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결국 사라지고 한무더기의 미학과 숭상받는 상품들만 남게 될 것인가?..

 

 

화물 숭배자로서의 현대미술가

          -핼 포스터

 

1920년대 식민지였던 뉴기니아 지방에서는 바일랄라 광신교 Vailala Madness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파가 발생한 적이 있다. 그 종파는 원주민들을 심리적 정치적으로 사로잡았는데, 후일 이 종교의식의 발생원인이 인류학적으로 규명되었다. 뉴기니아 원주민들은 화물선을 타고 온 백인들의 지위에 주눅들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백인들이 일을 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그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이 우리의 코브라 열매를 가져가고 소리 나는 상자(라디오)와 총을 갖게 되었을까? 오직 우리의 조상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강력한 것들은 백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물건들을 되찾아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마도 우리는 백인들처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뉴기니아의 화물 숭배자들 cargo cultists은 자본주의의 어떤 신비스런 작용-백인들의 부와 상품의 위력이라고 하는- 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화물숭배는 일반적으로 뉴기니아 원주민들의 전 자본주의적 물물교환방식과 자본주의적 경제원리 사이의 실질적인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소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해결에 있어 (무엇보다도) 화물 상품들이 원주민의 물신fetish로 변해 버렸다.

 오늘날에는 이런 일이 이상스러워 보이지만 화물 숭배자들의 야만적 생각 pensee sauvage은 일부 현대 미술가들의 심리-미학적인 움직임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화물숭배의 경우처럼 현대미술의 새롭고 다양한 규정들은 사물의 서로 다른 경제들과 특정 유형의 물신주의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큐비즘은 아프리카 부족의 공예품과 만났고, 기성품ready-made을 새롭게 규정한 다다, 상징적 기능의 사물들을 창안한 초현실주의, 반복적인 형식과 이미지에 관한 미니멀리즘적이고 팝적인 실험들 따위도 그 본보기다. 이러한 두 가지 원리-경제적 모순과 사물에 대한 물신주의-를 통해 우리는 또한 제프 쿤즈, 하임 스타인바흐, 조엘 오터슨, 존 캐슬러와 제네럴 아이디어의 매개조각mediated sculpture의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실상 그들의 작품들은 언급한 여러 모델들 가운데 최소한 두 가지를 채택한 것이다. 그 두 가지란 모더니즘 미술과 대중문화사이의 역동적 관계 안에서 매개조각의 의미를 함축한 뒤샹의 기성품 및 미니멀리즘/팝의 반복적 오브제를 말한다. 이런 원리와 사례에 주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해 보자.

 

(포스트) 모던 미술에서의 모순과 물신주의  

 

맑스에게 상품 물신주의는 상품이 그것을 생산해 내는 노동자로부터 분리되면서 발생한다. 이 물신주의에서 사람과 상품은 가상semblance를 교환한다. 즉 사회적 관계들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환영적 phantasmagorical형식(<자본론>)을 낳는다. 상품이 사람의 적극적인 대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뒤샹의 기성품이 미술에서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물신주의이다. 화랑이나 미술관의 맥락에서 볼 때, 기성품은 두 가지 시각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자율적인 미술작품이 완벽하게 물신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시각이란 미술과 사회, 미술가와 대중의 관계가 미술작품들간의 관계들로 표상된다고 보는 맑스적 입장과 미술은 미술이 기반하고 있는 물질적인 현실을 은폐하거나 거부하는 보상심리적 대체물이라고 보는 프로이트적 입장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기성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작품이란 결국 상품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즉 걸작에 대한 우리의 찬미는 상품에 대한 물신숭배와 유사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제 별로 낯설 것이 없는 이 같은 의미 규정은 기본적으로 기성품을 대단한 양가성ambivalence을 지닌 사물로 인식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미술의 前산업적인 수공품과 현대 상품들의 산업적 생산 사이의 모순관계를 효과적으로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사물에 내재한 이처럼 서로 다른 경제들의 비판적인 결합으로부터 강력한 문제제기적 명제 두 가지가 도출되었다. 한편으로는 가정된 미술의 자율성이 시장의 힘들에 의해 매몰된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교환이 아니라 사용에 의해 결정되는 미술에 대한 필요가 제기 되었다는 점이다.

