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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와 사이버공간: 사이버공간과 삶의 세계

William Gibson에 따르면, 사이버공간은 '합의된 환각'이다. . . . 거기에는 현재와는 다른 공통적인 미래의 비전이 있으며,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세보다는 희망하는 공간이나 갈망하는 리얼리티의 비전이 있다. 그것은 먼 눈으로 세계를 보게 한다. 사이버공간 하면 흔히 유토피아를 떠올린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지만(outopia), 동시에 무언가 좋은 곳(eutopia)이다. 사이버 공간은 '어디에도 없는-어떤 곳'으로 계획되었다. 또한 가상 공간은 일종의 '기적과 꿈의 테크놀러지'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의 놀이를 허가한다. 우리는 거기에서 죽은 것도 살리며, 지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공간은 초월에 대한 광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신기술이 결국 불완전한 현실세계의 한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며, '다음 세대의 희망이며, 천국의 빛'이라는 환타지 말이다.

유토피아가 새로운 기쁨의 영역일까? 그것은 '좋은 사회를 만나고 경험하는 하나의 스토리'일 수도 있고(Krishan Kumar), 우리는 어디에도 없는-어떤 곳에서 '공동체의 의미와 경험을 새롭게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에 그것은 삶의 이해와 흥겨움을 주고 공공영역을 부활시켜줄 도구'가 될 것이다(Howard Rheingold). 또한 작은 공동체로부터 전지구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까지도 가능할지 모른다. 레인골드는 '가상 공동체'가, 전자매체를 통해 공공토론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인간적 감정을 가지고, 이 공간에서 인간적 유대를 짜 나아간다면, 네트로 연결된 하나의 집단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겠다. 지금 여기 불완전한 삶을 초월할 수 있으며, 새로운 대안적 현실인 냥 떠드는 가상기술 혁명 선전가들이 있지만,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유혹이다: "인간은 한마디로 신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물질적 한계와 사회적 분리 속에서의 권력투쟁인 정치는 어떻게 되는가? 유토피아 이론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는 완벽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서 빨리 이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에 완벽한 대안적 미래는 없다. 우리는 실제세계에서 살고 있고, 그것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가 없다. 신기술을 장려하고 계발하는 제도 기관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적 정치적 현실 안에 있다. 물질적 제약이 있고 사회적으로 분리된 세계라는 것. 얼마나 우리 자신이 정치적 필요 속에 있는지 기억해야 한다. 유토피아적 환타지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동요(윤리적 갈등, 민족주의 부활, 도시분할 등)가 가상공간과는 상관없는 딴 세계의 일처럼 본다. 나는 실제세계가 가상공간에 참견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무질서와 파멸의 관점에서 사이버공간의 비전을 보아야 한다. 기술적 망상은 자연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간이 이성적으로 정복했다는 환타지에 기인한다. 우리는 이 지배와 통제의 환타지를, 정치적 위기와 사회 조직의 와해를 포함해서, '서구의 황폐화'라는 문맥에서 생각해야 한다.

가상공간과 자기정체성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자기-정체성의 문제는 자유와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인공적 현실 속에서, 육체적 외양은 완전히 조립 가능하다. 크고 아름다운 외모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작고 평범한 외모를 가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변화된 육체적 속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상당히 변화시킬 것이다 . . . "

현실적으로 제한된 몸이 인공적으로 극복된다면 정체성은 조립 가능하다. 가상적 존재의 경험이 우리를 흥분케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구현된 세계의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초월성을 갖게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나친 발전이나 인구폭발, 무자비한 환경파괴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위안이 되는 것은, 물리적 형식이 다차원적 컴퓨터 공간에서 정보의 패턴으로 재구성됨으로써, 그 원래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사이버 공간의 몸은, 황폐화되고 부패된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이버공간에서, '주체성은 사이버네틱 회로에 분산되어 있다 . . . 자아의 경계는 이제 피부가 아니라, 기술-생체 통합 회로 속에서 몸과 시뮬레이션을 연결한 피드백루프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조정된 현실에서, 자아는 하나의 흐름이나 여러 가지 변형된 실체로 재구성된다. 정체성은 게임이나 소설처럼, 거의 의지에 의해 선택되거나 폐기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술과 정체성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 그 진부한 결과로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환타지나 상상으로 만들어 놓으려 할 것이다.

