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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관념(abstract concepts)과 공통개념(common notions)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논제는 추상관념(abstract concepts)과 공통개념(common notions)간의 본성적 차이라고 지적한다(Deleuze 44). 이 둘의 차이는 존재의 분류방식의 차이 뿐 아니라 신체와 관념 그리고 관념들간에 서로 결합하고 해체되는 양상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차이는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공통성을 가지게되는가의 이론으로 확장된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는 심층적 내용은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spinoza

추상관념은 존재에 대한 초월적 이해이며, 존재를 초월적으로 구성한다. 다시 말해 추상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일치된 관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 내재적 관념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신체들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가 짜놓은 양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 외재적인 관념은 신체들의 공통성이 아니라 정신들의 일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추상적인 관념은 상상력을 자극케 하거나 상상으로 존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그것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관념은 과도한 촉발능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 양태와는 관계없이 상상에 의존하는 촉발은, 존재의 구성 부분으로서 관계를 이루는 다른 신체들을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오로지 사안이 되는 대상의 내적 구조나 단일성 혹은 유기적 체계만을 파악한다. 이런 이유에서 추상적 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결과(효과)들을 우연적 유사성으로 대체하고 자의적인 유추들로 해석하여 텅 빈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추상관념은 허구에 의존하며, 또한 허구는 추상관념을 필요로 한다. 추상과 허구는 자의적인 연상에 의해 만들어진 허위적 이미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둘은 서로 맞닿아 있다.

또한 추상관념은 일반적일 수 없다. 그것이 허위적 이미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도 일반성은 구체적인 존재양태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관념이 일반적인 것은, 존재가 보다 많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적합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일치된 관념 아래 모든 존재가 포함되거나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일반적 개념은 신체들에 외재적인 상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신체들간의 내재적 관계를 통해 발생한다. 일반성은 의식이 알고 있는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가 반응하는 공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관념은 일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지도 않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 주의는 사물들이 소유하고 있는 외재적인 특징이나 특성 혹은 기능적 구조를 통해서가 아니라(예로 강, 종, 속, 류 등에 따른 생물학적 개체 분류들), 변용능력이나 반응능력 그리고 자극능력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한다. 우선 변용능력에 따라 존재들이 분류되기 위해서는 이들 각자들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능력들이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어떠한 상사성(similarity)을 갖는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간에 결합하고 해체되는가? 존재들은 관념의 일치가 아니라, 신체들의 능력의 공통성에 따라 서로간에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종, 속에 따른 분류는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을 초월적 규준 아래 배치한다. 초월적 규준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표면적 유사함(likeness)으로 유추된 하나의 모델이다. 개체들은 이 모델과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 판별된다. 그러다 보니 개체들은 정상과 비정상, 완전함과 불완전함과 같은 비교에 의해 갈라진다.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은 사유의 양태이지 존재의 양태가 아니다. 적합한 관계의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특정한 하나의 모델에 기초한 닮음과 유사성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오로지 관계하는 것들간의 공통성에 기초한 상사적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째서 스피노자의 분류가, 즉 촉발능력들에 따른 분류가 동일한 규준으로서 혹은 추상적 허구로서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능력들의 법칙에 따라 재배열되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한편 스피노자 주의는 사물을 수(number)에 의해 계량하지 않는다. 수는 실제하고 있는 존재의 양태들에 적용될 경우 추상적 관념의 매개가 된다. 그래서 수는 "상상의 보조자"(46)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수는 실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실체의 무한함은 속성들의 다수성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수는 그 자체 스스로를 현시할 수 없다. 수는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만 현시될 뿐이다. 수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속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비에 의해서만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체 자기 자신의 속성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수는 구체적일 수가 없으며 추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는 상상을 불러들인다. 나아가 상상으로 매개된 자연은 허위적 이미지를 남긴다. "자연을 구체적으로 보면 어디에서든 무한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자연을 이루는] 부분들의 수를 추리하는 방식으로는 무한함을 발견할 수 없다. 2, 3, 4. . .를 통하지 않고도 즉각적으로[직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이 긍정될 수 있는 실체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가지는 존재 양태도, [수를 통해서는] 무한하지 않다"(46). 존재의 구체적 속성들은 무한한 실존적 긍정성을 가지지만, 이들이 특정한 상상에 의해 즉 허위적 이미지에 의해 재현되고 수적(양적)으로 파악될 때('이것은 . . . 종류에 속한다', 혹은 '이것은 . . . 구성부분들로 이루어졌다' 등), 무한함은 제한되어 양적으로 고착될 것이다. 실체는 수적으로 계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속성들의 표현에 의해 현시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성은 수적인 다수성에 의해서는 나올 수가 없다. 수는 추상적 관념이므로, 실체와 양태를 수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그리고 상상으로만 구별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내재적으로 결정되는 존재의 의미를 초월적 가치로 확립하는데에 있다. 의미에 대한 초월적 이해는 존재의 발생적 원인을 배제하고, 존재들의 외연적 차이만을 수용함으로써, 초월적으로 상정된 개념(universal idea)에 모든 사물들을 종렬시킨다. 여기서 존재와 무에 대한 절대적 대립이 파생된다. 초월적으로 결정된 개념으로부터 이제 세계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 대립 안에서 현시된다: "존재/비존재, 통일성/다양성, 진리/허위, 선/악, 질서/무질서, 미/추, 완전성/불완전성 . . . "(47). 사물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4부, 서문>에 잘 나타나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이나 생산물에 대해 완전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완전함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사물의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 대해 완전한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우리는 자연의 완전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이성의 개념적 활동에 의해(칸트의 경우) 완전함의 모델로서 일반적 개념을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성과 불완전성은 존재의 양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유양태인 것이다: "우리는 다만 내재적 의미만을 갖는 것을 초월적인 가치로 확립하고, 상대적인 대립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인 대립으로서 규정한다"(47).

