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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젠슈타인(S. Eisenstein)의 몽따쥬 이론에서 차이의 문제

예술에 있어 진리(의미)는 표현과 구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 표현성 때문에 예술은 본질적으로 이론이나 철학과는 구별된다. 세계에 이미 깃들어 있는 의미를 재현하거나 현시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정되지 않은 의미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문제가 됨으로써, 예술은 오히려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표현과 구성의 문제이지 발견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의 몽따쥬가 이를 적절히 예증해주고 있다. 에이젠슈타인은 몽따쥬가 전적으로 영화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꽤 타당한 주장이다. 우선 소비에트 사회에서 몽따쥬는 영화 및 예술의 형식으로만 존속할 수는 없었다. 쿨레쇼프(Lev Kuleshov)와 베르토프(Dziga Vertov)를 형식주의로 간주한 소비에트 영화인 총회의 비판을 보라. 이에 따르면 몽따쥬는 더 거시적인 문맥, 다시 말해 사회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에이젠슈타인이 모색한 것은 몽따쥬의 변증법과의 관계이다. 만일 예술적 형식으로서 몽따쥬가 변증법을 제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의 형식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의 일반적 질서를 표현할 것이며, 나아가 그가 이해한 변증법의 진정한 목표로서, 인식 뿐 아니라 세계의 표현과 구성을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변증법으로 변증법을 표현하는 과정을 몽따쥬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와 그 질서인 변증법을 표현해야 한다면, 영화적 표현의 형식에 있어 진정으로 다루어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에이젠슈타인의 몽따쥬 연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문제이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선적으로 영화는 운동 즉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상들과 질료의 운동 뿐 아니라 사유의 운동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는 벗어날 수 없는 일반적 조건 하에 있는데, 우선 영화는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을 재료로 이용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자르고 연결하는 단속적 운동을 그 자신의 형식으로 취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 질문했던 것과 동일한 형식으로, 에이젠슈타인은 운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 한다: "움직이지 않는 단편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면 운동이 일어나는가?"(에이젠슈타인 87). 그러나 그는 운동을 베르그송과는 다른 수준에서 다루고 있다. 그에게 있어 운동은 물질의 수준이 아니라 현상의 수준, 즉 의식에서 일어나는 비연장적 표상의 문제이다. 베르그송이 물질-운동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다루고자 했다면, 에이젠슈타인은 운동의 발생형식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영화 뿐 아니라 예술 일반의 원리를 다루고자 한다: 물질-운동은 어떻게 해서 의식의 표상으로 나타나는가? 혹은 의식-운동은 어떤 원리에 의해 발생하는가?

"움직임의 관념(혹은 감각)은 대상의 최초의 위상(位相)에서 잔상현상 위에 순간적으로 새로이 눈에 비치는 동일한 대상의 위상을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입체사진술에서 두 장의 사진이 겹쳐진 상(象)으로 보이도록 공간적인 깊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두 가지 요소를 겹침으로써 항상 새로운, 그리고 보다 높은 차원이 생긴다. . . .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낱말(의미)과 또 하나의 구체적인 것을 나타내는 낱말이 나란히 놓여지면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즉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산출한다. 그러한 언어에 있어서는 사물을 나타내는 표의문자가 형이상학적(관념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 . . 이미 마음에 인상을 남긴 첫째의 상과 그것에 이어져서 지각되는 두 번째 상과의 윤곽상의 불일치가 충돌을 일으켜서 움직임의 느낌을 낳게 한다. 그때 불일치의 정도가 인상의 강도를 결정하고, 또한 진정한 리듬의 실질적인 요소가 될 긴장을 결정하는 것이다. . . . 회화의 다이너믹한 효과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눈은 그림 가운데서 한 요소의 방향을 따라간다. 그럼으로써 갖게되는 하나의 시각적 인상을 지속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상은 두 번째 요소의 방향을 따라 감으로써 갖게되는 인상과 충돌한다. 그러한 방향의 충돌이 원인이 되어 그림 전체를 감상할 때에 다이너믹한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에이젠슈타인 87-88)

