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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와 사이버공간: Donna Haraway의 Cyborg Manifesto에 관한 짧은 해석

우리나라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관한 글들은 대체로 소개하거나 인용하면서 전개되는 것 같다. 따라서 해러웨이를 구체적이고 논쟁적인 관점에서 대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녀의 글을 끌어들여 자신의 생각에 후원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경향이 많다.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사이보그에 관한 해러웨이의 논점을 잘못 해석하거나 자의적으로 절취하는 방식에 있다.

그 중 하나가 해러웨이가 언급하는 사이보그의 이미지를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이 논의들의 속뜻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로봇이나 기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거기엔 구시대의 가치가 존속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구시대적인 가치와 결합되면서 혼종성을 띠고 괴물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구시대적인 가치에 대한 향수를 발생케 하는 것이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산물은 구시대적인 것 같지만 원래부터 존속해왔던 것으로서 인간의 몸이 없으면 한계로 가득 찬 로봇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테크놀러지의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확장된 테크놀러지와 그 산물로서 기계에 대한 인간주의적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는 순수한 존재로서 인간. 그러나 테크놀러지가 이를 타락시키고, 인간을 기능화 하여 지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병적이고 불순한 이미지로 가득 찬 괴물이며 하나의 불행이다. 따라서 되돌아가서 타락한 불행의 존재를 타락 이전의 존재로 복원시켜야 한다.

테크놀러지에 관한 이전의 비판적 관점들(해러웨이는 이전의 맑시즘과 몇 몇 페미니스트를 예를 들고 있다)은 사이보그를 인간성의 타락으로 간주하거나 남성적 우월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라고 봄으로써, 인간주의적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에는 모두가 비슷했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주의적 가치를 복원시키려는 관점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기확신에 찬 주체성이나 순수 정체성을 지키고 복원시키려는 의도뿐 아니라, 이를 위해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추상화하는데 있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고 타자로 만듦으로써 여성 뿐 아니라, 남성 자신을 추상적 존재로 만들어버린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남성에 대립하는 존재로서 여성을 주장하는 이전의 몇 몇 페미니즘의 관점과 다르지 않게, 사이보그를 순수한 인간의 몸이 불순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이해함으로써, 인간적 가치들을 복원시키겠다는 생각은, 인간이 실제로 다른 존재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관념적 소망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결정하려는 의도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데, 우선 인간주의는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배타적 차이를 주장함으로써, 인간 자신을 자존적 존재로 만들어 고립화하였다. 따라서 둘째로는, 다른 존재와의 대립적 혹은 대상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임의적으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마치 여성이 대립적 관계에 있는 남성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함으로써, 스스로 여성이라는 추상적 대립을 상정한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또한 세 번째로, 모순적 관계 속에서 추상화된 존재는 필연적으로 적(敵)에 상응하는 대등한 힘을 가진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네 번째로, 이 정체성은 추상화된 방식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실질적 힘을 가진 존재가 중화되어 커다란 하나의 전체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이때에 모든 실질적 존재는, 남성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여성, 혹은 자본에 대립하는 소외된 존재로서 노동, 권력의 대상으로서 피지배자, 더 나아가 이성을 가지지 않은 다른 모든 존재와는 구별되는 순수 현존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을 소유한다. 결국 모순적이거나 대립적 관계 속에서 결정된 존재는 인간주의적 가치(인간/동물, 유기체/기계, 물질/비물질 등의 이분법)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은 배제되었거나(특히 여성) 타락한 것(순수한 인간성) ― 사실, 이러한 타자들은 지배자에 의해 결정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닉하다 ―을 복권시키는데 집중한다: "신은 죽었다. 따라서 이제는 여신이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이미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주의적 감상이 아니었으며, 대립물의 통일이나 전복도 아니었으며, 순수 현존의 복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그녀에게 사이보그 이미지의 유용성은 부정에 의한 결정이나 망상적 신념에서 존재의 추상성을 떼어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사이보그 이미지는 인간주의적 규준들(사유, 감정, 판단, 능동 등) 자체가 이미 추상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있고, 이러한 결정은 우리 자신의 신념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사이보그 이미지는 더 이상 이 원형의 규준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로부터 파생하는 지배의 수단으로서 존재의 경계구분이나 위계가 파괴되는 지점에 사이보그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우리 자신이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으로서 사이보그임을 알게 된다고 해러웨이는 지적한다. 사이보그 이미지에서는 지금까지의 인간의 위상 자체가 문제시된다. '사이보그 육체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단일한 정체성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기계적인 기술에서 맛보는 강렬한 즐거움은 더 이상 죄가 아니라 형상화의 한 측면이다. 기계는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관점이고 형상화된 우리의 한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는 존재 방식의 문제이며, 그래서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론이며 . . . 정치학'이다.

더 이상 완전한 신체를 반영하지도 못하고,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의 부분적인 결합으로 구성된 사이보그(의 이미지)는 이런 의미에서 탈 인간화(de-humanization)의 모델인 셈이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적 가족의 모델 위에 세워진 공동체의 꿈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외디푸스적 기획을 가지지 않는다. . . . 사이보그는 . . . 군사주의와 자본주의의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의 서출내기(illegitimate offspring)이지만, 동시에 그를 낳게 한 원본을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참고문헌

Haraway, Donna. "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1991.

2006/10/18 03:40 2006/10/18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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