한편으로 스피노자의 추상관념에 대한 논의는 특정한 존재에 정향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 추상관념과 추상적 존재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도형들(원, 구 등)이 이성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단순히 추상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을 통해 공통개념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된다. 대체로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원인(발생적 원인)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 개념들은 이성의 도약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지어는 경험적 종합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경험주의적 귀납의 오류): "이성적 존재들은 참된 원인에 대한 무지를 함축한다"(47). 그러나 우리는 특정한 기하학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에게 적합한 것으로서 이러저러한 정의와 원인들을 부여할 수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한 도형에 특수한 정의(예로, 중앙의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위치하는 점들의 자취로서의 원)를 발생적 정의로(한 쪽은 고정되고 다른 한 쪽은 움직이는 모든 직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으로서의 원 . . . 혹은 반원의 회전으로서 그려지는 도형으로서의 구 . . .) 대체할 수 있다"(47). 이 원인의 규정은 특정한 형태로 우리에게 부여된 추상적 존재에 대해, 초월적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기하학적 존재를 파악하는 우리 자신의 이러저러한 양태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단순히 주어진 절차에 의해 하나의 도형을 판별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조건으로 주어진 특정한 존재(대상)를 우리 자신에 적합한 방식에 따라 이해하는 과정이며, 나아가 우리 자신의 이해능력을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물론 기하학적 존재들은 여전히 허구적이다. 신체를 통해 경험하고 지각하는 (자연 안의)어떠한 사물들도 기하학적 존재들과 같이 구성되지 않으며, 또 우리가 그것들에 부여하는 이러저러한 원인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발생하지도 않는다. 기하학적 존재들(예로, 점, 선, 원 . . . 등)은 자연의 운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추상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사유의 결과로서 개념적 양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추상관념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추상관념은 어떠한 존재와 관계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유양태와 관계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과 신체가 서로 평행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을 곧바로 진리이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이 둘간에 있을 수 있는 관계를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어느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지배와 우월성을 밝혀 냄으로써 궁극적인 기원을 찾고, 나아가 진리나 의미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두 계열간에는 어떠한 실질적 인과성도 없으며, 지배와 우월성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의미가 초월적으로가 아니라 (사유)내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의미는 내재적으로 결정된다. 의미의 내재성은 최소한 두 가지의 결과를 발생케 한다. 1. 절대적 의미의 부정. 왜냐하면 의미는 더 이상 초월적 원인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의미는 생산하고 생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절대성이 부정되어 초월적 참조대상에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는 원인을 내재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내부에 이미 그 해답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존재는 의미의 원인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내재적 원인. 따라서 의미는 능동적 이해능력과 행위능력을 예증한다. 대상적 진리는 실천적이고 자율적인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원인을 자의적으로 구성한다(fingo ad libitum causam) . . . 관념들이 참인 것은 . . . 이 관념들의 진리가 대상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자율적 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 . 기하학적 존재에 관한 허구적 원인은, 신의 능력(선이나 반원을 결정하는 신)에 도달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우리의 이해능력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47∼48).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기획했던 기하학적 방식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법칙들과 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만을 의식할 뿐이다. 노예이며, 불완전한 존재이며, 불행한 자들로서 우리 자신! 그러나 (추상적 허구이긴 하지만) 다시 이 결과들에 대한 원인을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할 때 생산적으로 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진리에 관한 어떠한 설명이나 재현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사상은 실천에 가장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하학적 개념들은, 그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추상적인 것을 쫓아내고, 그 자신들조차도 내몰아 버리는 허구이다. 결국 이들은 추상관념보다는 공통개념에 더 가깝다"(48).