자율적인 미술과 일상적인 상품 간의 이러한 충돌은 50년 후에 미니멀리즘과 팝 아트에서 다시 나타났다.  여기에서 그러한 충돌은 추상표현주의로 인해 다시 강조된 (고급 미술의) 낡은 주관성 모델과 후기 자본주의에 의해 준비된 새로운 반복적 생산 양식간의 모순으로 나타났다. 미술과 상품 사이의 이러한 모순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미니멀리즘과 팝 아트는 기성품이라는 장치를 채택했다.(예컨대 미니멀리즘에서의 산업제품, 팝 아트에서의 발견된 이미지), 그렇지만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물신주의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물신주의는 현대미술의 형식주의적 진행들 속에서 이 시대에 만연한 신념의 상실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미니멀리즘에서 물신주의는 새로운 재료(아크릴 판, 알루미늄, 호마이카 등)와 새로운 기법 (공장에서의 제작, 반복 생산 등)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비록 미학적으로 비전통적이지만 중성적neutral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널드 저드Donald Judd특정한specific것이라 했으나 발달한 산업사회에만 특정한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팝 아트의 경우 산업화 과정들의 물신주의는 상품기호(와홀의 캠벨 수프 깡통과 같은 경우에 잘 나타나 있는)라고 하는 물신들로 채워져 있다. 이 상품 기호는 미술을 애호하면서 동시에 슈퍼마켓의 잡동사니를 즐겨 구매하는 우리 모두를 중심이 없는, 피상적인 차이만을 지닌 물신주의적 소비자들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제 물신과 상품 사이의 모순은 모더니즘과 대중문화간의 변증법적 관계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한 변증법, 곧 모순은 마르셀 브룻테어즈Marcel Broodthaers, 한스 하케Hans Haache,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t Richter와 같은 개념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중에야 알려졌는데, 셔리 레빈Sherrie Levine, 바바라 크루거 Barbara Kruger,, 신디 셔먼 Cindy Shernman, 리쳐드 프린스 Richard Prince와 그 외 많은 작가들처럼 고급미술과 대중매체 이미지 두 가지 모두를 재해석하는 작가들, 그리고 이 글에서 언급되는 매개조각의 주요작가들에 의해 시도된 전용미술appropriation art을 통해 비로소 부각되었다. 여기서 미니멀리즘과 팝 아트 이후 미술은 미술과 상품 사이의 모순 보다는 미술 오브제 art object의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제는 표면화되어 있는 공식의 일부이다. 사실상 미니멀리즘에서의 재료들의 물신주의와 팝 아트에서의 상품 및 여성 이미지의 물신주의는 물신주의 자체를 하나의 주제로, 또한 그에 맞서는 것을 그 이후의 미술에 걸려있는 하나의 과제로 삼게 했다.

개념미술에서 물신주의에 대한 반대는 매우 두드러진다. 하지만 물신주의에 대한 개념주의의 비판은 종종 그 권리에 있어 물신주의적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개념미술은 미술 오브제를 비물질화하면서 관념본질에 대한 모더니즘적 물신주의를 부분적으로 떠맡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개념 미술이라고 해서 언제나 부르주아 미술의 전시방식이나 상품형식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미술은 미술에서의 상품 물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제한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전개한다. 그렇지만 개념미술은 거의가 성적인 차이의 문제에 대해 눈이 멀어있을 만큼 성적인 물신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한 분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70년대 중 후반 들어 페미니즘적, 정신분석적 담론 및, 영화의 담론들과 연관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 졌다. 그리고 여기서는 특히 두 가지 프로젝트가 두드러졌다.  하나는 빅터 버긴Victor Burgin이 사진 텍스트 연작으로 만든 <프로이트 이야기 Tales from Freud>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버긴은 프로이트의 사례 연구에 근거한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이미지의 물신주의적 성격과 전형적인 가부장적 이야기의 외디푸스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하나는 메리 켈리 Mary Kelly <산후 기록 Post- Partum Document>(1973-79)이란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그녀의 어린 아들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그리고 모성에 각인된 남근으로서의 육체에 대한 작가 자신의 내적인 물신주의에 관한 텍스트와 기록들로 이루어진 탈중심화된 초상이다.