새로운 정체성, 유동적 정체성, 탐험적 정체성 ―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부한 정체성이다. 오로지 기술만이 새롭다: 사이버공간에서의 게임이나 만남은, 새롭거나 놀라운 것이 전혀 없다. Rheingold는 거기에는 '가면놀이'나 이야기를 즐기는 인간 본연의 뿌리가 여전히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Michael Benedikt는 이를 발전시켜, "사이버공간의 비 물질성과 유연성은 신화적 현실을 표현하는 한 단계이다. . . . 낡은 능력을 확장하고 . . . 허구 속에 안주하여 신화적 지평 위에서 힘을 부여받고 계몽된 능력 . . ."이라고 지적한다. 이 모든 구시대적 꿈과 욕망(사이버-환상에서 보편적인)에는 열정이 결여되고 텅 비었다. 그것은 진부한 구식의 상상력이며, 거기서 새로운 정체성이나 경험을 창조하여 현세적 삶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믿는다 . . . 환타지 게임 . . . 낭만적 감수성의 찌꺼기. 상상력은 죽고 오로지 테크놀러지만이 새로운데, 문제는 이 테크놀러지가 실제적인 것처럼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물리적 세계 안에서 살아야하는 강요된 현실이 있지만,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물리적 현실과 육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가상 현실은 상상된 것으로, '물리적 세계의 객관성과 무제한성과 검열 없는 꿈과 상상을 결합한다.' 테크놀러지는 전지전능한 환타지에 의해 발명된다. 가상 세계에서 우리는 이전에 부여받았던, 그러나 빼앗긴 모든 만족과 희열을 만끽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유년시절의 망상 속에서 만들어진 마술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쇄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친숙하고 예외가 없다. 친숙함과 예외 없음(familiar and unexceptional), 왜냐하면 가상적 미래의 담론은 현세적인 것 이상이 되지 못하며, (칸트적 의미에서) 정신과 몸이 일치된 단일한 주체성, 즉 감성과 지성의 경험의 "초월적 종합"에 뿌리를 둔, 초월적 상상의 재구성 이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에 더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세력이 있다. 이 세력의 논의는 더 이상 주체의 존재론적 위상을 수용하지 않고, 현대적 주체성의 파편적인, 복수적인, 그리고 탈 중심적인 조건들만을 그 전제로 받아들인다. 이 논의는 파편화되고 분해된 주체의 포스트 모던적 조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서 개인적 자아는 반드시 단일화되고 응집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관념적이며 망상적이며 향수에 젖은 생각이라고 간주된다. 세계에 관한 포스트 모던적 틀에는 더 이상 칸트적(혹은 데카르트적인) 의미의 인류학이 없다. 사이버공간에는 자기정체성의 복잡함을 탐색할 가능성이 있고, 정신 공간과 육체적 타자간의 관계를 탐색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조건(포스트 휴먼)을 분석할 수 있는 가상 실험실을 얻은 셈이다. . . .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 논의는 페미니즘에서도 진행되었다. 해러웨이가 그 예인데, 그녀에 따르면 사이보그 정체성은 '경계들의 혼합의 기쁨과 그들의 구성 속에서 책임에 관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시한다. 따라서 사이버 페미니스트는 기쁨과 혼합의 계기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Claudia Springer는 '육체의 규정으로부터의 탈출이 주는 스릴'에 집중한다: '경계들의 횡단은 사이보그를 의미하고, 그것은 자아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며, 기술과 인간의 정체성을 결합시킨다'. 가상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가면을 선택하게 하고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Sadie Plant가 말하듯이, 규격화된 정체성(off-the-shelf identity)은 짜릿한 모험이며, 이 모든 가면을 알고 있는 여성은 이미 이 여행에 익숙해 있다(피지배자의 본질).

사이버공간은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영역으로 상상되며, '자유로운 실험이 가능하며, 경계나 제약이 없는 환경이다' 그것은 여성의 욕망을 어디든 흐르게 할 수 있는 공간이다, Claudia Springer가 말하듯이 그것은 '마이크로 전자 상상력은 우리의 몸을 지우고 의식을 통합해서 하나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 . . 매트릭스가 어머니나 자궁을 의미하듯이, 사이보그 상상력은 편안함과 안전함으로의 도피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은 세계의 이상화 과정이며, 그곳은 무제한의 전지전능한 경험이 가능한 곳이다.'