추상으로서의 기하학적 존재로부터 공통개념이 도출됨으로써, 이성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결합관계 아래에서 구성된다. 공통개념은 존재에 관한 관념들간의 공통성이 아니라, 관계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신체들 각각의 자발적 능력에 따라, 그들 사이에 공통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공통개념은 정신의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들간에 공통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신체들간에 발생하는 내적인 합의와 이들 서로간의 촉발에 의해 형성된 결합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통개념 아래 관계를 맺는 신체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과 이해와 촉발의 양상에 의존하게 된다. 특정한 관계에 속하는 부분으로서의 신체들이, 제 각각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능력에 의해, 자신이 속한 관계를 특징짓기 때문에, 공통개념은 그 자체 내재적 구도에서만 형성될 것이다. 원인의 내재성은 공통개념의 형식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공통개념은 적합한 관념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예로, 기하학적 존재에 관한 공통개념에서 보았듯이, 기하학적 도형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와 적합한 결합관계를 갖는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내재적 원인은 관계에 참여하는 신체들의 능동을 유발한다.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결합의 원인이 신체들간의 관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신체 자체에 준거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을 맨 처음으로 정의함으로써『윤리학』을 시작한다: "자기 원인에 대해 나는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혹은 본성은 존재하는 것과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Ethics, I, def. 1). 전통적 관점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분리함으로써, 결과에 대한 원인과 원인의 파생적 의미로서의 결과를 구별했다. 이런 관점에서 유효적 인과성(efficient causality)은 초월적으로 구성된다: 모든 결과는 자기 자신과 다른 외적인 원인을 갖는다. 따라서 이 둘 간에는 근본적으로 공통하는 것이 없다. 신은 만물의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 신과 양태는 서로 동일하지 않으며, 어떠한 점에서도 서로 공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로지 신만이 능동적이며 자기 자신의 원인이다.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저 정의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전복시킨다. 인과관계를 내재성의 평면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그리고 원인을 더 이상 그 결과와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신은 그 자신의 결과(양태)를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원인을 발견한다: "신은 자기 자신의 원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의 원인이다(Ethics I, 25, schol.).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한다"(Deleuze 53).(주1)

이렇게 원인의 내재성은 존재를 그것의 본질과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를 능동적 양태로 전환한다. 스피노자는 이 관계를 속성(attributes)을 통해 설명한다. 신과 양태가 서로 분리되어 공통하는 것이 없지만, 어떤 점에서 속성은 이들이 공통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양태들은 속성 안에서 생산되며, 원인은 속성을 통해 작용한다. 따라서 신은 그 결과로서 양태들과 동일한 속성들을 공유한다. 이 때에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고 양태의 본질들을 함축한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펼치고 양태를 감싸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속성은 지성의 산물이나 소산적 자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각의 속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Letter II, to Oldenburg). 현실적으로 이 속성들은 제 각각 차이가 난다. 어떠한 속성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다"(Deleuze 51-52).