 일반적으로 물신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거장에 대한 비판과 일치하며 1970년대 말 대두했던 표현주의적-구상적 회화와 조각으로 향했던 비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경향들은 미술의 물신화를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화랑/후견인/미술관 이라는 제도에 의해 부추겨지면서 과거의 전통형식으로 돌아갔고 그런 작업은 이 한계를 극복하며 진행하는 개념미술과 페미니즘 미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런 작업들은 대표적인 본보기인 줄리언 슈나벨 Julian Schnabel의 회화에서 명료하게 드러났듯이 심각한 논쟁을 유발했다. 그의 그림은 걸작의 지위를 요구하면서 또한 지극히 물신적이다. (부서진 유리, 짐승의 뿔, 벨벳과 모피는 모두가 고전적 의미의 남성 성기의 대용물). 따라서 이 물신주의가 걸작다움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물신이 어떤 부재에 대한 인식, 즉 걸작의 부재에 대한 대용품이 아니라면 대체 물신이란 무엇인가? 이 점에서 미술작품은 그것이 거부하는 무언가를 내보이며 또 다시 모순들의 폭력을 모두 지닌 물신주의에 사로 잡힌다. 굳이 예를 들자면 데이비드 살르 David Salle의 그림은 모순들을 일부러 드러내고 있다. 분산된 미술기법들과 추상화된 여성성기의 장면들이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며 가득차 있다.

이제 제프 쿤즈, 하임 스타인바흐 등의 매개조각상품물신주의와 거의 동일한 면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품은 한눈에 보아 분명하지만 또한 수수께끼 같은 면을 분명한 사실로서 드러낸다.  이 작품들은 미니멀리즘과 팝의 장치들(예컨대 산업재료, 반복적 생산물, 전용된 이미지들)을 완전히 논리적으로 주워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즐기고 있는 물신주의는 미니멀리즘과 팝의 물신주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 소비사회에서의 소비 대상은 이미지의 의미도 이미지의 사용도 아니며 그 제품도 아니다. 그것은 한 기호를 다른 기호들과 구별하는 식의 기호의 차이이다. 그것은 우리가 물신화하는 것, 대상의 그럴 듯하게 꾸며지고 차별화되고 약호화되고 체계화된 측면을 말한다. 이는 기호의 물신주의, 약호에 대한 집착으로서 쿤즈, 스타인 바흐, 그 동료 작가들의 작품이 강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쿤즈의 작품 <새로운 더블 데커 New Shelton Wet/Dry Double-decker)는 현대의 온각 유물이나 토템들처럼 유리 속에 두 개의 진공 청소기를 넣어 진열했고 스타인바흐는 <관계가 있으면서 다른related and different>란 작품에서 많은 성스런 그릇처럼 보이는 다섯 개의 금색 플라스틱 술잔 곁에 한 벌의 에어 조던 Air Jordans세트를 진열한 작품을 보여준다. 이런 오브제 미술에 익숙해진 감상자들은 상품-기호에 대한 열렬한 물신주의자로 드러난다. 바꿔 말해 일상적인 상품-기호들의 소비를 결정하는 기호의 물신주의가 이제 (포스트)모던한 미술작품을 우리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쿤즈와 스타인바흐가 암시하듯이 작품의 형식들은 교환하기 위한 기호들로 기능하면서 소비되거나 감상된다 그렇다면 기성품이 과거에 표현했던 미술과 상품간의 긴장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그 긴장이 어느 정도로 무너진 것일까? 보다 중요하게는 모더니즘과 대중문화 사이의 변증법에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 변증법이 어느 정도 붕괴 되었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 동시대의 자본주의 문화를 틀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의 아방가르드와 키치

 

