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벌로 이루어진 정장 수트.
상의와 하의는 서로에 대하여, 서로를 위하여, 한 벌의 정장을 입는 나를 위하여, 서로를 지시하며, 하나의 전체로서, 한 벌의 정장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하의에 얼룩이 묻어 세탁소에 맡긴다.
다음날. 하의가 없는 상의만이 뎅그러니 남아, 옷걸이에 걸려 있다.
이제 상의는 하의와는 무관하게, 그 자신만의 고유한 사물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색, 디자인, 천의 질감, 길이, 품새, . . . 다른 하의와 새로운 조합을 맺기 위해,
자신의 짝과 한 벌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러나 그 자신 안에 잠재적으로 품고 있었던 정동들(affects)이 하나 둘 태어나기 시작한다.
마치 영화에서 갑자기 확대된 여배우의 얼굴처럼,
혹은 인물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동안 옆에 잘 보이지 않았던 꽃 병 하나가 갑자기 독단적 쇼트를 형성하며 잠시 동안 카메라의 시선을 잡고 있듯이,
그 상의는 현실로부터 찢겨져 나와 조각이 되고, 파편이 되어, 새로운 존재성으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