운동의 관념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단편적인 재료들을 축적하고 연결함으로써 발생하지 않는다. 에이젠슈타인에 따르면 쿨레쇼프나 푸도프킨의 몽따쥬에서 구현한 운동의 관념은 이미지들간의 외적인 원인에 의존하여 운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연결 몽따쥬는 하나의 쇼트가 다른 쇼트와 관계함으로써 운동의 관념을 파생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의 운동은 일련의 쇼트들을 기획된 관념(움직임, 감정, 놀람 등)에 따라 접합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쿨레쇼프 효과; 벽돌쌓기). 연결 몽따쥬에서 하나의 쇼트는 그 자신의 본질을 가지지 않고, 하나의 전체에 의존하여 유기성의 부분적 요소가 될 뿐이다. 이것이 에이젠슈타인이 연결 몽따쥬와 결별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시간적 공간적 계기들을 연결함으로써가 아니라면, 운동의 관념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가? 이것은 영화에서의 운동-이미지를 논의하고 있는 들뢰즈조차도 미처 질문하지 못한 문제가 아닐까? 움직이지 않는 회화나 사진 뿐 아니라, 심지어 영화에 있어 운동을 구현시키는 형식: 차이! 부분적인 요소들의 유기적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의 차이가 운동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차이란 관계하고 있는 분자(혹은 세포)의 내적 본질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예로, 샤라쿠(寫樂)의 얼굴판화에서 얼굴 전체를 이루고 있는 기관들은 해부학적 균형에 따라 배열되지 않았다. 샤라쿠의 판화는 마치 눈, 코, 입 등의 각 기관들을 따로 분리하고, 각각의 도화지에 클로즈업하여 묘사한 후, 다시 이 도화지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전체 얼굴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에이젠슈타인 63-65참조).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는 기관과 대상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된다. 고흐(Vincent Van Gogh)는 농부들의 내적 본질을 표현하기 위하여, 농부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거칠고 두터운 손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면서 해부학적 변형을 시도했다(The Potato Eater 1885). 이 뿐만이 아니라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 부분을 이루고 있는 대상들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내적 본질이 표현되기 위해 색채 뿐 아니라 원근법적 변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기관들의 몽따쥬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몽따쥬이기도 하다. 각각의 기관들은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내적 본질을 통해 묘사된 일종의 몽따쥬의 분자들이다. 샤라쿠와 고흐의 친화성은 작품들 속에 깃든 부분과 전체의 불일치에 있다. 거대하게 왜곡된 양적 파토스나 꿈틀거리는 질적 파토스는, 이들을 감싸면서 전체와의 조화를 강요하고 이들의 변형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테두리의 진한 윤곽선과 대응하면서 강렬한 긴장을 발생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몽따쥬에서 하나의 쇼트는 그 자신과 구별되어 다른 본질을 갖는 쇼트들과 무수한 결합이 가능하며, 나아가 이것은 운동의 다발적 폭발로 전이될 것이다.

이로부터 에이젠슈타인의 몽따쥬 이론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역동성(dynamism)의 원리가 등장한다. 이미지 방향의 차이, 시간적 혹은 공간적 균형의 차이, 힘의 양의 차이, 질(색채, 부피, 재료 등)의 차이 . . . 이런 식으로 물질의 차이는 현상의 운동으로 이행한다. 차이는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들 간의 운동의 현상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차원의 운동을 발생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색채조차도 하나의 운동이다. 색채는 빛의 진동 양태들이 연결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다. 유지되고 있는 빛의 진동과 새롭게 지각되고 있는 빛의 진동의 차이. 마찬가지로 음조(音調) 역시 하나의 운동이다. 동일한 두 개의 이차원적 이미지들을 겹치기하고, 그들 사이에 차이가 드러난다면, 공간적 깊이와 함께 새로운 차원의 삼차원 이미지가 발생한다. 에이젠슈타인에게 있어 운동과 그 관념은 차이의 흔적이 만들어낸 차원의 발생(더 정확히는 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몽따쥬 미학이 우선적으로 이미지들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운동의 시간적 표현이기도 한 차이는 그에 따르면 영화의 원리일 뿐 아니라, 모든 예술의 원리이며, 나아가 세계가 운동하는 일반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규칙성, 질서, 완전에의 욕구(이것은 항상 잘못된 완전이다)는 항상 예술을 파괴한다. 예술에 있어서 취미를 유지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불규칙성이 갖는 중요함을 예술가와 대중에게 주지시키는 일이다. 불규칙성은 모든 예술의 기초이다"(에이젠슈타인 90; 르느와르 재인용). . . . "조금이라도 찌그러지지 않은 것은 감각에 호소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그로부터 불규칙, 즉 예측치 못한 것, 뜻밖의 일 또는 놀람 등이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부분이며, 또한 아름다움의 특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에이젠슈타인 91; 보들레르 재인용). 그러나 차이가 어떻게 해서 질적 도약을 발생시키는가?

참고문헌

에이젠슈타인, 세르게이. 『영화의 형식과 몽타쥬』(영화이론총서 제25집). 정일몽 옮김. 영화진흥공사, 1990.

2006/10/16 14:39 2006/10/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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