사이버공간과 자기정체성의 담론은 현실세계에서의 정체성의 위기라는 문맥에서 생각해야 한다. 정체성의 응집성과 연속성의 상실은 곧 현실의 통제가 실패했음에 기인한다. 자기 정체성의 위기의 문제는 개인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 간의 관계가 중요한 변형을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적 세계가 단단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정체성이 왜소해짐으로써, 중대한 문화적 변이와 함께 사회적 의미가 상실된다. 이것은 도덕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며,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현실의 연속적 관계와 고정성을 요구하는 윤리적 삶의 상실을 의미한다. 현실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이 사라지면, 정신적 방어물 즉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많은 현실적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개인의 욕망의 산물이 나오며, 그는 이제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할 수가 없다.

이러한 고립, 절연, 유아론은 마약이 되어 개인들로 하여금 단일한 정체성과 응집력을 심리적 사회적 수준에서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테크놀러지는 정체성의 붕괴와 위기를 부정하고 부인할 수 있게 만든다. 응집력은 이제 변화무쌍한 상상력의 허구로 유지되고, 파편화의 결과로서 스트레스나 피로함이나 충격은 자연스럽게 중화된다. 그리고 경험은 변태적인 쾌락과 놀이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Mary Ann Doane이 초기 cinematography 기술이 이와 유사하다고 했다: 두 가지의 충동이 긴장하고 있는데, 하나는 모더니티의 불연속성, 파괴를, 연속의 망상으로 수정하려는 충동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기본적 조건으로서 불연속성을 체현하려는 충동이 있다. 영화는 이 둘 다를 효과적으로 가지고 있다. 가상기술은 포스트 모더니티를 저항하거나 긍정한다. 이곳은 이제 현실세계가 요구하는 것들을 지울 수도 있고 초월할 수도 있다(그러나 별 차이가 없다). 또한 마술적 리얼리티로 한계를 초월하고 환타지로 인해 전지전능해진다. 이제 도덕성은 미적 태도의 가능성과 다차원의 게임으로 대체된다.

기술영역은 이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현실의 복잡성과 중력으로부터 절연되었다(Brenda Laurel, '가상 극장'). 여기서 우리는 구시대의 욕망에 만족하고 환타지를 실현하려 한다.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은 특히 투사(projection)적이며, 무의식적 환타지를 표현하고, 나르시스적 퇴행에 민감해진다. 나르시시즘은 현실로부터 퇴행하는 환타지 세계의 재현이다. 거기에는 경계들이 없다(헤러웨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경계). 어머니와의 상상적 관계 속에서 전지전능한 만족을 느끼듯이, 가상세계는 방어벽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모든 소망이 충족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정신병적 상태와 일치되어(Peter Weibel은 가상성을 '정신병적 공간'이라 함) 환각적인 소망충족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소망과 현실간의 경계가 불분명해 진다. 이 정신병 공간에서 현실은 거부되고, 자아의 응집력은 조각나고, 경험의 질은 흥분과 열중으로 축소되었다. 이것이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보게되는 것이다.

Marike Finlay는 이러한 나르시스적이고 정신병적인 방어가 포스트모던 주체성의 특징이며, 자아의 위상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를 환각으로 대체하여 유아기의 전지전능함으로 퇴행하려는 술책이라고 한다. 여기서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하나로 망상된다. 인공 현실은 쾌락과 욕망의 명령에 순응하는 질서로 고안된 것이며,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자아를 부유(suspension)하게 하여 주체를 탈 육화한다. 거기에는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제한할 타자(Other)가 없다. 이러한 현실과 주체성은 단지 반사회적이며, 결국은 비도덕적이다. 부유하는 정체성은 정신분열 혹은 신 나르시즘의 왕국이며, 이것은 나아가 개인간의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윤리는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기계 인터페이스는 도덕과는 상관없는 무관심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게 한다.

신기술의 상상적 가능성을 부정하기보다는 상상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Winnicott의 잠재적 공간 즉 '인간적 삶의 제 3세계'라는 개념에서 가상현실의 경험을 볼 필요가 있다. 이 공간은 개인 내부도 혹은 공유된 현실 세계 외부도 아니고, 창조적인 놀이와 문화적 경험의 공간이다. 그는 유아기적 망상을 지탱해주는 잠재적 공간과, 미적이고 영적인 창조성으로 연결된 더 성숙한 잠재적 공간과의 연속에 집중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술적 미적(magical-aesthetic) 측면으로서의 기술은 흥미롭다.