젊은 시절 그린버그 C.Greenberg는 자신의 논문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1939) 에서, 키치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속적 전통의 상실의 보상으로 산업 대중들을 위해 만들어진, 고급 미술의 달짝지근한 번안들)에 의한 오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방가르드가 부분적으로 미술의 내적 과정들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자체 변화를 꾀했다고 주장했다. 그린버그가 당시에 맑시스트이긴 했어도 모더니즘 미술을 대중문화와 소박하게 대립시켜보는 (현대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비맑스주의 시각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 달리 같은 시기에 아도르노 Th.Adorno는 양자를 단순 대립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두 가지가 하나의 통합된 자유의 찢겨진 두 부분이지만 이 두 부분을 합친다고 해서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것들은 되풀이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와 경쟁하거나 이용하면서 모순의 동일한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미니멀리즘과 팝 아트의 시기에 모더니즘 미술과 대중문화의 내파 implosion라고 하는 조짐들이 존재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미니멀리즘과 팝은 (이전의 어떤 미술과도 다르게) 생산의 반복적 양식을 채택했다. 그 작품들은 반복적인 사물, 이미지, 사람으로 꽉 짜여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으로 통합되어 있다. 고급과 저급 형식들 모두에 있어 보편화된 이 반복적 양식은 둘 사이의 경계들을 전면적으로 다시 규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고급/저급 변증법의 붕괴의 징후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기호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일어나는 고급/저급 변증법의 변형의 징후인가?

   1960년대에 제스퍼 존스가 제작한 브론즈 맥주 깡통들은 기성품의 고급/저급 양면성을 연출하면서 미술과 상품 사이의 붕괴를 암시한다. 20년 후 브론즈로 만든 쿤즈의 농구공들은 이런 붕괴를 하나의 사실로서 선언한다.  하지만 그것이 쿤즈와 스타인바흐의 기성품들이 보여준 전부라면, 그것들은 단지 덜 떨어지고 환원적이고 기회주의적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러한 붕괴에 의존한 어떤 변화, 즉 사물들의 경계간의 어떤 새로운 모순을 암시한다. 뒤샹의 병걸이와 삽이 미적/교환 가치 대신에 사용가치가 있는 사물들을 채택하는 것과 달리 쿤즈가 물속에서 멈추게 한 농구공들 혹은 스타인바흐가 색채와 형태에 의해 약호화한 연관이 있으면서도 그와 다른 사물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것들은 미적/교환 가치에서뿐 아니라 기호적 교환 가치sign exchange value에 의해 사용가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이 두 미술가의 작품에서 사용가치는 이제 주로 교환가치의 어떤 투사일 뿐만 아니라 주로 기호적 교환가치에 포섭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서 미술작품들은 진공청소기 혹은 농구 신발과 다른 어떤 것이 되고 있다. (혹은 하나의 예로 제너럴 아이디어의 프로그램을 취하자면, 그것은-최초의 아이디어에서 분배에 이르기까지-미술작품이라는 화려한 가장 행렬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즉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 미술가들은 사용가치가 기호 상태에 포섭되는 모순, 즉 자연이 전적으로 문화적으로 변용되는 이 같은 모순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모순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이 경우 모순이란 오브제를 요구하는 미술경제와 기호를 순환시키는 정치경제학 사이의 모순, 즉 상품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이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어떤 모순을 표현하고 있는가? 혹은 소비사회에 유혹당하는 우리를 후기자본주의 '운명에 맡겨버리는 식으로 주어진 사물들을 늘어놓아 소극적으로 모순을 반영하는가? 단적으로 기호학적인 저항, 즉 혁명적 데카당스의 포즈(뒤집어 엎기 위해 넉살 좋게 순응하는 식의)가 그것들에 존재하는가? 혹은 비판보다는 캠프camp라고 할 수 있는 냉소주의의 제스츄어만 있는 것일까? 이에 답을 찾아보는 한 가지 방도는 그러한 작업을 최근의 전용미술과 연관 지어 살펴보는 일이다.