내재적 원인은 존재를 능동적 양태로 이끌며, 존재의 능동은 속성들 안에서 혹은 속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 양태들의 관계는 또한 능동적 결합을 구성한다. 이 때에 결합의 능동성은 각각의 존재들에 적합한 방식에 따라 작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있어 존재들의 결합이란 곧 자기 자신의 신체를 지속시키고 능력을 증가시키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이 감싸고 있는 무수한 질들을 잃지 않고 나아가 증가시키려는 노력으로, 자기 자신과 적합관 관계 속에서 다른 신체와 결합한다. 따라서 서로 관계 맺는 신체들 간에는 공통하는 어떤 것이 반드시 내재한다.

내재적 원인과 이로부터 도출되는 능동성, 그리고 서로 적합한 관계들이 구성되는 양상을 따라가 보면, 어째서 공통개념이 추상적이지 않고 보편적인가를 알게 된다. 추상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공통개념은 정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신체들간에 공통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추상이 아니라 보편적 관념이다.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하는 각각의 신체들의 본성적인 것을 유지하고 확장하고 결합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공통개념. "공통개념은 둘 혹은 더 많은 신체들의 결합의 표상이며 이 결합의 단일성이다. 그 의미는 수학적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즉 그것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들간에 일치되거나 결합된 관계들을 표현한다. . . . 정신에 관계하는 공통성은 여기서 이차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공통개념이 정신에 관계할 때에는 그 정신에 관한 신체들이 이미 결합되고 결합의 단일성에 의해서만 촉발될 때이기 때문이다"(Deleuze 54-55). 우리는 흔히 사물들과 투쟁적 관계에 있거나 다른 신체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일 때 공통개념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단일성을 추구함으로써 모순적 관계에 놓인 다른 신체를 제압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추상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공통개념이다. 니체가 그랬듯이 우리도 곧바로 신체가 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신체들의 질서는 언제나 이미 서로간에 적합한 결합관계를 갖는 것을 보게 된다. 신체들은 모순적이거나 대립적 관계들로써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스피노자가 브레이흔베르에게 악이 그 무엇도 아니라고 썼던 것은, 언제나 공통개념을 상정하는 적합한 결합관계들만을 갖는 신체를 하나의 모델로 복원시키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공통개념은 결합의 단일성을 표상하면서, 결합된 신체들 각각에 내재하며 동시에 관계들의 전체에 내재한다. 공통개념이 보편적인 이유는, 그것이 초월적으로 분리된 추상에 의해 강요된 관계를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결합된 신체들간의 자발적 친화력으로 구성된 관계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의 후면에는 언제나 존재의 긍정이 자리잡고 있다. 존재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며,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증식하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기쁜 관계를 표상 한다.

공통개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가를 짚어 보면, 이성(Reason)과 관계를 맺는 우리 자신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를 알게 된다.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며, 다음으로 우리는 공통개념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성적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공통개념의 적용과 그것의 형성은 그 과정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우리는 공통개념을 보다 덜 일반적인 것들에 적용함으로써, 이들을 보다 큰 일반성 안으로 포섭한다. 다시 말해 공통개념의 적용은 개별적인 존재들을 전체화한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전체화를 도출하는 미리 결정된 개념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공통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은 이와는 반대이다. 우리의 신체의 질서에 부합하거나 일치하지 않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신체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다. 이 경우에 우리는 절대로 신체들간에 촉발되는 공통성을 경험할 수가 없다. 슬픔은 공통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우연적 발생에 의해 우리 신체의 질서에 적합한 다른 질서에 속하는 신체를 만나게 되면, 특정한 형태의 촉발을 통해 기쁜 정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정념을 발생케 하는 서로 다른 신체들 간의 공통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공통개념은 우연에 의한 발생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이때의 공통성은 신체들간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쁜 정념은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속시키거나, 다른 신체들과의 조응에 따라 더욱 커다란 행위능력으로 증식시킨다. 우리의 이해능력과 행위능력을 증식시키는 것으로서 기쁜 정념은 공통개념을 불러들인다.(주2)