그러나 창조적 망상에 안주할 수는 없다. 위니콧은 또한 잠재적 공간에서 환멸의 순간을 강조한다. 이것은 '마술적 통제의 한계를 인정하고 외부세계에서 사람들이 선의지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아기는 '내적인 대상의 투사를 통해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킨다'(Thomas Ogden). 개인은 따라서 "실제적인 대상들의 관계로 진입하는 능력을 가지는데, 이는 내적인 대상세계의 전이된 투사 이상의 것이며, 정신적 재현은 그 원천으로부터 그리고 내적 대상들간의 관계로 연상되는 전능한 생각들로부터 증식된 자율성을 획득한다." 잠재적 공간은 과도기적 공간이다. 이것은, 내부와 외부 세계 양쪽의 상호작용을 통해, 도덕적 감각이 전개되는 매개적 공간 안에 있다. 과도기적 경험은 내적 그리고 외적 세계의 차이를 포함한다. 이것은 심미적 횡단이 가능해지는 토대 위에 있다 ― 그리고 활용 가능한 대상 세계의 인정, 즉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밖에 있는 공유된 경험세계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의 인정'을 포함한다. 이것이 분별과 감정이입과 도덕적 만남의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가상 공동체와 집단 정체성

흔히 테크놀러지를 자족적이며 자율적인 영역이라고 추측하기 쉽지만, 테크놀러지 발전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와 격변이라는 보다 큰 문맥에 위치시켜야 한다. 세계는 스스로 변형되고 있으며, 그 지도는 깨지고 재배열된다. 이러한 소란한 변형과정을 통해, 우리는 소속감이나 공동체의식을 버리기도 하며 재배치되기도 한다. 가상 공동체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정치적 지형 위에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흔히 실제세계와 대립하는 것으로 상상하기 쉽다. 새롭고 혁신적인 사회에 대한 관념과 연결되어, 나중엔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가상현실은 '어디에도 없는-어떤 곳'으로 상상되어, 힘겹고 위험한 현실세계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Krishan Kumar가 보았듯이, 이것은 과거의 공간을 유토피아로 대체하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시대로 가는 것'이다. 가상공간은 일종의 제거된 공간인 셈이다. 유토피아적 사고처럼, 믿음과 희망으로,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관계나 집단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 . . 사이버공간은 또한 구원과 초월의 장소이다. 이 새로운 예루살렘의 비전은 분명히 가상현실 기획에서 유토피아적 열광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가상 리얼리스트들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가진 다른 이들이 있으며, 이들은 사이버공간과 현실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거기엔 여전히 타락한 세계 속에서 대안적 현실로서의 가상현실의 의미가 있다. 기술사회성은 새로운 형태의 공통체를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네트워크는 '유동적이고 복수적인 선택적 친화성을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절점(nodes)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가상 공동체는 생존하기 위한 복잡한 그리고 정교한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한 공동체는 현실적 삶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관계하면서만 존재한다. 가상 공동체의 삶은 물리적 공간과 가상적인 문화의 경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어려운 현실적 상황을 조절하고 적용하는 문제이다.

Howard Rheingold의 책 The virtual Community가 이러한 접근을 시도한다. 서부해안 스타일 특유의 유토피안 냄새가 나긴 하지만, 사회적 질서를 분명히 고려하고 있다. 그는 다소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하지만, 또한 그 한계와 약점을 인식한다. 레인골드는 현대의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부패하고 손상된 상태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컴퓨터로 매개된 소통은 '실제 삶에서 공공 영역이 점점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자랐던 공동체의 열망'에 의해 가동된다. 레인골드는 함께 즐기기 위해 모이는 이 장소들의 사회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의 비공식적인 집회장'이라 할 만 하다. '자동차나 교외, 패스트푸드, 쇼핑몰 등이 전통적인 마을로부터 이러한 '제3의 장소'들을 없앰으로써, 현존하고 있던 공동체의 사회적 조직은 찢겨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상 테크놀러지가 이러한 상황을 억제하길 바란다. 레인골드의 믿음은 가상 공간이 '점점 사라지는 공동체의 면모를 재건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공공장소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잃었던 가치관과 이상을 회복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 (공통적)관심과 친화력의 보편성으로 연결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인골드는 이제 우리가 '함께 즐기고 삶을 이해하는 공적 영역을 부활시킬 새로운 도구에 접근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전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겉모양에도 불구하고, 레일골드의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향수에 차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것 즉 공동체의 회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모든 테크놀러지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잃었던 협동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컴퓨터 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뼈아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무를 자르고 콩 심는 일 보다, 키보드를 누르고, 스크린 앞에서 온종일을 보내는 일이 '진보'적이라고 더 이상 확신할 수 가 없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를 가지면서, 우리는 공동체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대부분 이 테크놀러지가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이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 돕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Net은 가족연대를 새롭게 달궜다('보이지 않는 친구들로 구성된 가족'). 이것은 마을이나 동네의 에토스를 재창조한다. 레인골드는 '온라인 공산주의자들의 장소'에서 '공동체 뿐 아니라 진정한 정신적 연대'를 꿈꾼다. 전자 공동체는 관심사가 공통적이라는 점, 그리고 '공유된 의식'과 '집단정신'의 경험이라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 이미지는 모계 가족적이며, 그 이상은 통일된, 합의에 의한 상호주의이다. 그의 가상공동체 이미지는 투명한 사회에 관한 '루소적인 꿈'의 전자적 변형체라 할 수 있다. 이 '공동체의 이상은 사람들간의 조화를 표현하고, 상호이해를 통한 일치된 공동체의 열망'인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담을 둘러싸고 전체성에 토대를 둔 사회적 비전이다.