 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에게 자본주의 교환이란 점차 우리의 문화적 차이를 감소시킨다. 사실상 상징적인 것의 기호학적 환원은 적절하게 이데올로기적 환원을 구성한다 이 과정은 어디서든 명백하다. 그러나 이 과정이 문화산업에서만큼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도 없다 (낙서화gaffiti같은 의외적 표현이 낙서미술이라는 유형 속으로 일반화되어 엄청난 수의 상품기호들-낙서화 부티크-로 유통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제 보드리야르는 등가의 상품 기호들이 후기자본주의적 교환을 위해 양가적 상징들(부족의 선물 혹은 포틀래치potlatch)의 前자본주의적 교환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는 낭만적인 전환이다. 왜냐하면 상품기호들을 다시 약호화함으로써 우리의 등가의 경제에 내부로부터 저항하는 길들이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 중의 하나인 대중문화 기호들의 전용은 하위문화 양식 (사회적 성, 인종, 계급의 기호들을 꼴라쥬하고  주문생산하는 )과 신화비판 미술(종종 고급미술의 기호들과 상충되면서 그러한 미술들을 다시 틀짓는 셔리 래빈,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 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전략의 또 다른 측면인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전용은 쿤즈, 스타인바흐 그리고 같은 부류의 작가들의 작업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작업 속에는 상품 기호들의 전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 무엇인가? 때로 이런 전용은 사물에 비평적인 양가성을 회복시켜 주기도 한다. , 쿤즈의 불합리한 물속 농구공 작품, 조엘 오터슨이 맥주병들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토템적 기둥이나 야구방망이로 이루어진 작품들 그리고 저스틴 라다Justin Ladda가 일상물을 부적절하게 재구성한 작품(예컨대 독일의 르네상스 화가 뒤러의 기도하는 손 Praying Hands 의 형태로 만든 타이드Tide 세척제 박스들)등이 그 예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채택된 상품은 양가적인 작품으로 표현된다. 특히 오터슨의 경우 하위문화적 양식의 비판적 브리꼴라쥬에 근접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이 같은 전용은 사물의 등가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가장 분명한 예는 스타인바흐의 색채로 약호화된 상품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미술 오브제는 직접 상품으로 제시된다. 마치 그 자체의 소비에 맞서 자멸적인 선제공격이라도 하듯이.

그러나 너무나도 자주 이러한 매개조각은 자체의 효과를 위해 상품물신에 내재한 신비스러운 특질(맔스가 언급한)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미술과 상품의 차이를 붕괴시킬 때 그것은 미술의 상실된 아우라를 상품의 위장된false 아우라로 보상한다. 이런 보완은 이율배반적이다. 왜냐하면 예술적인 아우라를 파괴했던 것은 바로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새로운 문젯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바, 미술을 탈신비화하려는 장치로 사용되었던 기성품이 오히려 미술을 재신비화하려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미술의 기능과 환각    

 

이제까지 내가 주장해 온 것은 (포스트)모던 미술 작품이 의미심장하게 재규정하는 것들의 상당수가 실은 사물의 다른 경계들 간의 모순에 대한 물신주의적 반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들의 대다수는 모더니즘과 대중문화의 변증법에 의해 번갈아 가며 축적된 것이다. 그것은 기성품이 표현하려고 시도해온 모순, 즉 기능적 산물임과 동시에 역기능적 미술작품이라는, 기성품 자체에 내재한 모순을 표현하려고 시도해 온 것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쿤즈, 오터슨, 그리고 그외 작가들의 기성품들 안에 현대 (미술) 오브제의 다른 특성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비합리성이다. 현대미술에서 기능적인 것과 역기능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매개한 것이 이 비합리성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존 캐슬러와 그외 작가들의 환각적인phantasmagorical 사물들에서 보듯 매개조각의 또 다른 측면을 설명해 줄 것이다.

