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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otism

바따이유 이론에서 에로티즘의 의미

금기와 관련된 바따유(G. Bataille)의 논의들을 따라가다 보면, 궁극적으로 접하게 되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그를 헤겔(F. Hegel)주의적 관점에 위치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다. 초보적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헤겔주의자이다. 에로티즘과 위반의 논의들은 절제된 형식을 따라 직선을 그어 가듯이, 하나의 과정 즉 부정적 정서들로 귀결되며, 또 한편으로는 부정의 메커니즘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부정의 과정으로 압축될 수 있으며, 또한 이로부터 인간의 독특한 정서들이 비롯된다. 부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주어진 세계에 대한 부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의 동물성)에 대한 부정이다. 따라서 부정은 자기인식, 교육, 억제 등과 같은 다른 개념들로 확장될 수 있으며, 이렇게 확장된 개념들로부터 우리는 인간을 다음과 같은 특징들로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관련된 금기, 노동, 죽음의 의식, 혐오. 이 개념들은 억제, 공포, 고뇌, 혐오, 수치와 같은 부정의 정서들로 채워진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성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것은 결국 (부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동물적 욕구와 맹목적 충동의 거부이며,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 바로 부정적 정서(우리는 이를 비극적 존재의 조건이라고 이해한다)라는 심리적 질의 계기들이 걸쳐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존재. 이것이 헤겔적 의미에서의 인간성이다. 모든 예술적 숭고 혹은 예술적 승화들은 이 비극적 조건들의 현시의 형태로 드러나며, 이를 우리는 심미성이라 부른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인간성의 원칙과 동물적 무질서의 대립이다. . . . 완전한 인간성은 무질서한 감각을 철저히 배제한다. 완전한 인간성은 자연적 원칙을 부정하며, 그런 사실조차 부인한다. . . . 딸에 대한 아버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욕구의)제한이 그러한 표상 속에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에게 열정적 폭력과 더러움과는 다른 가치를 보장하는 무성적(sexlessness) 인간성의 이미지(지성소)이기도 하다"(Bataille 70-71).

헤겔적 관점에 따라 사물들을 설명하면, 이와 같이 최초의 모든 움직임들은 고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동물성을 부정하는 형태로 출현하는 초기단계의 결혼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미 논의했듯이, 교환의 체계 내에서 결혼은 증여하고 선물하는 의미로서 가치를 갖는다. 욕구대상에 대한 접근의 금지. 보다 정확히 말해, 이것은 욕구대상에 대한 포기이며, 자기절제의 결과로서 실현된다. "증여는 그 자체로 포기이다. 그것은 제한 없는 향락, 동물적, 즉각적 향락의 금지이다. 여자의 증여는 성 행위의 대체행위이며, 거침없는 증여는 자원을 낭비한다는 점에서 어느 모로 보나 성행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 . . (인간성)의 본질은 바로 그런 동물성을 극복할 때 얻어진다. 근친의 거부―자신의 것을 스스로 금할 줄 아는 거부정신―는 동물적 탐욕과는 전혀 다른 (인간만의) 태도인 것이다"(Bataille 72).

이와 같은 일련의 서술들이 바따유와 헤겔을 하나의 동일한 위상에 위치시키는 과정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초보적 수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좀 더 나아가야 한다. 에로티즘의 영역은 어디에 있는가? 완전한 인간성과 대립적인 위치에서, 무제한의 충동으로 한없는 질들을 뿜어내는 맹목적 욕구로만 그것을 이해할 것인가? 바따유가 에로티즘 논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에로티즘적 경험 그 자체의 과정에서 뿐 아니라, 에로티즘에 대한 논의에서도 이미 헤겔적 위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을 고문할 줄 아는 정신,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고, 금지할 수 있는 부정적 존재, 욕구대상을 거부할 줄 아는 비극적 심미성, 그리고 예술적 승화 혹은 완전한 인간성.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또 다른 가치들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욕구대상의 금지와 억제로부터 그 대상의 매혹적 가치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근친의 거부는 폭력보다는 존경, 어려워할 줄 아는 태도와 조심성이 우세한 인간세계의 창조에 기여한다. . . . 금지된 대상에 대한 선망 . . . 에로티즘 . . . 에로티즘의 탈선 . . . 금지된 대상의 매력과 선망과 존경"(72). 결국, 금기, 부정, 거부의 태도로써 동물적이고 맹목적인 충동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반대적으로 그 대상의 매혹적이고 에로티즘적인 가치들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에로티즘적 가치들이 추구되는 순간, 그것은 최초의 강렬한 욕구들로 감싸인 동물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물적 맹목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반과 도발의 순간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기는 성행위의 폭력을 바로잡는 대신, 오히려 (인간적)세계, 즉 동물성으로서는 모르는 규칙위반의 세계를 확립 한다"(73). 에로티즘은 도발과 위반의 순간에 출현한다. 그것은 심미적 과정 즉 절제와 억제의 고뇌로부터 발생하는 대상의 매혹적 가치들의 출현이며, 그 대상에 대한 내적 경험인 것이다.(예를 들어, 새디즘적 폭력과 방탕은, 대상을 한없이 경멸하고 격하시키면서, 신비화된 대상을 현실적 자연으로 끌어내리려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Sade가 추구하는 관능성이, 관능적 용어들과 묘사들의 끊임없는 반복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관능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에로티즘의 영역은 따라서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에도 영역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헤겔적 의미에서의 인간성의 영역에도 혹은 동물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에로티즘이 가지는 이중성인데, 견고하게 구분되는 삶의 극단적 영역들(완전한 인간성/동물적 충동, 이성/욕망, 절제/방탕 . . .)은 바로 이 이중성에 의해 무의미해 진다: 에로티즘은 제 3의 지대에 위치한다.