레인골드의 The Virtual Community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연대와 집단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법의 좋은 예이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상적 해법으로 풀고자한다. 그는 한결 같이 사회적 정치적 개선을 위해 가상 네트워크 기술의 적용가능성을 모색한다(물론, 잘못 적용될 위험은 인식한 채로). 전자매체가 사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인식은 증가하고 있다. Joshua Meyrowitz는 텔레비전이 물리적 장소와 사회적 장소의 관계를 재구성하여 얼마나 사회질서의 논리를 변조시켜왔으며, 그럼으로써 또한 공간적 한계(spatial locality)로부터 공동체를 해방시켜왔는지 관찰해왔다. 그러나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발전들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테크노-공산주의의 타당성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기술적 미래의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제시된 것은 현재의 사회적 관계들과 사회생활의 재현들의 문제가 더 크다는 점이다. 소란스런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나 집단과의 관계의 본질은 더 어렵고 불분명한 것이 되었다. 그러니 새로운 연대의식과 경험을 찾아야 한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연대는 작은 마을의 게마인샤프트적인 안전함을 지구촌이라는 국제적 질서로 확장하는 문제인 듯하다. 그러나 그 연속성과 이행의 문제는 믿을 수가 없다. 포스트모던 공간인 디즈니랜드를 보면, 도시생산 없는 도시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 . . . 아우라가 없어진 하이퍼 도시, 수백만 시민은 있지만 거주자는 없는 도시 . . . Jean Baudrillard가 말하듯, 그것은 '갑자기 튀어 오른 전체 종합적인 세계이며, 극저온 상태에 있는 전체 역사의 모형'에 불과하다. 가상 네트워크 연대 또한 만찬가지이다. 즉 공동체를 깨우는 주문은 있지만, 한 사회의 생산은 없으며, 집단 정신은 있지만, 사회적 만남은 없고, 온라인 친교는 있지만 하이퍼 공간의 거주자들은 없다. 이것은 또 다른 전체화된 종합적 세계이며, 여기서 역시 역사는 얼어붙어 버렸다, 즉 추상적이고 공허한 공동체생산에 머문다. 따라서 실질적 주체 또한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만 연대와 공동체의 구식형태를 복제함으로써 보존하는 것뿐이며, 결국 대안적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대안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Iris Marion Young이 말하듯이, 공동체를 이상화하여 차이나 불균형이나 주체를 부정하게 된다. 공동체 주창자들은 "사회적 이상으로서 분리보다는 혼합을 긍정함으로써 차이를 부정한다. 그들은 사회적 주체를 하나의 커다란 전체 안에서 개인들간의 동일성과 대칭성에 의해 만들어진 통합 혹은 상호성의 관계로 받아들인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존재 ― 실질적 자아들과 상황들이 부유상태에 있는 공간 ― 는 개인들 속에서의 동일성과 대칭성을 도모하고, 물질을 벗고, 장소를 벗어난다. Gerard Raulet이 말하듯이, '주체는 한번에 교환 가능하거나 자의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순수 기능성으로 축소된다'. 통일성과 상호성의 의미는 공유된 전체 안에서 테크놀러지의 제도를 통해 '인공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하나의 투명한 사회를 꿈꾸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투명한, 순전히 동 시간대 같은 공간에 공존하여, 너무 가깝고, 따라서 우리의 비전을 방해할 어떠한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 . . 루소주의적 꿈." 가상 현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즉시성의 경험이다. 만국어를 전달할 수 있는 가상현실(Barrie sherman과 phil Judkins). 이것은 완벽한 매체이며 . . . 보편적 상징들이 보편적 인간성을 만들 것이며, 보편적 문제들이 노출되고 보편적 해법들이 나올 것이다. 이 가상 이데올로기는 소통 유토피아의 구시대적 이상을 영속화한다. 소통의 즉시성은 의식의 공유와 상호 이해로 연결된다. 투명성과 일치의 망상은 공산사회 신화를 만들고, 전지구적 차원의 전자 게마인샤프트를 상상하여, 일종의 에덴의 신화를 만든다.