역기능적인 미술(자율적이고 전적으로 형식적인)을 위하여 기능적인 미술(변형적이고 테크놀로지적으로 진전된 미술)에 그저 반대하는 식의 아방가르드 모델은 모더니즘 미술을 대중문화에 단순히 대립시키는 모델만큼이나 문제가 있다. 이러한 모델은 그것이 포함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 (예컨대 다다이즘의 무정부주의적 제스츄어, 초현실주의의 환상적 오브제들)을 배제시킬 뿐만 아니라 바우하우스, 데 스틸 등에 의해 채택된 기능성fuctionality을 지나치게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보들리야르도 지적하듯이 단순한 발상이다. 그런 아방가르드 프로그램들은 디자인의 추상적인 논리와 유사하게 미술과 오브제를 채택하며(미술) 오브제들의 기능성이나 사용가치를 회복시켜주지 못했다. 디자인의 논리에서는 미술형식들의 생산주의적 종합이 아니라 사회적 기호들의 미학주의적 등가성이 야기되어 사물들을 기호로서 소통시킨다.

 사실상 바우하우스, 데 스틸 등은 (당시 대두하기 시작한) 기호의 정치경제학에 대항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진전시켰다. 또한 그것들은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경제에 대한 비판 혹은 대항담론을 야기시켰다. 그러한 모더니즘 운동들의 합리화는 결코 완전하지 않았고 잔여의 것 혹은 억압된 것을 남겼다. 예컨대 현대 디자인의 합리적 산물이 키치라고 하는 불합리한 산물을 야기한 것처럼 바우하우스의 기능적인 사물은 초현실주의의 비합리적인 산물을 야기했다.

  이 같은 기능적/비합리적 변증법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사실상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거대한 (포스트)모던 변증법의 일부이다. 레지스 드브레 Regis Debray가 썼듯이 비합리적인 것의 상승은 응용 과학성의 한계점의 상승과 병행한다. 그것은 일종의 대체효과이다. 객관적인 세계가 더욱 합리화 될수록 비합리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을 사로잡는다. 이 같은 이성/비이성의 변증법은 우리 시대의 다양한 반모더니즘과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알려준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쿤즈와 스타인바흐가 재구성한 합리적/비합리적 산물들에서, 그리고 캐슬러 류의 작가들이 보여준 광적인 시뮬레이션들에 명백하게 나타난다.(예컨대 쿤즈와 스타인바흐가 기능적인 것을 불합리하고 제멋대로의 표현으로 이끌어갔던 반면에 캐슬러 류의 작가들은 기능적인 것을 환각적인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런 착란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유례없이 전율적인 상품들과 광적인 주체 효과들이 작업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 비평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혹은 그러한 비판적 거리가 함몰되어버렸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환각적인 미술을 그 자체의 전통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초현실주의만이 아니라 스페타클이, 키치만이 아니라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여기서 또 다시 고급과 저급 문화 사이의 과거의 모더니즘적 대립은 둔해진다). 이 같은 형식들의 구체화에 있어 핵심용어는 기본적으로 19세기 초의 스펙터클 유형을 대표하는, 이른바 마술적인 빛에 의해 시각적 효과를 산출했던 환각phantamagoria이다. (그것들은 캐슬러의 구성물들에 잘 들어맞는 명칭이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상품물신주의를 묘사하기 위해 그 용어를 채택했다. 상품물신주의란 사물간의 관계에 환각적 형식을 불어넣어 그것이 사회적 관계를 대신하게 하는 장치로 이때 상품의 형식이 노동의 사실을 모호하게 만든다. 맑스,의 지적처럼 사람과 상품의 환각 안에서 사물은 생명을 부여받은 독립적 존재로나타난다. 이런 주장으로부터 맑스는 상품물신주의와 종교사이의 유추를 끌어낸다. 이러한 설명에 의거해 우리는 상품물신주의와 종교 그리고 스펙터클과 매개조각(종종 물신주의적, 제의적 그리고 스펙터클적 조각을 볼 수 있듯이) 사이의 좀 더 진전된 유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는 환각적 상품이라고 하는 어떤 공통된 유출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따르면 바그너의 환각적인 오페라와 더불어 미적인 현상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상품 특성의 한 기능이 되었다. 이는 이 무렵 예술 작품이 전시용 물건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는 점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이 상품처럼 숭배되는 마술적 사물 같은 것으로 감상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로 인해 예술작품을 생산해 낸 노동, 사회, 역사는 스펙타클한 효과들의 배후로 사라져 버렸다. 100여년 전에 바그너의 오페라에서처럼 케슬러와 그 부류의 작가들은 빛의 스펙타클 효과를 이용했다.  , 환상이 극대화 되는 지점에서 상품은 가장 다루기 쉬운 것이 된다. 사람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사물은 마치 절대적인 객관적 표명인 양 눈앞에서 마술적으로 어른거리게 된다. 이런 미술과 스펙터클 일반의 주체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그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생산된 리얼리티가 신화적으로 느껴지고 재현되는 정도로우리 자신의 혼동과 낯섦을 응시하게 된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바그너는 사회적 과정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조차 그것은 개인의 개입을 훨씬 초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것을 그는 신화로 변형시켰다. 사회적 과정의 불투명함과 불가항력이 형이상학적 신비로 찬미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백년이 지나서 케슬러에게 사회적 과정의 불투명성과 강력함은 훨씬 더 전체적이고 더욱 더 형이상학적이게 되었다. 예컨대 케슬러는 오리엔탈리즘적 키치의 사물들(점착성의 스크린, 대량생산된 부처들)을 사용하여 그 자체의 역사적 양식들뿐 아니라 모든 다른 문명들을 소비를 위한 이미지와 제작품으로 변화시키는 사회적 과정을 환기 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케슬러는 이러한 과정을 투명하게 표현하고 있는가? 혹은 그런 힘에 기대어 그것의 신비함을 찬미하는가? 단적으로 그런 미술가들은 우리의 후기자본주의 이미지들을 분열시키는가, 아니면 노스탤지어와 이국 취향의 나르시시즘을 즐기는 것인가? 서구의 스펙타클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가?