따라서 이제 이성이 두 가지 형식으로 각각의 단계를 거치는 것을 보게된다. 1) 기쁜 수동 촉발과 관련되는 이성: "좋은 만남들을, 즉 우리와 결합하고 우리에게 기쁜 정념들(이성과 적합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양태들과의 만남들을 선택하고 조직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이성"(Deleuze 55). 2) 능동 촉발과 관련되는 이성: "공통개념들에 대한 지각과 이해, 즉, 신체들의 결합이 구성되는 관계들에 대한 이해. 이로부터 우리는 다른 관계들을 추론하고, 이 이해에 기초하여 새로운 감정을 경험한다. 이때에 이 경험은 이번엔 능동적 감정들이다(이성에 의해 탄생된 감정)"(Deleuze 56). 『윤리학』2부에서는 공통개념이 논리적으로 적용되는 질서에 대해 규정했던 반면, 4부에 오게되면 공통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생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공통개념이 구성되는 과정은 감정들과 관련하여 이성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되는가, 그리고 이성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기쁜 감정을 반복할 수 있도록 하는가를 명시화하는 것이었다. 수순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첫 번째 공통개념은 촉발된 신체들의 결합이 우리를 슬픔이 아닌 기쁜 정념으로 이끄는 공통성의 표상이다. 이것은 나의 신체와 관계를 맺는 다른 하나의 신체와의 공통성이다. 따라서 이 공통개념은 최소한의 일반성에 머문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일반성은 새로운 기쁨의 감정을 도출한다. 기쁨은 반복을 가능케 하지만, 또한 반복은 능동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에 이 감정들은 수동적이고 우연적 발생에 의한 정념이 아니라, 신체들의 결합에 참여하여 이들의 능력을 증식시키는 능동적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최소한의 일반성으로서의 공통개념과 행위를 불러들이는 능동적 감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커다란 일반성을 구성하도록 촉구한다. 심지어는 서로 결합하지도 일치하지도 않는 다른 신체와, 따라서 나로 하여금 슬픔에 사로잡히도록 대립하고 모순적인 신체들에서조차 공통성을 찾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은 최소한의 일반성에서 보다 더 큰 일반성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최대한의 일반성으로 나아간 공통개념으로부터 이번엔 또 다른 감정들이 도출된다. 이 감정들은 슬픔 뿐만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출현한 정념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다.

들뢰즈는 공통개념 이론이 어째서 가치가 있는지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특히 공통개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즉 우리가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Deleuze 56). 이로써 스피노자 주의는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 개성론』이 기하학적 관념들로부터 적합한 출발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허구에 침잠했던 반면에, 공통개념 이론은 실제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관한 수학을 구성하면서, 기하학적 방법의 실천에 제동을 거는 모든 허구와 추상들을 제거했다. 공통개념들은 오로지 현존하는 양태들과 관계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이다. 이들은 양태들로부터 어떠한 단일한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결코 허구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공통개념은 현존하는 양태들 혹은 개별적인 것들 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관계들의 구성을 표상한다. 기하학이 오로지 추상적 관계들을 포섭하는 반면에, 공통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그 자체로 이해하게 한다. 즉 살아있는 존재들 안에 필연적으로 구체화된 것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변이들과 구체적 관계들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구체화된 존재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은 수학적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공통개념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자연 안의 모든 것들이 구성되는 단일성을 이해하게 해주며, 이 단일한 것들의 수많은 변이들의 양태를 이해하게 해주는 자연주의적 기하학을 형성한다"(Deleuze 57).