기술 공동체는 기본적이고 반정치적 이상이다. Serge Moscovici에 따르면, 질서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토대로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퇴행적 환타지'이다. 하나의 사회체계는 오로지 '특정한 무질서가 창조될 때, 불확실성이 인정될 때, 특정한 공포를 견뎌낼 때, 존속가능'하다. Richard Sennett는 도시환경에 대한 논의에서 무질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무질서와 혼란은 사회생활을 문명화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그는 '게마인샤프트 계획자'들이 커다란 차이들에 직면하면 공동 사회의 차원으로 후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차이의 부정은 '우리 문명이 인정하기 싫어했던 커다란 공포'를 반영한다고 믿는다: "도시생활은 노출의 공포를 반영한다 . . . 빌딩은 사람들의 차이에 담을 쌓고 . . . 이 차이가 상호적으로 자극을 주는 대신에, 상호간의 강요로 이루어졌다. 이 왕국에서 우리가 가진 것은 김빠지고 중화된 공간이며, 접촉이 배제된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상 공동체는 노출을 통제하고 안전과 질서를 만들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이 역시 중화하려는 충동으로 가동되는 것이다.

사이버공간이나 가상현실은 보통은 테크놀러지의 문제이다. 그것은 잘못된 세계를 몇 가지 테크닉으로 고쳐준다. 오히려 너무 쉽게 그렇게 하기 때문에 대안이라 해야할지 의심스럽다. 사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차이, 비 대칭성, 갈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실세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샹탈 무페가 말했듯이, 보편적인 관심사나 일치에 관한 이상은 망상이다. 실제 삶에서 적대적 관계의 구성적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여러 정치적 입장들의 활기찬 충돌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정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와 대립을 도모할 수 있는 정치적 틀이다. 무페가 "투쟁적 복수주의"라고 말했던 틀. 가상 연대나 집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테크놀러지는 우선적으로 테크놀러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목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가상 공간은 질서, 도피, 철회 등으로 구축되었다. 사회적 정치적 이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문제는 사이버공간 공동체와 집단성에 대한 논쟁을 넓혀서 정치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

사이버공간과 가상현실을 너무 쉽게 대안적 공간이나 현실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불만족스러운 신체를 욕망에 순응시켜 보다 현실적으로 대체할 수 있기라도 하듯이. 희망과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신념의 원리를 표현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가상문화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신세계의 희망 대신에, 불만이나 거부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뒤로 돌아가 끝을 보려는 묵시록으로 볼 수도 있다. 초월로서의 퇴행. Dieter Lenzen은 현대사회를 어린 아이의 전체화를 통한 구제라고 해석한 바 있다. 그는 문화적 재건의 기획을 일종의 퇴행이라고 본다. . . . 가상실재에 관한 담론은 이러한 신화(기술진보라는 흔해빠진 형이상학과 함께)를 끌어들일 소지가 많다. 이제 가상문화를 현실세계(가상문화학자들이 스스로의 메타포에 사로잡혀, 죽음을 선언하는 그런 현실세계)에 재배치 해야할 시간이다.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해 우리 자신이 점점 현실을 이탈하고 장소를 이탈하는 경험 속에서, 현실과 비 현실의 경계에서 부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상문화를 신화로부터 벗어나게 하자.

  • 이 글은 아래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Robins, Kevin. "Cyberspace and the World we live in". Into the Imae: Culture and Politics in the Field of Vision. London: Routledge, 1996.

2006/10/18 04:05 2006/10/18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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