  키치를 미술에 끌어들이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50년 전에 초현실주의자들은 낡아빠진 이미지들을 채택했다. 특히 그들은 손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장인 경제 artisan economy의 물건들에 호기심을 느꼈다. 동일하게 그런 매력에 끌렸던 발터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을 유행에 뒤진 것 속에 있는 혁명적 에너지를 알아챈 최초의 미술가들이라 평했다. 그런 에너지들은 또한 키치 물건들에서 나타나고 케슬러는 또한 그런 품위없는 물건들에 이끌렸다. 이제 이런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효과를 위해 초현실주의자들은 19세기의 꿈 이미지들(예컨대 낡은 사진들, 버려진 장소들) 20세기의 현실 원칙과 병치 시켰다. 즉 그들은 물건들에 내재한 모순적인 경제들을 비판적인 안목에서 병치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매개조각을 만드는 작가들 역시 동일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키치가 갖고 있는 주문을 깨고 그것의 희망을 풀어주고 재약호화하는 것일까?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이미지의 마법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그것의 유토피아적 잠재력을 되새기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단지 모든 표현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환원시키고, 모든 사건들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변화시키는 문화변용과정을 단순히 반영하기만 하는 것일까?

 모든 원시주의가 붕괴했고 모든 초현실주의가 효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제 스펙타클의 외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은 성급한 것이다. 우리의 주관성이 사회구성체 혹은 경제양식과 언제나 보조를 같이 하지 않는 것처럼, 상품의 사회적 과정을 거부하는 문화적 실천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외부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가 이 글에서 살펴보고 있는 매개조각이 스펙터클에 대해 단지 관조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키려고 활동하는 미술 (예컨대 마사 로즐러 Martha Rosler, 코니 해치 Connie Hatch의 작업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필요한 보완으로서 결론적으로 두 가지의 실천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비물신주의적 미술이 상품물신주의에 의해 현혹된 사회의 종교적 반영에 저항하여 일상적 삶의 실질적 관계들 (맑스)의 투명성을 추구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미술의 거대한 이율배반-그것이 진리를 分有하는 것은 환영illusion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완성하는 일을 통해서인, 즉 자체의 물화reification를 통해서만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을 반영하는 물신주의적인 작업이다.

 

영철

<20세기 문화 미리 보기> 가운데서