어떻게 우리에게 적합한 공통개념을 구성할 것인가? 나는 근본적으로 이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이 이론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또한 어떻게 기쁜 감정들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통개념은 이론이 설명하고 재현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재현할 대상으로서 초월적 규범이 아니라, 구성해야할 내재적 규율이다. 내재적 규율은 초월적 토대에 의존하지 않는다. 슬픔은 토대를 잃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토대에 복종함으로써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관념은 무능력한 존재들의 구세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존재들의 무능력을 입증해주는 증거이다. 또한 추상관념으로 증명된 무능력은 존재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에 사로잡히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슬픈 존재들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치유해줄 지배자(초월적 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때의 지배자는 무능력한 존재들의 슬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공통개념 아래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하는 모든 부분적 요소들은 능동적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참조해야할 토대를 잃은 존재들은, 오로지 관계들 속에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에 따라 적합성을 찾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의 구성이 존재들의 능동을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능동적 존재는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원인을 내부에서 발견하는 존재는 능동적이다. 내재성은 능동을 도출하고, 능동은 내재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만일에 능동적인 내재적 존재들이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한다면, 그래서 이 관계 아래 공통하는 것을 각자들이 포함하고 있다면, 이 존재들은 최소한의 보편성을, 나아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보편성의 문제는 관념의 문제 이전에 신체들과 살아있는 양태들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때의 모든 신체들은 영원한 자연의 법칙 아래, 서로 자발적 친화력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결합하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윤리학』은 존재들의 행위에 관한 단순한 법칙들을 나열하고 증명한 도덕이 아니라 공통개념에 관한 연구이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학이란 지배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들의 힘의 관계에 관한 고찰이며, 역능(puissance)의 구체적 현실화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을 "존재하는 것들의 내재적 양태들의 유형학"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Deleuze 23). 원인의 내재성, 존재의 능동, 그리고 능동적 기쁨으로서 지복(blessedness)의 보편성(추상적 보편성이 아닌)은 공통개념을 둘러싼 세 개의 축이다. 이 축들 주위에서 존재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따라, 자신들의 본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증가시키고, 공통하는 기쁨들을 창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통개념을 창조적 생산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1) 그런데 신의 능동과 무한한 능력이 어떻게 존재들의 능동과 무한한 능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이를 형식논리학적으로 증명한다. 신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그의 능력은 자연 안의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신은 절대적 원인이다. 따라서 양태들의 모든 운동과 인과관계 속에서 매번 원인으로서 신이 개입되어야 한다. 양태들의 이행은 그 이행의 첫째 항에서부터 원인으로서의 신과 동일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은 멀리 있는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이행의 첫 번째 순간에서부터 도달되어야 한다. . . . 원인은 필연적으로 내재적이다"(Deleuze 54).

(주2) 스피노자에 따르면, 촉발은 이미지 촉발과 감정 촉발로 구분되는데, 이미지 촉발은 신체가 현존하고 있음을 이미지 혹은 관념으로 표상 한다. 따라서 이것은 신체의 특정한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에, 비록 이것이 이미지나 관념에 속하지만 여전히 신체와 관계하는 한에서이다. 반면에 감정 촉발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의 특정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에 의해 발생한다. 따라서 감정들은 촉발된 이미지들의 이행과 상관 관계들 속에서 나온다.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가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가에 따라, 신체의 능력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때에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혹은 행위능력의 증가를 기쁨과 사랑이라 하고,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혹은 행위능력의 감소를 슬픔이라 한다. 그런데, 촉발된 이미지(관념)가 혼란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 상태를 본질적으로 표현하거나 적합한 것일 때, 그리고 내적으로 촉발된 이미지가 우리 자신의 본질과 타자의 본질, 그리고 나아가 신의 본질의 내적인 공통성을 나타낸다면, 즉 촉발된 이미지들이 내적 합의에 이르게 되고, 신체의 본성에 적합한 관념이 형성될 때, 촉발 이미지로부터 발생한 감정 촉발은 곧바로 그 자체 행위가 된다. 일치된 관념 아래에서 감정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사랑과 기쁨이 된다. 촉발과 감정, 그리고 기쁨의 발생에 관한 논의는 (Deleuze 48-51)을 참조.

<참고문헌>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2006/11/07 20:05 2006/11/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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