 안정성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미디어 형식은 지식표상체계를 변화시킨다). 이전에는 묶여있는 책의 물신주의적 성격은 독자로 하여금 기억이 그책의 표지사이에서 안전하다는 생각을 제공했다. 텍스트와 책의 최근의 역동화는, 전자적 매트릭스로 이동함에따라 읽기; 인쇄된 단어와 진리가치와의 의존성을 갈라놓는다 // 예를들어 텍스트의 물리성을 보자 ⇒ 텍스트와 타이프는 2차원이상의 형태로 존재한다. 필경사들은 상형문자를 파피루스에 긁어 새기고, . . . 쿠텐베르그 이후 인쇄기는 잉크로 종이에 타이프 . . . 종이의 표면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새로운 인쇄와 재생산 기술은 거의 3차원을 포기한 지경 . . . 텍스트의 물리성 = 종이의 표면을 변형? /// 레이저 프린팅은 페이지위에 2차원 텍스트를 놓는다. 새기는 효과 보다는 본뜨는 효과에 더 가깝다. 컴퓨터 디스플레이는 전통적인 차원의 개념을 완전히 없앤다 ― 전자 매트릭스에서 텍스트를 흐르게 함 3. 선형텍스트는 고정성을 띤다 ⇒ 전자텍스트가 흐르는 매트릭스는 다르다; 유동적 환경속에서 다중 레이어와 n 차원적 독서의 다양성이 가능해짐 ⇒ 다방향적 능력 ⇒ 하이퍼 텍스트성의 비선형적 성격에서 비롯 4. 텍스트 생산기술변화 ⇒ 읽는 기능의 변화 ⇒ 정신적 모험으로서의 읽기는 비교적 초보적 개념 ⇒ 문어(쓰여진글)로의 일반적 접근은 꽤 최근까지도 성전들에 제한되었다. 이 성전들에 부여된 특별한 자질은 그 사용을 제한 했을 뿐 아니라, 하나의 기호로서 1차적인 기호학적 성격을 넘어서는 자질까지도 부여했다. 서구문명에서, 쓰여진 문어는 구어에이해 이전에 가졌던 진리가치를 획득했다. 전자텍스트의 출현은 페이지로 묶인 텍스트를 기준으로 유사한 재평가를 강요한다. 컴퓨터로된 텍스트는 문어나 인쇄글보다 wejf 안정적이지만, 우리는 그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5. 사이버테틱 시대에서, 문자적인 기억 표상은 정신으로 되돌아간다, 책의 기술 이전에 그것이 거주하던 곳은 이제 어디에나 있게되었다. 읽기는 종이에서 떠날 것이다. 쓰기가 10년전에 시작했듯이 . . . 이는 새로운 디자인 시대를 예고한다. 왜냐면 비록 기계들이 오랬동안 쓰기위해 사용되었지만, 읽기를 위한 역사를 통해 발전하지 못했다. 이점에서, 텍스트 처리기계들은 오로지 쓰는 장치로만 발전했으며, 읽는 기계보다는 쓸보있는 타이프라이터로서 개념화되었다. 6. 새로운 책은 읽는 습관에서 극적인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 . . 반면에 우리는 전통적인 책을 스크린에서 읽을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장치들의 실험도 그렇고, 독자 뿐 아니라 저자들을 위한 새로운 미디어의 잠재성을 탐구할 것이다. 사실이지, 새로운 기억문화가 출현할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질서와 그 자신의 책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새로운 매체로 낡은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 기술이 아니라 개념의 변화가 필요 ⇒ 매체는 메시지만큼이나 기억을 전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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