에로티즘의 이중성에 대해, 바따유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포트래치(Potlach)의 메커니즘과 연결하고 있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증여-교환 don-exchange) . . . (포트래치)는 계산의 극복이자 극치이다. . . .(59쪽 등등, 이와 유사한 논의들은 이 책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포트래치의 독특한 점은 계산하지 않으면서 계산이 수행됨에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의 구조로 운영되는데, 선물을 유보 없이(되돌려 받지 않고) 증여하는 흐름의 밑자리에는, 관용과 희생이 어떻게 생산적 경제로 전이되는가를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사회 전체적으로, 일반 경제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포트래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 책 1권에서 언급되었다. 다음을 참고하라: Bataille, Georges. "The Gift of Rivalry: Potlatch", The Accursed Share,Vol I: Consumption (New York: Zone Books 1991). pp. 63-77.)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근친상간의 금기는 여자를 포트래치하는 과정(외혼제)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탐욕대상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하는 법칙은, 인류의 보편적 질서로까지 보이는 강력한 금기로 작용하면서, 대상에 대한 강렬한 유혹을 생산한다.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가치(에로틱한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로 나타난다(61). 굳은 체계로서 틀이 잡힌 기관들로부터 흐르는 끈적거리는 분비물만큼 혐오스러운 게 있을까? 그러나 또한 이 분비물에 대한 혐오의 농도만큼 우리를 흥분하게 하는게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인간만큼 이에 흥분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따라서 이러한 충동, 즉 에로티즘적 충동은 인간적 충동이며, 이것이 아무 의미 없는 동물적 충동과 다른 점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성생활이 동물적 자유의 거부임과 동시에 끊임없는 위반의 과정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에로티즘은 규칙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에로티즘의 규칙들은 필경 규칙을 벗어난 영역을 마련한다(61). 이것이 바로 근친금기(혹은 여자의 포트래치)와 외혼제가 가지고 있는 교환의 이중성(즉 계산하지 않으면서 계산이 확립되는)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에로티즘의 이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에로티즘은 규칙이 수용되면서 거부되는 과정, 혹은 제도에 의해 발생하는 제도의 거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견고하게 응축되어 하나의 덩어리처럼 굳어버린 자아가 파괴되지 않고, 다시 말해 피부에 감싸인 채 외부와 차단되어 한 번도 내적 흐름이 발산되지 않는 개인성이 분열하지 않고, 어떻게 강렬한 에로티즘적 기쁨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에로티즘은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으며, 이 둘을 완전히 뒤섞어 버린다. 액체들이 고여, 교묘하게 이루어진, 고체덩어리의 신체들로 단절된 개인들이 에로티즘적 경험 안에서 뒤범벅이 되듯이 말이다. 그것은 정체성을 거부하고, 따라서 단절을 부정한다. 그리고 내부적인 것들이 순식간에 외부로 분출되면서, 미분화된 동물성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욕구들로 채워진다: 위반의 순간. 혁명의 순간. 니체(F. Nietzsche)는 이것을 "자정(子正)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금기와 관련된 고문(부정)의 주제는 바따유의 논의를 헤겔적 관점에 서 있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초보적 수준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좀더 나아가 에로티즘의 논의들은 이러한 수준을 한 단계 넘어서게 한다. 그것은 에로티즘적 경험 자체의 위반과 도발의 의미뿐 아니라, 이러한 경험들의 논의까지도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그 수준을 뛰어넘게 하는 결과를 불러들인다. 어떤 점에서, 바따유의 글을 읽을 때 접하게 되는 난감함은 바로 이 때문인 듯하다. 그는 하나의 관점으로 사물을 이해하지 않으며, 따라서 적(敵)과 나를 구분하는 극단적 테마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에로티즘을 왜 말해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 세계의 완성이란 금기와 절제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로부터 출현하는 위반과 도발의 세계, 에로티즘적 역설과 그 순수 강렬함이 스며든 세계, 전복과 위반의 순간들이 없으면, 인간성 또한 확립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인용자료

Bataille, Georges. "The history of Erotism", The Accursed Share: An Essay on General Economy, Vol II. trans by Robert Hurley (New York: Zone Books 1993). 조르쥬 바따유.「에로티즘의 역사」. 조한경 역. 민음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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